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될까? '임신' 간절한 부부가 주고받은 말
[김상목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지연'과 '도진'은 아이를 가지려 오랫동안 온갖 시도를 해왔다. 하지만 어렵게 임신한 기쁨도 잠시, 또다시 유산의 상실감을 안고 부부는 허무함에 빠진다. 노력하면 잘될 거라 믿으며 지난 몇 년을 바쳤지만, 결과는 난임의 확인이다. 차라리 불임 확정이라도 받으면 포기라도 하련만, 난임이란 규정은 집착과 체념 사이를 오가며 두 사람을 갉아먹는다.
남편 도진은 이제 포기하고 싶다. 그냥 사랑하는 둘이 오순도순 살면 되지 않을까? 물론 그도 아이가 생기면 좋겠지만, 지난 시간 동안 겪은 피로감이 만만찮다. 하지만 아내 지연은 다르다. 조금만 더 애쓰면 될 것 같다는 마음을 포기할 수 없다. 직장에 다니는 도진과 달리 가족을 이루기 위해 만사 포기한 채 오직 임신과 육아 준비만 해온 지연은 그동안 바친 노력이 헛되다는 걸 인정하기 어렵다.
도진은 지연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반려견을 입양하자고 제안도 해보고, 함께 바람 쐬러 바쁜 시간 쪼개 다녀도 보지만, 지연의 결심은 요지부동이다. 그녀는 용하다는 점집에도 다녀보고, 지푸라기 잡는 심경으로 뭐든 시도한다. 그럴수록 도진은 질색이 된다. 사랑으로 굳게 결속해 온 부부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둘의 대화는 점점 허공을 맴돈다. 대체 왜 지연은 남편도 말리는데 임신에 매달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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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잠> 스틸 |
| ⓒ 필름다빈 |
영화 속에서 왜 지연이 그토록 임신에 강박을 갖는지 원인은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드라마에서 상투적으로 등장하듯 시부모가 가문의 대를 잇고자 압력을 가하는 것도 아니고, 남편도 2세 욕심은 없지 않아도 아내를 들볶으며 책임을 전가하는 유형도 아니다. 오히려 아내의 강박을 염려하거나 혹은 두려워하는 데 가깝다.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하지만 지연은 관객의 답답한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맹목적인 집착으로 치닫는다. 처음엔 안쓰럽게 그녀의 처연한 표정을 지켜보던 이들은 점점 이러다간 무슨 일 나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변해간다. 그 강도가 강해질수록 특이하게 카메라는 지연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서라도 찾을 수 있는 얼굴과 시선을 감춘다. 관객은 대부분 장면에서 그녀의 뒷모습, 혹은 공허한 측면만을 지켜볼 수 있다. 계속 내 사전에 포기란 없다는 듯, 지연은 부지런히 이것저것 도모하고 실행한다.
그렇게 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 없는 지연의 종횡무진 폭주는 영화의 긴장을 증폭 시킨다. 선하고 조용하던 인상은 점점 무표정하고 심드렁해지다 임신 가능성에만 집요하게 반응한다. 용한 점쟁이에게 비법을 얻었다며 남편을 황망하게 만들고, 길한 날과 시간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급기야 마치 김기영의 영화 <이어도>에서 선보인 기괴한 의식을 떠올리는 찰나에 도달하는 순간, 이야기는 도착증과 에로티시즘의 경계를 넘나든다.
지연은 소박한 행복을 지키려다 점점 타락하는 듯 보인다. 조경이 잘 된 아파트 단지에 살던 그녀가 별안간 오래된 변두리 골목을 누빈다. 그러다 발견한 동네 미용실 앞에서 한참을 서성인다. 혹시나 지연이 아이에 집착하는 이유를 풀어줄 단서가 나올까 기대를 품지만, 한참 후 밝혀지는 진실은 심리적으로 꽤 큰 충격을 안길 법하다. 전통적 성 역할을 뒤집는 앞서 언급한 국면이 파격적이라면, 미용실 관련 일화는 도덕적 파탄의 위험에 그녀가 봉착했음을 선포하는 분기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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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잠> 스틸 |
| ⓒ 필름다빈 |
도진은 그런 지연을 조금씩 두려워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남편은 왜 아내가 그렇게 표독하게 행동하는지 잘 이해하는 듯하다. 연민과 공포가 교차하는 시선으로 그는 아내와 무한 밀고 당기기를 거듭한다. 격하게 충돌한 다음엔 부부 모두 힘이 빠져 털썩 주저앉는다. 그제야 잠시나마 평화가 깃든다. 어떻게든 가정과 사랑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애쓴다. 그런 둘의 마음이 교류하는 순간, 도진과 지연의 눈길과 관객의 시선이 교차로에서 만나듯 한때 행복하던 그들의 결혼과 연애 시절 사진이 카메라에 잡힌다. 집착만 버리면 다시 행복해질 수 있는데 한숨 쉬듯 무언의 충고를 던지려는 듯하다.
