이렇게나 아름다운데 2만 명 이상 굶어 죽은 곳이라니

김성례 2025. 11. 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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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항구 도시 라로셸의 역사와 호스트 이자벨의 삶 이야기

프랑스 한 달 여행 중 보르도에 이어 10월 15~17일 여행한 라로셸 호스트 여행기입니다. <기자말>

[김성례 기자]

라로셸은 프랑스 서부 뉴 아키텐 지역에 있는 항구 도시다. 이 도시의 기원은 프랑스가 로마의 지배를 받던 갈로-로만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세에는 어촌이자 작은 도시였으나, 12세기에 아키텐 공작 가문의 보호 아래 자유무역항 특권을 얻어 성장하기 시작했다. 보르도처럼 바다와 강을 끼고 부를 축적하며 프랑스의 주요 항구 도시로 발전했다.

도시 인구는 시내가 약 8만 명이고, 외곽 지역을 합치면 전체 인구가 약 17만이 넘는다. 항구에 접한 시내 면적에 비하면 인구 밀도가 꽤 높은 편이라 우리를 호스트 해 준 이자벨 부부는 시내의 높은 땅값 때문에 교외로 나가 전원주택을 구매하여 훌륭하게 개조해서 살고 있었다.
▲ 라로셸 구 항구 식당가와 항구모습
ⓒ 김성례
이자벨 부부와의 따뜻한 동행

이자벨은 54년생으로, 남편과 함께 교사로 은퇴했다. 그녀는 대학에서도 영어를 가르쳤다. 서바스(Servas)라는 여행 단체와 외국 유학생들이나 여타 해외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활동도 하고 있었다. 취미로는 남편 클로드와 함께 자전거 타기, 요리, 정원 가꾸기 등을 하고 여행을 좋아해서 이미 한국도 왔다 갔고, 세계 각 대륙으로 여행을 다녔다.

우리는 호스트 체험 중 가장 큰 방과 욕실, 거실을 제공 받았다. 첫날 역으로 마중 나온 그들 부부와 함께 맛있는 점심을 먹고 시내를 산책했다. 보통 밖에서 식사할 때는 숙식 제공과 현지 여행 안내까지 해 주는 호스트 가정에 대한 고마움으로, 게스트인 우리가 식비를 부담하는 것이 에티켓이다. 그리고 의무는 아니지만, 문화 교류 차원에서 한국 요리를 대접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자벨의 집에서는 프랑스 식으로만 먹고 한국 요리를 따로 하지 않았다.

특별히 호스트 마지막 날은 프랑스 알자스 지방의 전통 음식인 슈크루트를 해 주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클로드는 소금에 절여 발효시킨 시큼 새콤한 양배추가 한국 사람의 김치와 같으니 좋아할 거라며 맛난 소시지, 훈제 돼지고기와 함께 요리해 주었다.

마중 나온 이자벨은 마침 장을 보려고 장바구니를 들고 나왔다. 그래서 어딜 가나 내가 좋아하는 장 구경도 했다. 가면서 그들이 결혼하고 사진을 찍은 시청의 발코니도 보여주고, 아기자기한 식당과 상점들을 보고 나서 구 항구 쪽으로 걸어 나왔다. 클로드는 보르도가 와인으로 유명하다면, 이곳은 원래 소금 교역이 유명했고 나중에는 와인과 증류한 코냑을 영국과 네덜란드에 많이 팔았다고 했다.
▲ 호스트 이자벨집 수영장과 석류나무가 있는 넓은 집
ⓒ 김성례
▲ 슈크루트 호스트집 식사, 프랑스 치즈, 식전주 아뻬리티프
ⓒ 김성례
자유 무역항 라로셸의 아픈 역사
라로셸은 16세기부터 개신교도 위그노의 중심지였기에 프랑스 왕실 및 가톨릭 세력과 충돌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가장 유명한 사건으로는 개신교 세력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 하려던 리슐리외의 라로셸 포위가 있다. 해안선을 따라 있는 옛 항구의 세 탑은 아름답고 고풍스러웠는데 이 탑들이 위그노를 탄압한 포위에 맞서 해상 봉쇄용 방벽으로 사용되었다.
▲ 라로셸 구항구와 세 탑이 보이는 풍경
ⓒ 김성례
자유 무역을 통해 독립적인 상업 도시로서 부를 쌓아가던 라로셸은 프랑스 내에서 가장 강력한 위그노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리슐리외 추기경은 루이 13세의 절대 왕정 강화를 위해 "왕권보다 강한 어떤 자치 세력도 용납하지 않겠다"라며 12만 명의 왕실 군을 동원해 무려 14개월 동안 도시를 포위했다.

그로 인해 당시 시민 2만 7천 명 중 2만 명 이상이 굶어 죽었다 하니 그 참상을 상상할 수 있다. 약 1.5km 길이의 거대한 석제 제방으로, 바다에서 식량이나 구호 물자가 들어오지 못하게 차단한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결국 1628년, 라로셸은 항복했고 리슐리외는 도시 자치권을 폐지하고 가톨릭 신앙을 강요했다.

구 시가지(Old town)에는 아직도 위그노 관련 거리 이름들이 남아 있고 좁은 골목, 상점, 시장 등 볼거리가 많고 분위기가 있었다. 여행 전 미리 알았더라면 가 보았을 '프로테스탄트 박물관'을 못 보고 와서 좀 아쉽다.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신앙의 자유는 목숨처럼 소중했을 것이고 그래서 낭트 칙령(앙리 4세가 1598년 4월 프랑스 내에서 가톨릭 이외에도 칼뱅주의 개신교 교파인 위그노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한 칙령) 이후 라로셸은 신교도들의 도피성이 되었다. 그러나 그 평화는 가톨릭 신자 왕이 왕권을 강화해야 할 상황에서 깨지게 되었고 핍박의 칼날은 결국, 위그노의 수도였던 라로셸을 향했던 것이다.

남편과 나는 이튿날에도 시내로 나와 시내 구석구석을 다니는 무료 유람 버스도 타보았다. 그리고 해안선을 따라 바닷가를 걸었다. 아픈 역사를 지닌 구 항구에 지금은 수많은 요트가 정박해 있었고 파란 물결을 헤치며 요트들이 바다로 나아가는 모습이 시원했다. 항구 쪽 뷰를 즐길 수 있는 곳의 식당에서 사람들은 햇빛을 즐기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자벨과 다시 만날 약속을 한 Place Verdun 쪽으로 가는 중 길 양 편으로 사람들이 비를 맞지 않고 쇼핑을 할 수 있는 아케이드가 줄지어 있었다. 한때 무역항으로서의 부를 실감케하는 상점들을 구경했다. 생루이 성당이 있는 베르덩 광장 앞에는 마침 자폐아들을 위한 행사가 있었다. 따뜻한 커피와 빵을 간식으로 얻어먹고 좋은 일을 하는 봉사자들에 대한 감사함으로 짧은 인터뷰도 했다.
▲ 베르덩 광장  생루이성당과 광장 앞 행사
ⓒ 김성례
집으로 돌아올 즈음 우리를 데리러 온 이자벨은 근처 바닷가 마을로 데려가 드라이브를 시켜주었다. 썰물로 넓어진 해변과 철새들이 머무는 곳이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백년전쟁(1337~1453년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벌인 장기전, 왕위 계승과 영토 분쟁이 발단이었고 프랑스의 승리로 끝남) 시절의 오래된 교회를 보여주었는데, 높은 곳에 있는 교회는 피난처이자 요새 역할을 했다 한다.
▲ 바닷가 철새 도래지 산책 오래된 교회
ⓒ 김성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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