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치당한 대기업 CEO, 음모론이 만들어낸 파국
[김건의 기자]
*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고니아>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필모그래피 중에서 처음으로 타인의 영화세계를 빌려온 작품이다.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를 리메이크한 이 영화는 원작의 뜨거움을 차가움으로 치환했다. <지구를 지켜라!>가 세상을 향한 비명과 분노로 들끓었다면 <부고니아>는 제시 플레먼스와 엠마 스톤의 음모론을 향한 블랙코미디적 냉소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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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고니아> 스틸. |
| ⓒ CJ ENM |
영화는 비스타비전 포맷으로 인물들을 조각상처럼 부각시킨다. 테디(제시 플레먼스)가 미셸(엠마 스톤)을 심문할 때 카메라는 테디를 로우 앵글로, 미셸을 하이 앵글로 잡는다. 삭발당하고 넓은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는 스톤의 얼굴은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잔 다르크의 수난>을 떠올리게 한다.
납치당한 대기업 CEO를 순교자처럼 촬영하는 구도 자체가 역설적이다. 이러한 카메라앵글은 영화의 주제를 시각화한다. 테디는 미셸을 납치하여 다짜고짜 외계인이 아니냐고 심문하지만, 그렇다고 미셸이 죄없는 존재는 아니다.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의 임상실험 중 희생자를 만들어냈지만 이를 유야무야 넘어가려고 했던 존재이기도 하다. 둘 중 누가 진짜 외계인이며 현 사회를 위협하는지 영화는 묻는다.
원작의 키치한 미장센은 사라졌다. 테디가 미셸을 가두는 지하실은 더럽고 낡았지만, 카메라는 그 공간을 단순한 지하실로 평면화하지 않는다. 롱테이크와 정적인 프레임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 세계에서 줄곧 느낄 수 있었던 특유의 거리감을 만든다. 원작이 주인공 병규(신하균)의 피해망상 속으로 관객을 끌어당긴 반면, <부고니아>는 관객을 인물들의 상황을 멀리서 관조할 수 있게 스크린 밖으로 밀어낸다. 테디와 미셸을 관찰할 뿐 그들과 함께 호흡하지 않는다.
인물을 관조하는 블랙코미디적 연출은 교차 편집에서도 드러난다. 영화는 두 배우를 같은 프레임에 거의 담지 않는다. 테디의 클로즈업과 미셸의 클로즈업은 동등하게 대비되지 않고 화면의 우측으로 몰아세우거나 그늘진 중앙에 배치한다. 연기는 반응이라는 격언을 무시하는 듯한 편집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배우들은 각자의 프레임 안에서 고립되고 관객은 둘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스스로 사유해야만 한다.
음모론이 만들어내는 파국
테디는 음모론자다. 그는 벌의 군집붕괴현상을 외계인이 지구를 위협하는 증상으로 믿고 이를 부추기는게 제약회사 CEO인 미셸이라고 확신한다. 테디는 확신에 찬 설교자인 동시에 음모론이 야기하는 공포에 불안해하는 패배자이기도 하다. 미국의 푸어 화이트 계층을 대표하는 인물인 테디는 홈트레이닝으로 몸을 단련하면서 확증편향에 갇혀 외부와 단절된 세계를 구축했다. 그에게 음모론은 설명할 수 없는 세계를 설명하는 유일한 언어다.
미셸은 대기업 CEO다. 이 인물은 기업 언어와 수동공격적 화술로 상대방을 혼란스럽게 한다. 다양성을 위한 홍보영상을 찍고 직원들을 가족이라 부르지만 자기 위선에 불과한 언어다. 테디에게 납치당해 삭발됐음에도 미셸은 생존자의 계산을 멈추지 않는다. 테디가 미셸을 납치했음에도 영화는 납치극의 권력 관계를 전복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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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고니아> 스틸. |
| ⓒ CJ ENM |
영화의 마지막은 허무주의로 점철된다. 테디의 망상이 어떤 의미에서 옳았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주지만 그 옳음은 그의 바람대로 지구를 구원하지 못한다. 세상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이고, 이런 상황에 외계인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킬링 디어>에서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까지 이르러 인간의 악의와 무력함을 용서 없이 응시해 왔다. <부고니아>도 예외는 아니다. 원작의 엔딩이 감정적 폭발로 마무리됐지만 영화는 인간을 향한 분노를 아주 차갑게 묘사한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나름 성공적인 리메이크처럼 느껴진다. 원작의 핵심을 유지하면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특유의 미학으로 완전히 재구성했다. 서사는 단순화시키고 등장인물 또한 줄여나가며 이야기의 밀도를 높이는 선택을 했다. 물론 아쉬움도 있다. 원작 <지구를 지켜라!>에서 인물들의 복합적인 인간성, 노동자들의 절박한 비명은 희석됐다. 인물과의 거리두기를 선택한 영화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 리메이크는 그 시기가 적절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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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고니아> 스틸. |
| ⓒ CJ ENM |
'부고니아'는 고대 지중해에서 소의 시체에서 꿀벌이 생겨난다고 믿었던 의식을 뜻하는 그리스어다. 정육면체 집에 소의 사체를 넣고 기다리면 벌이 태어난다는 잘못된 믿음이다. 테디의 음모론은 부고니아와 일맥상통한다. 그의 믿음은 틀렸지만, 믿음을 통해 태어난 광기는 실재하는 결과를 낳는다. 납치, 폭력, 죽음. 잘못된 믿음이 파괴를 만든다. 이러한 역설이 <부고니아>를 2020년대의 사회를 고스란히 반영한 영화로 만든다.
우리는 가짜뉴스와 음모론이 실재하는 폭력을 낳는 시대를 산다. 잘못된 믿음은 더 이상 무해한 미신이 아니다. 영화는 현실을 블랙코미디라는 거울로 비췄지만 문제를 향한 대안은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극단적인 방식으로 인간을 향한 냉소를 지으며 차갑게 질문할 뿐이다. 그 질문의 답이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작은 희망일지, 다른 광기일지는 관객들이 선택해야 할 몫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SNS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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