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가 이끄는 리테일 트렌드 [스페셜리포트]

나건웅 매경이코노미 기자(wasabi@mk.co.kr), 조동현 매경이코노미 기자(cho.donghyun@mk.co.kr) 2025. 11. 13.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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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가 이끄는 리테일 트렌드

1. 눈길을 잡아라…익스테리어 전쟁

건물 통째로 래핑하고 파격 설계

성수에 입성할 정도 되는 브랜드라면 인테리어는 기본값이다. 이제 차별화는 바깥에서 시작된다. 유동인구가 넘쳐나는 거리에서 단 한 번의 시선, 단 한 번의 발걸음을 붙잡기 위해 건물 외관 자체를 브랜딩 캔버스로 쓰는 전략이다. 요즘 성수에서 인테리어가 아닌 익스테리어 전쟁에 불이 붙은 이유다.

모범 사례가 많다. 패션 기업 한섬 온라인 브랜드 ‘EQL’이 성수동에 문을 연 오프라인 스토어 ‘EQL 성수 그로브’도 그중 하나다. 건물에는 초대형 종이 인형이 걸터앉아 있는데, 프랑스의 세계적인 그래픽 아티스트 장 줄리앙이 만든 대형 오브제 비스킷맨이다. 장 줄리앙 외에도 다양한 아티스트와 주기적으로 협업, 매장 외벽과 파사드를 그래픽 작품으로 순환 노출한다.

성수에 위치한 수많은 뷰티 스토어도 자기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외관으로 차별화했다.

올해 8월 문을 연 ‘라카 성수 플래그십’은 13m가 넘는 건물 외벽 전체를 자사 대표 컬러인 짙은 와인색으로 도장했다. 특수 페인팅 광택과 톤 변화로 시간·날씨마다 사진 결과물이 달라지게 설계했다. 하나의 색을 외피 전체에 입혀 브랜드 정체성을 한눈에 각인시키는 전략이다.

라카가 와인색이라면 ‘롬앤’은 핑크다. 올해 5월 개장한 ‘롬앤 핑크오피스’는 건물 전체가 분홍빛이다. 평평한 외벽 전체를 핑크 한가지색으로 래핑(도장)하고 주력 아이템인 대형 틴트를 외벽 오브제로 툭 튀어나오게 박아넣었다. 무엇을 파는 곳인지, 브랜드가 어떤 분위기를 지향하는지를 고객은 멀리서부터 알아차릴 수 있다.

이 밖에도 ‘퓌’는 브랜드 컬러인 파란색을 강조한 블록을 적극 배치했고 ‘토리든’은 반투명 재질로 물결치는 듯한 대형 창문을 달았다. 보습을 핵심 키워드로 갖는 브랜드 정체성을 알리기 위해 수분의 흐름을 형상화했다. ‘티르티르’ 성수 플래그십 스토어 입구에 설치된 대형 립스틱과 파운데이션 모형은 브랜드 인지도와 제품 정체성을 한눈에 보여주며 입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성수동 익스테리어에 가장 진심인 기업 중 하나는 ‘아이아이컴바인드’다. 아이웨어(안경) 브랜드 ‘젠틀몬스터’와 향수 브랜드 ‘탬버린즈’ 운영사로 유명한 기업이다. 예를 들어 젠틀몬스터 팝업 매장 건물 위에는 아이돌 에스파 멤버 카리나를 본따 만든 대형 오브제가 걸터앉아 있다. 탬버린즈 플래그십스토어 건물은 지상부를 철골 콘크리트 프레임만 남긴 채 텅 비워낸 설계로 성수동 최고 포토존 중 하나로 떠올랐다. 실제 매장은 지하에 배치하고, 상부를 비워 뚫린 창으로 자연광을 끌어 지하 매장 공간을 외부에서 전시물처럼 내려다보게 했다.

화룡점정은 올해 9월 초 문을 연 아이아이컴바인드 신사옥 ‘하우스 노웨어’다. 마치 잠실 롯데타워처럼, 성수 전역에서 보이는 고층 빌딩을 새로 세웠는데 그 외관이 독특하다. 마치 우주선이나 SF 영화에 등장하는 외계행성 요새를 연상시킨다.

