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로 전재산 500만원 날린 19살, '청년 잔혹사'의 결말은?
[김상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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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명의 은인> 스틸 |
| ⓒ ㈜영화특별시SMC |
세상에 나가서 적응하기 힘들다 보니 '캥거루족', '니트족' 같은 신조어가 어느새 사회 보편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의지할 부모와 가족이 있다면, 굳이 사회로 진출해 격심한 경쟁에 내몰리지 않고 적당히 버티는 게 낫다는 태도다. 기성세대는 혀를 끌끌 차지만, 청년세대는 활용할 수 있는 패를 최대한 써먹는 지혜롭고 가성비 높은 대처라며 항변한다.
이런 세태 속에서 다들 자신이 얼마나, 어떻게 불행하고 힘든지 웅변하듯 설파하기에 바빠졌다. 그런 마음이다 보니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지는 건 필연이다. 자기연민이 커질수록 세상에 눈과 귀를 닫고 자리보전에 힘쓰게 마련이다. 나부터 살고 봐야지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의지할 나무판자 하나 얻지 못한 채 망망대해 표류하는 운명도 우리 곁에 허다하다. 다만 우리가 외면할 따름. 그런 이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건 든든한 국가기구나 독지가의 시혜보단,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이들이 베푸는 공감과 연민일 경우가 더 많다. <생명의 은인>은 그런 깨달음의 여정을 선보이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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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명의 은인> 스틸 |
| ⓒ ㈜영화특별시SMC |
그래도 세정은 늘 다이어리를 놓지 않고 사회진출 준비에 여념이 없다. 어찌 보면 인생 처음 '자기만의 방'이 생기니, 긍정적으로 좋은 방 구하려 발품을 판다. 노력 덕분인지 제법 마음에 드는 방을 찾았다. 방송국 자립준비 청년의 희망 취재도 받았다. 혹시 하는 기대로, 과거 구사일생 구출된 화재 당시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을 찾는 인터뷰 기회도 얻었다.
며칠 후 미용실로 찾아온 중년 여성은 바로 그 은인이라 주장하다 본론을 밝힌다. '은숙'은 폐암 말기라 급히 수술비가 필요하다며 500만 원을 빌려달라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정착지원금을 노린 사기 소문에 신경이 곤두선 세정은 불쑥 나타난 은숙의 황당한 부탁이 당황스럽다. 미심쩍은 자칭 은인을 탐문해 보는데, 아픈 것도 맞고 실제 자신을 구했다는 개연성만 확인될 뿐이다. 그래도 망망대해 표류할 신세에 유일한 안식처를 포기할 순 없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으로 세정은 은숙의 방에 얹혀 지내게 된다. 문제 해결을 위해 힘을 빌리고, 처음 맛보는 보살핌에 마음이 흔들리지만, 상대는 알면 알수록 아리송 투성이다. 믿다 의심하다 오락가락하면서도 동행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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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명의 은인> 스틸 |
| ⓒ ㈜영화특별시SMC |
영화는 자주 사회면에 오르내리는 자립준비 청년의 수난에서 출발한다. 주인공은 자신만의 든든하고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줄 가족의 존재를 구경도 못한 채 '어른'의 세계로 내몰린 처지다. 이를 악물고 능력껏 생존 대비를 했다지만, 치밀하게 궁리한 것 같아도 막상 차가운 세상에 홀로 나오니 고난만 가득하다. 성인이 되었으니 알아서 해결하라며 몇백만 원의 지원금만 쥔 채 나온 자립준비 청년들이 주변의 유혹과 사기, 서툰 경제 관념 등으로 길바닥에 나앉는 사례는 도무지 개선될 기미가 없다. 출발부터 불리한 조건에 처한 그들이 기댈 피난처가 부족하기에 자연스레 위험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세정 역시 그런 전형에 내몰리고 만다.
그녀가 위기에 처한 건 도덕적 해이도, 헤픈 지출 탓도 아니다. 요즘 대학가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심각한 병폐를 끼치는 전세 보증금 사기에서 소재를 얻었을 모종의 사건이 세정에게 청천벽력 마냥 떨어진다. 보육원을 나오면서 동생들에게 보란 듯 잘 살겠다고 다짐했건만, 현실은 당장 한 몸 누일 곳도 없는 처량한 신세다. 어떻게든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 해도, 법과 제도는 막연하기만 하다. 그야말로 눈 뜨고 코 베인 꼴이다.
누군가는 세정을 '헛똑똑이' 노릇한다며 혀를 찾 수도 있다. 하지만 미우나 고우나 기댈 '가족'의 존재를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한 19살 그녀가 스스로 노력해 자립하려는 도전을 지켜본 관객이라면 그런 취급은 지나치게 냉혹한 시선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기껏 단서를 찾아 신고도 하고, 용의자에게 돈을 돌려달라 요청도 해보지만, 적반하장 협박 외엔 답이 없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사적 구제가 위험하단 걸 아는 관객도 주먹이 운다 외칠 지경이다.