물론 영화를 제작한 이들의 의도를 온전히 파악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필시 <통잠>이 관객에게 전달하고픈 주제는 남들 다 갖는 2세 재생산의 욕망이 영문 제목처럼 화목하던 부부에게 거대한 '결핍'이자, 모든 불행의 근원인 상대적 박탈감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주인공 부부와 반대로 자녀들 돌보느라 전쟁을 치르며 다복하게 지내는 지인 부부와의 주말 캠핑에서 자연스럽게 살면 되지 않냐며 지나가던 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지연의 심리가 딱 그렇다. 흘러가는 대로 순응하면 불만과 근심은 줄어들게 마련. 집착은 만악의 근원일진저. 그러나 미혹은 힘이 세다.
과연 지연은 자신을 휘감은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관객이 안절부절 걱정하는 만큼 영화는 극단적으로 파국을 향해 폭주하진 않는다. 그러기엔 그들은 나이 먹을 만큼 먹고 충분히 현실적이다. 지연도 히스테리를 제법 부리긴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안 가려 노력하고, 도진 역시 필사적으로 그런 그녀를 돕는다. 이들은 어떻게든 가족을 깨지 않으려는 결의만은 확고히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건 과연 사랑의 힘일까? 아니면 그조차 다행이 아니라 체면치레를 위한 인내의 발동인 걸까? 판단은 관객 각자의 몫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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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잠> 스틸 |
| ⓒ 필름다빈 |
그렇게 이제 지난 시대의 유물이 되어가는 '정상가족'을 복원하려는 부질없는 욕망은 그들에게 내린 저주를 보는 듯 떠날 생각이 없다. 둘은 계속 애끓는 노력을 감수할 테고, 운 좋게 성공한다 해도 그걸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리 없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결합, 대안적인 가족 형태가 사회적 논쟁과 진통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확산되긴 해도, 여전히 '가족' 제도가 상상하는 핵심엔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조합의 정상가족이 중심에 설 건 자명하다. 변화는 오랫동안 점진적으로 수행되고, 결과가 확정될 때 비로소 수면 위로 떠오를 테다. 그런 엄연한 사실을 <통잠>은 다시금 강조하고자 한다.
과연 21세기 현대 가족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지연과 도진, 두 주인공이 걸어갈 길은 여전히 기존 결혼제도 틀에 속박된 다수에게 언제든 닥칠 예시다. 구시대 유산에 속박되지 않고,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며 순리대로 형편과 조건 닿는 한도에서 스스로 행복을 찾으면 된다는 평범한 교훈을 새삼 일깨우는 이야기는 당혹스럽지만, 곱씹는 재미를 은근히 선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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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잠> 스틸 |
| ⓒ 필름다빈 |
지연 역을 담당한, 독립영화 팬이라면 익숙한 얼굴의 김시은 배우는 처연한 슬픔과 맹목적 집착이 공존하는 욕망 가득한 중산층 기혼여성의 잠재된 에너지를 폭발시키며 영화의 밀도와 좌표를 동시에 책임진다. 오랜 경력과 시야가 지층처럼 퇴적된 연기임을 작품에 관한 판단을 떠나 누구나 공감할 법하다.
그런 지연의 폭주를 때로는 점화하고 때로는 폭격당하듯 감당하는 도진 역은 그를 상징하는 십자가와 함께 이모저모 은유로 다가온다. 둘의 계급성을 폭로하는 쐐기 역할을 소화한 석희 배우의 개성 있는 슬픈 얼굴까지 배우들 사이의 터질 것만 같은 호흡이 영화에 선명하게 각인된다. 중반 이후 뒷모습만 보여주던 지연이 미용실에서 경실과 대면할 때 관객이 느끼던 모호함이 도덕적 파산으로 전락하는 장치나 부부간의 눈빛과 숨소리란 비언어적 대화의 폐소공포증도 분위기에 일조한다.
<통잠>은 그렇게 다르덴 형제의 세례를 받은 한국독립영화 작품군의 계보를 잇는 변주이자, 21세기 가족주의의 현주소 스케치로 제 자리를 찾는다. 음울하지만 지독하게 사실적인 단면도를 그리는 작업이다.
<작품정보>
통잠
Deprivation
2024 한국 드라마
2025.11.19. 개봉 85분 15세 관람가
감독 김솔해, 이도진
출연 김시은, 이도진, 석희
제작 ㈜타이거시네마
배급 필름다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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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잠> 포스터 |
| ⓒ 필름다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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