가장 화제가 된 건 새 건물 바로 옆에 있던 20억원대 꼬마빌딩 철거였다. 아이아이컴바인드는 신사옥 외관을 온전히 드러내고 주목도를 높이기 위해 불과 1년 전 리모델링을 마친 옆 건물을 통으로 임차한 뒤 허물었다. ‘자본주의 폐해’라는 비판도 있지만, 자사 브랜드를 각인시키기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는 성수동 최근 트렌드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성수동은 지금 뷰티 플래그십 전쟁터다. 저마다 브랜드 정체성을 담은 외관으로 눈길 사로잡기 경쟁 중이다. 사진 위에서부터 라카 플래그십 스토어, 퓌 아지트 성수, 롬앤 핑크오피스. (윤관식 기자)
2. 이목구비 전부 집중시켜라

냄새·촉각·체험으로 승부수

이목을 집중시킨다는 표현이 있다. 성수에서는 부족하다. 시각적 자극은 기본. 청각·후각·촉각 등 모든 감각을 총동원해 인상 깊은 고객 경험을 주고자하는 시도가 계속된다. 매장 외관에서 받았던 충격을 내부까지 이어가기 위한 오감 노력이다.

성수 메인 거리인 연무장길에서도 최근 가장 많은 인파가 몰려 있는 곳 중 하나는 ‘자연도소금빵’이다. 제대로 된 간판 하나 걸어놓지 않았지만 매장 앞은 늘 인산인해다. 무기는 ‘냄새’다. 버터 풍미가 강한 빵을 굽는 과정에서 그윽한 향이 먼 거리까지 흘러나오도록 설계했다. “저 멀리서 빵 냄새를 맡고 홀린 듯 줄을 선다”는 후기가 줄을 잇는다.

향기 마케팅에 가장 공을 들이는 브랜드는 역시 향수다. ‘헤트라스 성수 플래그십’ 타이틀은 향으로 완성하는 공간의 미학이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시그니처향이 퍼진다. 각종 시향컵과 고체 향수도 체험 가능하다.

진한 향으로 따졌을 때 둘째가라면 서러운 브랜드가 ‘러쉬’다. 성수에서는 향 외에도 다른 마케팅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바로 공연이다. 러쉬는 매장 2층 개방형 발코니를 무대로 배우를 내세운다. 향기는 물론 음악과 퍼포먼스까지 동원해 이목을 끄는 전략이다. 공연은 99번째 오디션에서 좌절한 한 무명 배우가 낡은 욕조와 고장 난 샤워기 앞에서 실패의 상처를 씻어내고, 다시 무대에 오를 용기를 찾는 과정을 그린다.

시선을 사로잡는 대형 오브제로 브랜드 정체성을 알리는 브랜드도 여럿이다. 스트리트웨어 편집숍 카시나는 최근 성수 매장을 리뉴얼했다. 브랜드 출발점인 스케이트보드에서 영감받은 조형 오브제를 배치했고 1층 천장에는 태양을 연상케 하는 조형물을 걸어놨다. 오브제 위에 신발 제품을 진열해 자연스럽게 시선이 가도록 꾸몄다.

경험 자체를 판매하는 매장도 많다. 예를 들어 삿포로가 일본에 이어 전 세계 두 번째로 성수에 선보인 ‘삿포로 프리미엄 비어스탠드’는 직원이 맥주를 따르는 퍼포먼스 그 자체를 즐기기 위해 방문하는 이가 많다. 맥주 거품이 몇 번이고 흘러넘칠 때까지 따라 완벽한 거품을 만드는 ‘퍼펙트푸어’, 단 한 번에 맥주 한 잔을 완전히 따라내는 ‘클래식푸어’ 등이다. 맥주를 따르고 잔을 씻는 소리와 거품이 올라오는 움직임 등 미세한 감각이 고객 체험으로 설계되는 식이다.

과거 여러 팝업에서도 다양한 체험을 앞세운 바 있다. 운하 모양 공간에 실제 물을 채워넣고 병뚜껑 모양 배를 띄워 노를 저어 나가는 식으로 입장하는 선양소주 팝업, 7080년대 레트로한 음악으로 공간을 가득 채웠던 멕시칸치킨 팝업 등이 대표적이다.

