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과감한 아베노믹스’의 딜레마 [스페셜리포트]
‘더 과감한 아베노믹스’의 딜레마
금융 완화 vs 적극 재정 충돌
사나에노믹스의 청사진은 ‘더욱 대담하고 강력해진 아베노믹스’로 요약된다. 10년 전 아베노믹스가 풀어야 했던 숙제는 ‘디플레이션’이라는 명확한 적이었다. 하지만 사나에노믹스가 마주한 전장은 안갯속이다. 인플레이션, 국가부채, 저성장이라는 여러 적과 동시에 싸워야 하는 훨씬 더 복잡한 국면이다.
핵심 정책은 두 개의 축으로 움직인다. 첫째는 일본은행(BOJ)의 초저금리 기조를 유지하며 엔저 환경을 용인하는 ‘금융 완화’다. 둘째는 방위비 증액과 성장 산업 투자를 중심으로 한 ‘적극 재정’이다. 문제는 이 두 개의 축이 서로 충돌하며 딜레마를 만들어낸다. 금융 완화를 지속하자니 엔저가 심화하며 수입 물가를 자극해 가뜩이나 신음하는 가계의 실질소득을 갉아먹는다.
일본 총무성에 따르면, 소비자물가지수(신선식품 제외)는 이미 2년 넘게 BOJ의 목표치인 2%를 웃돈다. 이로 인해 실질임금은 20개월 이상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 중이다. 이는 일본 GDP의 60%를 차지하는 개인 소비를 얼어붙게 만드는 치명적인 요인이다.
그렇다고 금리를 올리자니, GDP의 260%를 넘어선 국가부채(약 1280조엔)의 이자 부담이 재정을 파탄 낼 수 있다는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 금리가 단 1%만 올라도 연간 이자 부담은 10조엔 이상 불어난다. 윤경훈 류쓰케이자이대 교수는 이런 상황을 두고 “초저금리가 국채 시장 기능을 약화시키고, 금리 상승에 취약한 재정 구조를 고착화시킨다”고 지적했다. 그는 “저금리가 장기화하면 경쟁력 낮은 기업들이 시장에 잔존하며 경제의 생산성 향상을 저해하는 부작용, 즉 ‘좀비기업화(zombification)’로 이어질 수 있다”며 정책의 구조적 한계를 경고했다.
사나에노믹스의 또 다른 축인 ‘적극 재정’ 역시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있다. GDP의 2%까지 방위비를 증액하고, 저출생 대책과 성장 동력 확보를 위해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겠다는 구상이지만, 재원 마련 방안이 불투명하다.
이지평 한국외대 특임교수는 “아베노믹스보다 더 강력한 확장 재정을 예고했지만 이미 재정도 할 만큼 한 상황”이라며 “인플레이션으로 명목 세수는 다소 늘었지만, 임금 상승보다 물가 상승이 더 빨라 국민들의 세 부담 불만이 커진 상황이라 증세 카드를 꺼내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이런 재정 제약 속에서 다카이치 내각이 꺼내든 카드가 ‘경제 안보’다. 이는 단순히 방위력 강화에 그치지 않고, 반도체·배터리 등 핵심 전략 산업의 공급망을 자국 중심으로 재편해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삼겠다는 구상이다. 일본 정부는 이미 대만 TSMC의 구마모토 공장에 1조엔이 넘는 보조금을 지급했다. 또한 차세대 반도체 국산화를 목표로 설립된 ‘라피더스’에도 1조엔 규모의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것이 일본 경제 전체의 체질을 바꿀 게임 체인저가 될지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김유영 동덕여대 일어일본학과 교수는 “ ‘라인야후 사태’에서 보듯, 일본은 동맹국인 한국에 대해서조차 핵심 공급망에서 새로운 의존 관계를 만드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며 “첨단 산업 분야에서 양국은 협력 파트너 이전에 치열한 경쟁 상대”라고 현실을 짚었다. 막대한 재정이 투입되는 이런 국가 주도 프로젝트가 과거 ‘히노마루 반도체’의 실패를 되풀이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과거 1980년대 세계 D램 시장을 석권했던 일본은 정부 주도하에 NEC, 히타치, 미쓰비시 등 5개 기업이 참여하는 ‘초LSI기술연구조합’을 결성하며 ‘히노마루(일장기) 반도체’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하지만 기업 간 주도권 다툼과 중복 투자로 비효율이 심해 한국과 대만에 추월당하는 실패로 끝났다. 라피더스를 둘러싼 지금의 장밋빛 전망이 과거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정책 기대감’ 업은 랠리…버블 공포도
사나에노믹스의 복잡한 딜레마에도 불구하고, 금융 시장은 일단 환호하는 분위기다. 닛케이225지수는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며 5만엔 선을 돌파했다. 이런 강세장의 배경에는 정책에 대한 기대감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두 가지 믿음에 기반한다.
