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현옥의 시선] 서학개미를 때리면 환율이 떨어질까

하현옥 2025. 11. 17.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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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현옥 논설위원

“외국인들이 주식·채권 팔아서 ‘먹튀’하는데 환율까지 잘 쳐서 보내주네.”

외환 당국이 강력한 시장 개입 의지를 드러내며 원·달러 환율 급등을 막아선 지난 14일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이다. 이날 원화가치는 장중 달러당 1475원 근처까지 밀리다(환율 상승) 당국의 구두 개입 이후 달러당 1450원대로 튀어 오른 뒤 1457원에 거래를 마쳤다. 정부 개입에 하루 사이 원화 값은 20원가량 급등(환율 하락)했다. 원화를 달러로 바꾸려는 이들에게는 ‘운수 좋은 날’이었다.

16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들어 지난 14일까지 주간 거래 종가 기준으로 연 평균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은 1415.28원을 기록했다. 뉴스1


환율은 두 나라 통화의 교환가치다. 원화 값이 오르면 같은 돈으로 살 수 있는 달러 액수가 늘어난다. 날개 없이 추락하던 원화에 당국이 날개를 달아주며 외국인 투자자가 나갈 절호의 찬스를 만들어 준 것이다. 실제로 이날 하루에만 국내 증시에서 외국인 투자자는 2조6825억원어치를 순매도했다. 외환 시장의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한 조치였다고 해도, 뒤늦은 개입에 외국인 좋은 일만 시켜준 셈이 됐다.

시장이 외환 당국의 개입을 늑장 대응으로 느끼는 건 ‘체감’ 원·달러 환율이 이미 1500원을 넘어섰다는 인식 때문이다.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미국 달러화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 인덱스는 지난 14일 99.3을 기록했다. 달러인덱스가 100을 밑돌면 달러가 상대적 약세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지난 5월 이후 100이 무너진 뒤 좀처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달러가 약세면 원화가치가 오르는 게 정상적이다. 하지만 최근의 흐름은 사뭇 다르다. 원·달러 환율이 1500원을 향해 가속 페달을 밟으며, 달러 대비 원화가치는 급락 중이다. 여기에 달러인덱스 하락까지 감안하면 원화가치의 낙폭은 더 클 것이란 게 시장과 투자자들의 생각이다. 체감 원·달러 환율이 1500원을 훌쩍 넘겼을 것이란 분석까지 나오는 이유다.

지금은 먼 이야기지만 한 때 ‘1달러=1400원’은 환율의 1차 저지선이었다. 12·3계엄 사태 이전에 원·달러 환율이 달러당 1400원을 넘긴 건 아시아 외환위기와 세계금융위기, 레고랜드 사태가 겹친 2022년 등 단 3번에 불과했다. 지난해 4월 장중 환율이 1400원을 돌파하자 당시 야당 대표이던 이재명 대통령이 “국가 경제 전반에 위기가 현실화했다”고 말했을 정도다.

「 약달러에도 원화가치는 더 하락
내국인 해외 투자 급증 탓하지만
고환율 부추기는 정책 수정 필요

경제의 기초 체력을 반영하는 환율 급등은 경제 위기에 대한 발작 버튼을 누를 수 있다. ‘한국 경제가 정말 괜찮으냐’는 의문은 커져만 간다. 하지만 헷갈린다. 환율의 보루인 경상수지는 '이상 무(無)'다. 심지어 올해 1~9월 경상수지 흑자(827억7000만 달러)는 역대 최대치다. 그럼에도 환율은 치솟고 있다. 당장 눈에 띄는 건 거센 외국인의 이탈이다. 외국인 투자자는 이달 들어 지난 14일까지 주식 8조8954억원어치, 10년물 국채 선물 2조5464억원어치를 순매도했다.

외환 당국은 ‘서학개미’를 주목한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한 인터뷰에서 “최근 환율 움직임은 대부분 국내 거주자의 해외투자에 좌우됐다”고 했다. 미국 주식을 쓸어담는 서학개미의 달러 수요가 환율을 끌어올린다는 것이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지난 3~14일 국내 투자자의 미국 주식 순매수액은 36억3376만 달러(약 5조2889억원)다. 지난달 순매수액은 68억5499만 달러(약 9조9774억원)에 달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등 경제 고위 당국자들은 지난 14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시장상황점검회의를 개최했다. 왼쪽부터 이찬진 금융감독원장,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구 부총리, 이억원 금융위원장. 기획재정부

서학개미가 야기한 외환수급 불균형 해소를 위해 외환 당국은 국민연금과 수출업체를 구원투수로 끌어들일 기세다. 국민연금의 ‘전략적 환헤지’와 달러를 가진 수출기업의 환전을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원화 약세 기대의 고착화를 막겠다는 의도다.

하지만 원화 약세에 대한 시장의 기대는 쉽게 꺾이지 않을 것이다. 완화적 통화정책 속 오랫동안 이어진 한미 금리 역전과 재정 확장 정책에 따른 막대한 유동성은 원화 가치를 끌어내리고 있다. 728조원 규모의 내년도 수퍼 예산은 원화 약세를 더 부추길 수 있다. 관세 인하를 위해 약속한 3500억 달러의 대미 투자는 기업의 달러 수요를 더욱 자극할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원화 약세 요인이다.

원화 하락 압력을 키우는 통화와 재정 정책의 기조를 전환하는 근본적 대책 없이 서학개미 때리기로 상황을 바꾸긴 힘들다. 외환 시장 안정을 위해 국민의 노후자금인 국민연금을 환율 방어에 동원하고, 시장의 변동성에 대응하려 달러를 쥐고 있는 기업을 압박하는 게 적절하냐는 논란도 빚어질 수 있다. 이런 미봉책으로 환율을 떨어뜨릴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시장의 흐름은 바꾸지 못한 채 자금 이탈 세력에게 또 다른 ‘운수 좋은 날’만 만들어 주는 헛발질에 그칠까 그저 걱정스러울 뿐이다.

하현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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