‘휠&로드’를 콘셉트로 올해 리뉴얼한 ‘카시나 성수점’ (윤관식 기자)
3. 구매보다 ‘체류’하게 하라

카페·정원·휴식에 진심인 성수

성수동에 입점한 브랜드 주목적은 판매가 아니라 ‘홍보’다. 이익을 좇으려했다면 납득할 수 없는 설계가 워낙 많다. 평당 가격이 수억원에 육박하는 값비싼 땅에 객단가가 낮은 초대형 카페를 들여놓는다거나 정원을 조성해놓은 매장이 많다. 골조만 남기고 지상층을 통째로 비워놓은 탬버린즈 플래그십 스토어, 내부 천장을 아예 걷어내 층고를 높인 쿠어 플래그십 스토어가 그 단면을 잘 보여준다. 구매가 아니라 고객이 편안히 ‘체류’하게 만드는 것이 관건이다.

아모레 성수는 건물 한가운데 ‘성수 가든’이라는 실내 정원을 배치해 차가운 콘크리트 골조 속에 휴식 공간을 집어넣었다. 조경 전문 스튜디오 ‘베케’가 제주 원시림을 옮겨온 도심 속 숲이라는 콘셉트로 만들었다. 건물 3면에 유리창을 달아 매장 어디에서든 앉아서 정원을 감상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아모레퍼시픽이 강조해온 ‘자연과 시간의 아름다움’을 공간적으로 구현했다.

정원을 들여놓은 매장은 많다. 2013년 문을 연 성수 터줏대감 ‘카페 어니언’도 매장 내부에 시민 모두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개방형 정원과 테이블 다수를 마련해놨다. 이솝 성수 매장도 내부에 작은 정원을 마련, 자연 요소를 공간 안으로 들였다. 국내 조경 디자이너와 협업을 통해 토종 식물과 식용 식물을 배치해놨다.

체류 시간을 늘리기 위한 또 다른 키워드는 카페와 라운지다. 대다수 브랜드가 카페와 협업해 운영하거나 아니면 아예 카페형 매장을 세운다. 1층을 라운지로 운영하거나 전시·영상 공간으로 꾸미는 매장도 많다.

예를 들어 LCDC나 올리브영N 성수 같은 대형 매장은 매대로 가득 채우는 대신 카페와 벤치, 포토존 등 휴식 공간에 많은 면적을 할애한다.

일본 브랜드 ‘휴먼메이드’가 지난해 성수에 연 플래그십스토어도 비슷하다. 단순 의류 매장이 아니라 카페+갤러리+스토어로 이뤄진 복합 문화 공간으로 설계했다. 1층은 글로벌 커피 브랜드 블루보틀과 협업한 카페존을 운영하고 2층은 의류와 소품이 진열된 전시형 쇼룸을 운영한다. 올해 10월 아디다스가 카페·디저트 브랜드 도레도레와 손잡고 개장한 ‘아디다스 카페 3 STRIPES 서울’도 마찬가지다. 카페에는 아디다스 특유 ‘3선’에서 영감을 받은 베이커리와 음료를 팔고, 마당과 매장 한편에 마련한 스토어에선 캠페인 룩을 홍보하고 판매하는 구조다.

매장 내 시민 개방 공원을 만들어놓은 ‘카페 어니언’ (윤관식 기자)
4. 공간 한계를 넘어서라

빌딩이 광고판, 의류숍이 팝업으로

요즘 성수를 거닐다보면 공간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지기 십상이다. 건물은 반드시 쇼핑이나 사무 공간일 필요가 없다. 초대형 옥외광고가 걸린 순수 광고판으로 기능하는 건물도 다수다. 매장 역시 하루도 같은 얼굴로 머물지 않는다. 하루는 카페였다가 하루는 팝업스토어가 됐다가 또 하루는 패션 빈티지숍이 되기도 한다.

성수동은 ‘빌딩 외벽이 곧 미디어’다. 대형 브랜드는 하루 수천만원에 달하는 광고비를 건물주에게 지불하고 건물 전체를 자사 광고로 래핑한다. 강남 일대가 LED 전광판을 중심으로 한 디지털 옥외광고 시장이라면, 성수는 대형 현수막을 내건다. 건물마다 생김새와 재질, 크기가 달라 맞춤형 재단이 필요하다. 덕분에 엇비슷한 광고는 찾아볼 수 없다.