첫째, 금융 완화 기조로 엔저 현상이 장기화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는 수출 기업의 가격 경쟁력과 환차익을 극대화해 실적 개선으로 이어진다. 둘째, 대규모 재정지출이 방위 산업, 반도체 장비, 인프라 관련 기업에 직접적인 수혜를 줄 것이라는 계산이다.
노무라증권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다카이치 내각의 정책은 외국인 투자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엔저’와 ‘재정 확대’라는 두 가지 키워드를 명확히 제시했다”며 “이는 단기적으로 일본 증시에 대한 투자 매력을 높이는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엔화 약세를 등에 업은 자동차, 정밀기계, 전기전자 등 수출주와 방위비 증액의 수혜가 예상되는 미쓰비시중공업 등 방산 관련주를 유망 업종으로 꼽았다. 다이와증권 역시 “정부의 강력한 투자 촉진 정책이 기업 설비투자 심리를 개선시키고, 이는 관련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 주가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외국인 투자자 자금 유입도 증시 활황의 주요 동력이다. 제로금리에 가까운 엔화를 빌려 고금리 해외자산에 투자하는 ‘엔 캐리 트레이드’가 재점화하며 글로벌 유동성이 일본 시장으로 몰려들고 있다.
낙관론 이면에 불안감도 공존한다. 시장의 기대가 너무 한쪽으로 쏠려 있다는 점이 큰 리스크다. 만약 예상과 달리 BOJ가 엔저 방어를 위해 금리 인상 카드를 꺼내거나, 재정 확대 법안이 의회에서 발목을 잡힐 경우 정책 기대감은 순식간에 실망감으로 바뀔 수 있다.
미즈호연구소는 “현재 주가 상승은 미래의 정책 효과를 선반영한 측면이 강하다”며 “실질적인 기업 실적 개선이나 임금 상승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현재의 랠리는 언제든 꺼질 수 있는 거품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협쟁(協爭)’ 전략이 대안
정치권의 관심은 온건파였던 이시바 시게루 전 총리 시절 순항하던 한일 관계가 다카이치 내각에서도 이어질 수 있을지에 쏠린다. 그의 극우 성향을 고려할 때, 역사 갈등이 다시 한 번 한일 관계의 뇌관으로 떠오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다만 전문가들은 다카이치 총리가 당장은 극단적인 우경화 행보에 나서기 어렵다고 관측한다. 김경주 교수는 “미국 무역 압박 속 중국까지 견제하려면 한국과 보조를 맞춰야 하는 상황”이라며 외교 무대에서는 ‘실용 노선’을 택할 것으로 진단했다.
문제는 경제다.
사나에노믹스의 두 축인 ‘확장 재정’과 ‘엔저 유지’는 한국 경제에 직접적인 위협 요인이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달러 대비 엔화 가치가 1%포인트 하락하면 한국 상품의 수출 가격은 0.41%포인트, 수출 물량은 0.2%포인트씩 감소한다. 수출 경합도가 69.2에 달하는 상황에서 엔저는 곧바로 우리 기업의 채산성 악화로 이어진다.
이에 대응해 원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내리는 것은 ‘최악의 수’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경고다. 김유영 교수는 “원화 절하로 맞대응하는 것은 자멸 정책”이라며 “일본처럼 물가는 오르는데 실질소득이 줄어드는 ‘스크루플레이션(Screwflation)’이 재현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제로섬 게임의 한계를 넘기 위한 전략으로 ‘협쟁(Co-opetition)’이 대두된다. 협쟁은 경쟁(Competition)과 협력(Cooperation)을 결합한 개념으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동시에 상호 이익이 되는 영역에서는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전략적 접근법이다.
[박수호 기자 park.suho@mk.co.kr, 정다운 기자 jeong.dawoo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33호 (2025.11.05~11.1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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