벼랑에 몰린 빈궁한 청년 잔혹사를 그린 독립영화가 대개 그들의 극단적 상황을 한층 증폭해 관객에게 심리적 충격을 폭탄처럼 투척하게 마련인데, 본작은 현실의 엄중함을 억지로 완화하진 않으면서도 풍자적 접근을 통해 심적 부담은 덜하면서도 현실의 난국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성과를 이룩한다. '불행 포르노'에 힘겹던 이들에겐 반가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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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명의 은인> 스틸 |
| ⓒ ㈜영화특별시SMC |
세정은 이를 악물고 세상에 동정이나 호의 같은 건 기대하면 안 된다고, 믿을 건 자신뿐이란 생각을 품어왔다. 그래서 사람들의 배려와 온정에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본다. 그게 현명한 처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결국엔 세상의 쓴맛을 제대로 삼킬 팔자다. 아무리 궁리해도 답은 없고 해결책도 나오지 않는다. 수렁에 빠진 채 발버둥을 칠수록 더 깊이 빠지는 것만 같다. 살갑게 대하며 생이별한 엄마처럼 자신을 돌보는 은숙에게도 가시 돋힌 말 던지며 자신의 심정을 이해 못 하냐며 질책한다. 아픈 상처에 소금 뿌리는 것과 다를 게 뭐냐며.
그러나 세상 풍파 다 겪은 은숙의 일갈에 세정은 그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눈치를 보는 게 버릇이 되고만 세정은 자기 목소리를 내는 훈련도 되어 있지 못하다. 소외감이 기본 탑재되다 보니 타인에게 부탁 같은 것도 잘 못한다. 그저 차가운 세상 홀로 버텨야 한다는 본능뿐이다. 그런 세정에게 은숙은 19살 소녀가 온전히 체감하기 힘든 '어른'의 상처와 회한이 존재하며, 누구나 슬픔과 한을 삭이며 살고 있음을 일깨운다. 마치 엄마가 있다면 딸에게 그리 일러줄 것처럼.
"이번엔 네가 나 좀 살려주면 안 되니?"
처음엔 뜬금없는 소리로 들렸지만, 이 황망한 요구는 세정이 어른으로 향하는 건널목에서 이정표가 되어준다. 내 앞가림도 급급한데 남 걱정할 겨를이 없다는 '현실적' 사고의 소유자였던 세정에게 나만 불행한 게 아니란 자기객관화, 각자의 상처를 품은 이들이 섬처럼 고립되지 않고 서로 연결하는 방식을 실전 체험하며 갖춰나간다. 그렇게 영화는 주인공의 성장담이자 세태 풍자극, 유사/대안 가족 형성 관찰기로 복합적인 색채를 구현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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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명의 은인> 스틸 |
| ⓒ ㈜영화특별시SMC |
후반부는 정통파 드라마다. 세정과 은숙의 오해와 비밀, 갈등이 폭발하고 수습하는 과정은 신파와 최루로 범벅되기 안성맞춤이지만, 감독의 연출력은 물론 세정 역의 김푸름, 은숙 역 송선미, 여기에 중반 이후 정체를 드러내는 현식 역 허정도 배우까지 굵직한 경력의 배우들이 찰떡 궁합을 형성하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간다. 인물간 감정선을 극대화하기 위해 후반에 특히 활용되는 정면으로 관객과 마주하는 풀샷 표정 연기는 웬만큼 배우를 믿지 않으면 시도하기 힘들다.
영화 속 주인공과 동 세대인 김푸름 배우는 청소년기부터 갈고 닦은 연기력을 오랜만에 전력으로 가동해 관객의 시선에 각인될 만한 장면들을 숱하게 쏟아낸다. 음악 활동에 집중하며 한동안 보기 힘들었던 섬세한 감정 연기가 세정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바로 저런 얼굴이겠다는 확신을 안긴다. 그런 세정의 대척점에 선 존재와의 대치는 현실을 살아가는 자세의 극단적 대비로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그런 세정을 든든히 떠받치는 '어른'들의 멋은 송선미, 허정도 두 중견배우의 몫이다. 이들이 때로는 진짜 어른 노릇으로, 종종 긴장을 풀어주는 약방 감초 역할로 완급 조절을 절묘하게 수행하기에 가족물로 전환하며 다소 통속적으로 전개되는 이야기 구조를 큰 탈선 없이 정주행하게 돕는다. 한국 독립영화가 던지는 파격적 표현과 실험 도전을 기대한 이들에겐 대중상업영화로 비칠 테지만, 오히려 요즘 더 필요한 건 대중성과 주제의식을 균형 있게 배열한 상업영화의 작가주의 아닐까. <생명의 은인>은 그런 기대와 비전을 보여주는 결과물이다.
<작품정보>
생명의 은인
SAVE
2025 한국 드라마/코미디
2025.11.05. 개봉 113분 12세 관람가
감독 방미리
출연 김푸름, 송선미, 허정도, 이영아
제공/제작 한국예술종합학교, 큐타임필름
배급 ㈜영화특별시SMC
2025 26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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