뭇 남성 잠자리로 투자금 따낸 코코 샤넬 [강영운의 ‘야! 한 생각, 아! 한 생각’]

2025. 11. 8.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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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가난뱅이에서 명품 아이콘으로

여자가 몸가짐이 발라야 한다는 말을, 그는 극도로 혐오했다. 먹을거리가 없고, 입을 옷이 없는데, 대관절 요조숙녀나 조신함이 다 무슨 소용인가. 후줄근한 옷을 입고 푸석푸석한 빵으로 요기해야 하는 삶을 당장이라도 내던져버리고 싶었다. 이를 벗어나게 해줄 남자라면, 몸뚱아리 하나쯤은 언제든 내어줄 수 있었다. 가난한 성녀보다는, 배부른 창녀가 되겠다고 그녀는 하루하루 곱씹었다.

얼굴에 윤이 나고, 옷맵시에 태가 나는 남자를 보면, 언제나 팔짱부터 끼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임자가 있는 건 사소한 문제였다. 중요한 건 남자가 얼마나 많은 돈과 권력이 있는지였으니까.

뭇 남성들의 권력을 구름판으로 삼아 그녀는 세계적인 기업을 일궜다. 여자의 이름은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 우리에게 코코 샤넬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세계적 패션 제국을 건설한 그녀의 삶은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손사랫짓으로 맥진한 것이었다.

일러스트 : 강유나
가난한 성녀보다 배부른 창녀 꿈꿔

카바레서 군인에게 노래 부르며 인기

1883년 출생 직후부터 샤넬은 가난의 속싸개에 싸여 살았다. 샤넬 어머니는 세탁부였고, 아버지는 동네를 떠돌며 속옷과 작업복을 파는 행상인이었다. 남의 옷을 깨끗하게 해주거나, 새 옷을 건네주는 게 부모의 일이었지만, 샤넬의 옷은 언제나 낡고 더러웠다.

그 시절 남자들이 그러했듯이, 아버지는 가난에 개의치 않고 생식에 열심이어서 자식을 여섯이나 봤다. 어린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입힐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핏덩이 같은 새끼들을 고아원에 버려버렸다. 코코 샤넬은 프랑스 중부 오바진이라는 지역의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고아원에서 그에게 처음 주어진 건 실과 바늘이었다. 수녀원이 고아인 여자아이들이 먹고살 수 있도록 ‘생계형 기술’을 가르친 것이었다. 코코 샤넬은 돈이 없었고, 자기만의 방도 없었지만, 자기만을 위한 옷이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배운 것이 재봉질뿐이어서, 그녀는 재봉사로 일했다. 옷을 짜는 일만으로는 가난을 벗어날 수 없었으므로, 일이 끝난 뒤에는 카바레로 나갔다. 작고 귀여운 소녀가 부르는 노래에 피가 끓는 군인들은 환호했다. 그녀가 부르는 ‘누가 코코를 봤을까’라는 노래를 들으려는 군인들로 카바레는 복대겼다.

그때부터 그녀는 ‘코코 샤넬’로 불렸다. 코코는 유부남의 애인인 ‘정부’를 의미하는 코코트(cocote)에서 따온 것이었는데, 마치 그녀의 삶을 예견하는 메시지 같았다.

코코 샤넬에 열광한 파리지앵

느슨하고 넉넉한 옷으로 여심 저격

코코는 곧 에티엔 발상이라는 기병 장교의 애인이 됐다. 돈이 많고 무엇보다 잘생긴 사내였다.

코코는 발상이라는 끈을 꽉 잡았고, 그 끈은 파리로 코코를 이끌었다. 코코는 자기가 만든 옷을 입고 다닐 파리지앵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벅찼다.

새 공간에선, 새 사랑이 담기기 마련이다. 코코는 한 남자와 다시 사랑에 빠졌다. 발상의 친구이자, 폴로 선수였던 에드워드 카펠이었다. 영국 귀족이자 신사의 전형인 남자였다. 가난뱅이 촌뜨기였던 코코가 꿈에 그리던 인물이었다.

