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든 ‘유리한 세계’ 창조하는 ‘언어농단’ [신율의 정치 읽기]

2025. 11. 8.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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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30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서 열린 종합감사에서 최민희 위원장이 박정훈 국민의힘 의원의 사퇴 요구 발언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정치는 언어를 매개로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행위다. 이론적으로 언어의 첫 번째 기능은, 마치 거울과 같이 사물의 정확한 모습을 반영한다. 그런데 거울과 언어의 차이가 있다. 언어는 상상을 유발하여 감정을 자극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지만, 거울은 그렇지 않다. 언어가 이런 능력을 가지는 이유는, 화자(話者)가 단순한 사물이나 상황을 묘사할 때 주관적 관점을 이입, 듣는 이가 특정 사물이나 상황을 파악하는 데 영향을 미쳐서다. 이런 ‘기능’을 통해 언어는 상황에 따라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도 있다. 이런 현상이 가장 두드러지는 분야가 정치다.

이재명 대통령의 첫 번째 한미 정상회담은 2025년 8월 26일(우리 시간)이었다. 대통령실 대변인은 “공동 합의문이 굳이 필요 없을 정도로 기분 좋게 이야기가 잘된 회담이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회담 직후 필자를 비롯한 많은 국민들은 이번 회담이 정말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9월 3일 진행되고 18일 보도된 이재명 대통령의 타임지 인터뷰 내용은, 대통령실의 이런 언급과는 완전히 달랐다.

해당 인터뷰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미국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였다면 탄핵당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미국 요구가 지나치다는 얘기다. 한미 정상회담이 있었던 8월 26일과 타임지 인터뷰가 있었던 9월 3일 사이에 분위기가 급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주일 사이에 말이 너무나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이런 언급을 하는 이유는, 최근 APEC 이후 미국과의 관세 협상이 타결됐다며 결과가 매우 흡족하다는 평가가 줄을 잇고 있어서다.

필자가 볼 때 평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이 SNS에 밝힌 내용부터 살펴보자.

러트닉 장관은 30일 SNS에 “한국이 시장을 100% 개방하기로 합의했다”고 언급했다. 물론 이 ‘시장 개방’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국내에서는 이 시장 개방이 농산물 개방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나온다. 해석의 진위 여부를 떠나 중요한 것은, 우리 정부 입장과 미국이 주장하는 내용이 다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반도체 부문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정부는 우리의 주요 경쟁국인 대만에 비해 불리하지 않은 수준의 관세를 적용받기로 했다고 밝혔는데, 러트닉 장관은 “반도체는 이번 합의의 일부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러트닉 장관의 발언만 놓고 보면, 반도체 관세는 다시 협상을 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상황이 이러니 우리는 안심할 수 없다. ‘선방’했다고 자평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외교적 성과라고 평가할 수 없는 이유는 또 있다. 미국과 일본은 지난 9월 4일 합의 내용을 문서화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10월 28일 미·일 정상회담 직후 “두 정상은 이 위대한 협정을 이행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재확인했다”고 강조하는 내용의 합의문에 양국 정상이 서명했다.

일본과 미국의 경우, 관세 협정과 관련해 두 번에 걸쳐 문서화 작업이 이뤄졌다. 한국 정부에 의하면, 조만간 미국과의 MOU와 조인트 팩트시트를 발표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문서화라는 것인데, 이는 일본이 미국과 발표한 합의문 형식의 공동 성명보다는 구속력이 현저히 약하다. 이런 상황이라 우리는 또다시 ‘8월의 경험’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현재 미국과 우리나라가 벌이는 협상 과정을 보면, 언어에 의한 ‘새로운 세계의 창조’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 미국은 미국대로 자신에게 ‘유리한 세계’를 창조하려 한다. 또한 우리 정부는 우리 정부대로 우리의 입장에서 ‘유리한 세계’를 창조하려 한다. 문서화가 필요한 이유도 언어의 이런 기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정치판에서는 언어의 ‘창조 능력’을 이용해 자신들의 잘못을 덮고 오히려 상대를 공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지난번 사임한 국토부 차관의 부동산 관련 발언, 그리고 부동산 정책 관련 정부 부서 수장들의 부동산 매입 과정을 두고 논란이 일자, 갑자기 국회의원들의 부동산 현황을 전부 공개하자고 민주당이 주장한 것을 봐도 그렇다.

해당 논란의 핵심은, 일부 장관들은 대출과 갭투자 등을 통해 집을 마련했지만, 국민들에게는 이런 방식으로 집 살 생각을 하지 말라는, 일종의 ‘내로남불’이었다. 핵심이 이러한데도, 국회의원들의 부동산 현황을 공개하자고 주장하고 있으니, 이들을 황당하게 만든다. 핵심을 모르고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알고도 논점을 흐리기 위해 그러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다.

이뿐 아니다. 과방위원장의 자녀 결혼식으로 논란이 일자, 민주당 측에서는 “전체 국회의원 중 최 의원처럼 (축의금을 반환한) 의원이 있다는 말을 지금껏 들어보지 못했다”며 성경 구절을 인용해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라고 말했다. 여기서 해당 의원이 잘못했는지, 아니면 억울하게 당한 것인지를 판단하려는 것은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점은, 설령 해당 의원 잘못이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이를 두고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특히 정치인이라면 그렇다. 정치인이라면 ‘죄’를 만들지 말아야지, 너희도 똑같은데 무슨 소리냐는 식의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이런 식의 발언을 하기 이전에 ‘잘못’이 있는지에 대한 여부부터 따져보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식의 발언은 사안의 해결이나 당사자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하고, 오히려 논란을 키우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다른 민주당 의원은 같은 기간 역시 자녀를 결혼시킨 국민의힘 의원의 문제를 들고나왔다. 이 역시 ‘너희도 똑같은데 왜 남 말하냐’는 식이었다. 이렇듯 자꾸 남 탓을 하거나, ‘너희도 똑같다’라는 식으로 방어하려 든다면, 국민들은 해당 사안을 더욱 부정적으로 볼 확률이 높아진다. 그럼에도 이런 시도를 하는 것은, 현재의 상황을 ‘다른 상황’으로 만들어 어떻게든 자신들에게 불리하지 않은 ‘세계’를 만들려 하기 때문이다. 여당이 추진하려다가 백지화 혹은 보류된 이재명 대통령에 대한 ‘재판 중지법’을 ‘국정 안정법’이라고 부르는 것도, 언어의 ‘새로운 세계의 창조’라고 볼 수 있다.

유퍼미즘(euphemism)이라는 용어가 있다. 이 용어는 불쾌하거나 공격적으로 들릴 수 있는 표현을 더 기분 좋고 덜 불쾌하게 들리는 표현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치는 단순한 완곡어법을 넘어, 자신들에게 ‘유리한 세계’를 ‘창조’하는 데 전력을 다한다. 우리 국민의 민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래서 이들 정치인들의 의도대로 국민을 이끌 수는 없다. 국민은 정치의 속내를 아는데, 정치인들은 국민 생각을 모르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사람은 자기 수준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사물을 바라본다고 하더라도, 이건 도를 넘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34호 (2025.11.12~11.18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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