빌딩에서 근무하는 임직원 불만이 생길 수 있지만 돈으로 해결 가능하다. 건물주가 입주사 관리비를 면제해주는 조건으로 외벽을 내주는 식이다. 심지어 일부 기업에서는 “불법 옥외광고 과태료를 물더라도 한다. 과태료까지 광고비로 계산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매장 형태도 고정돼 있지 않다. 성수에서는 같은 공간이 하루, 혹은 일주일 단위로 용도가 바뀐다. 팝업스토어가 워낙 일상화된 데다 그 임대료가 하루 수천만원씩 할 정도로 뛰었다. 카페나 편집숍으로 운영하는 것보다는 팝업스토어로 임대나 전전대를 놓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

유연한 공간 운영은 성수동 기본 전략이 됐다. 대표 사례가 마켓인유가 운영하는 무인 빈티지숍이다. 매장은 큰 인테리어 없이 옷으로만 가득 차 있다. 팝업 문의가 들어올 경우 의류와 행거만 빼내면 곧장 전시장 공간으로 바뀐다. 카페 센느 2층 역시 때마다 독립 브랜드 팝업으로 변신한다.

성수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백영선 플라잉웨일 대표는 “성수에 유독 패션 빈티지숍이 많은 이유가 있다. 공간을 내주기 편리한 아이템이기 때문”이라며 “옷을 거는 행거 구조와 이동식 가구는 ‘우리 가게는 쉽게 바꿀 수 있는 무대다. 언제든 팝업 문의를 달라’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아예 플랫폼처럼 운영되는 매장도 많다. 무신사 스탠다드 성수점은 1층을 ‘갤러리존’으로 꾸며 매달 테마를 바꾼다. 신제품 출시나 협업 프로젝트, 팝업 전시 등이 번갈아 열린다. 올리브영N 성수 역시 팝업스토어 공간과 입구를 별도 마련, 주기적으로 브랜드를 유치한다. 최근에는 성수동 한편 15m 길이 벽돌담 한쪽만 빌려 팝업을 운영한 ‘어노브’ 같은 사례가 등장하기도 했다.

성수에는 독특한 외관으로 시선을 사로 잡는 건물도 많다. 사진 왼쪽부터 아이아이컴바인드 신사옥 ‘하우스노웨어 성수’, 젠틀몬스터 포켓팝업 성수점, EQL 성수점. (윤관식 기자)
성수 2.0 시대, 전망은

소비 아닌 ‘공존’의 공간으로

전문가들은 성수동이 오프라인 리테일 부활을 이끌었다고 평가한다. 단순한 소비 공간이 아닌, 브랜드와 소비자가 교감하고 체험하는 공간으로 기능하면서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부상했다는 설명이다. 이종우 아주대 경영학과 교수는 “오프라인 유통 전반이 고전하는 가운데, 성수는 앞으로 브랜드가 소비자에게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할지 보여주는 모범 사례”라고 설명했다.

성수동 인기는 여타 서울 도심 기존 상권 변화도 이끌고 있다. 을지로·망원·한남·서촌 등은 성수의 성공 방정식을 고스란히 적용 중인 상권이다. 대신 저마다 독특한 서사를 통해 차별화를 꽤한다. 전다현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은 “과거에는 어떤 지역이 ‘뜬다’는 입지적 요소가 중요했다면, 지금은 브랜드의 감성과 잘 어울리는 ‘동네의 분위기’가 핵심”이라며 “브랜드마다 정체성과 철학이 다른 만큼, 이를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의 ‘맥락 읽기’가 중요해졌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성수 실험이 일회성 성공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진정성을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각 브랜드가 롱런하기 위해 성수동이라는 공간 본질을 소비가 아닌 ‘공존’으로 정의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성수동 인기가 오래 유지되기 위해선 기업이 동네를 존중하며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는 파트너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공간 일부를 지역 공방과 공유하거나, 로컬 창작자와 협업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운영하는 등 성수의 매력을 함께 지켜야 한다.” 전다현 연구위원의 제안이다.

[나건웅 기자 na.kunwoong@mk.co.kr, 조동현 기자 cho.donghyu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33호 (2025.11.05~11.1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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