카펠은 의상 가게를 열고 싶어 한 코코에게 사업 밑천을 댔고, 코코는 뜨겁게 카펠을 안았다. 천애고아 코코는 1910년 처음으로 모자 부티크를 열었다. 손재주와 남다른 감각에 파리지앵들은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1년 후, 코코는 카펠에게 빌린 돈을 모두 되갚았다. 코코 샤넬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샤넬은 시대에 빚진 것이 없어서, 관념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 덕분에 그녀의 옷은 새롭고 실용적이었다. 폴로 선수였던 카펠의 의상에서 영감을 얻어 기존 제품과는 다르게 품이 넉넉한 여성 의류를 만들어 팔았다. 꽉 조이는 코르셋, 치렁치렁한 드레스의 성가심에 질려 있던 여성들은 환호했다. 느슨한 옷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코코 샤넬을 통해 알게 됐다. 샤넬은 치마를 입지 않았고 대놓고 바지를 입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➊ 카바레 가수에서 전 세계 명품 아이콘으로 거듭난 코코 샤넬. ➋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과 기념 촬영을 한 코코 샤넬.
권력의 중심 어디인지 기막히게 포착

독일 장교와 몸 섞으며 ‘나치 찬양’

뮤즈는 온전히 소유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코코 샤넬은 1918년 저리게 깨달았다. 그해 카펠이 귀족 여성과 결혼을 발표했기 때문이었다. 카펠은 이듬해 더 먼 세계로 떠나버렸는데, 교통사고로 죽어서였다. 샤넬은 “카펠을 잃은 뒤로, 내 삶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행복하지는 않았을지언정,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운 삶이었다. 사업은 번창해갔고, 자산은 늘어났으며, 그녀를 도와주겠다는 귀족 남자들도 줄을 섰다. 영국에서 가장 높은 귀족인 웨스트민스터의 공작 휴 그로스베너, 영국 왕세자 에드워드 8세도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1930년 샤넬은 4000명을 고용한 왕국의 여왕이었는데, ‘샤넬’이라는 옷이 조금씩 해지기 시작하던 것도 이 시기였다. 할리우드에서 도전한 영화 의상도 혹평 일색이었고, 유럽에서는 이탈리아 디자이너 엘자 스키아파렐리가 신성으로 빛을 앗아갔다. 코코가 좌절했을 때, 그녀를 깨우는 대포 소리가 울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당시 그녀의 마음속에는 나치를 향한 존경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몸을 섞으면, 생각도 함께 섞이기 마련이어서, 그는 유력자들의 사고방식을 고스란히 옮겨 담았는데, “유대인이 세계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나치가 달가웠다. 코코 샤넬은 “지금은 패션의 시대가 아니다”라며 사업을 접고, 주거지를 파리 중심부 리츠 호텔로 옮겼다. 파리를 점령한 나치 장교들이 묵는 숙소였다. 한스 권터라는 독일군 장교와 사랑을 나눴다. 권력의 중심에 있는 남자들과의 잠자리는 그녀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코코 샤넬은 나치 정보국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패전을 앞둔 독일을 위해 영국 수상 처칠을 만나려고 했을 정도로.

세상이 누구의 것인지를 파악하는 능력은 천부적이어서, 프랑스가 나치에 해방되기 직전에 샤넬은 스위스로 떠나버렸다. 5년 동안 이어진 과거사 청산의 시간도 샤넬은 아슬아슬 줄타기로 피해갔다. 프랑스, 영국, 독일에 만들어놓은 끈이었다. 그중 하나가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이었다.

그녀가 다시 자신의 패션하우스를 연 건 1954년. 그녀의 나이 70이 다 돼서였다. 시대의 아이콘은 모두 샤넬을 몸에 걸쳤다. 케네디의 아내 재키는 핑크색 드레스로, 섹스 심볼 마릴린 먼로는 향수로, 샤넬을 안았다.

1971년, 샤넬은 파리 리츠 호텔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영부인 클로드 퐁피두는 패션계의 거장을 위한 추모식을 제안했지만, 정보당국이 ‘나치 협력 보고서’를 들이밀며 만류했다. 가난한 여성으로서 가련했고, 민족 반역자로서 거슬렸으며, 패션인으로 찬란했던, 코코 샤넬 일생이다.

[강영운 매일경제신문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34호 (2025.11.12~11.18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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