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의 문화난장] 금관과 나전칠기…외교 언어가 된 K컬처

한국 문화 위상의 관점에서 이번 APEC 정상회의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회의장 안팎에서 K컬처가 국가 이미지를 장식하는 조연이 아니라 메시지를 전달하는 주연으로 등장했다. 문화유산과 콘텐트가 우리의 문화 저력을 입증하는 자랑거리에 그치지 않고 세계 외교 무대에서 ‘언어’ 역할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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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력한 권위, 오랜 교류 역사 등
문화유산 자체가 외교 메시지
K팝은 국제 문화 공용어 위상
백범이 꿈꾼 '문화 국가' 눈앞에
」
![이재명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선물한 천마총 금관 모형. 지도자의 강력한 권위를 상징한다. [연합뉴스]](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1/06/joongang/20251106002347720muhb.jpg)
이를 가장 선명히 보여주는 사례는 지난달 29일 한·미 정상회담에 앞서 이재명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선물한 천마총 금관 모형이다.
천마총 금관의 주인도 강력한 지도자?
순도 83.5% 순금으로 만들어진 천마총 금관은 현존하는 신라 금관 6개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다. 이 금관의 주인은 신라 21대 왕인 소지마립간(재위 479∼500), 혹은 22대 지증왕(재위 500∼514)으로 추정된다. 둘 다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해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발전의 전기를 마련한 지도자다.
선물을 전달하는 자리에서 외교부 의전장은 “천마총 금관은 하늘의 권위와 지상의 통치를 연결하는 신성함, 지도자의 강력한 권위를 상징한다”고 밝혔다. 또 한반도를 최초로 통일한 고대 왕국 신라의 왕관인 만큼 평화와 통합의 시대, 한미동맹 황금기를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신라 금관의 의미는 로이터·뉴욕타임스·타임 등 외신을 타고 전 세계에 전해졌다.
미국의 여론은 트럼프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에 반대하는 ‘노 킹스’ 시위와 연관시켜 금관 선물을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트럼프의 환심을 얻기 위해 세계 각국이 경쟁적으로 ‘아부 외교’를 펼치는 엄중한 현실에서 천마총 금관의 상징성은 ‘강한 지도자’를 추구하는 트럼프에게 영리한 선물이 됐다.
![이재명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선물한 ‘나전칠기 자개원형쟁반’. 한·중 양국의 오랜 교류 역사를 상징한다. [사진 대통령실]](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1/06/joongang/20251106002349042vhnk.jpg)
트럼프의 금관만큼 주목을 받진 못했지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선물한 나전칠기 쟁반에도 메시지가 있다. 영롱한 무지갯빛을 뿜어내는 나전과 검은 광택이 나는 칠기의 성질을 모두 지닌 나전칠기는 한국과 중국 모두의 전통공예로, 오랜 세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시켜왔다. 11년 만에 방한한 시진핑에게 유서 깊은 한중 우호 관계를 상기시키기에 안성맞춤이었다.
APEC 정상회의 환영 만찬 공연에서도 K컬처의 존재감은 컸다.
현대적 수트 차림의 지드래곤이 쓰고 나온 갓 모양 모자는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갓은 드라마 ‘킹덤’ 시리즈와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등을 통해 한국 전통미의 상징이 된 아이템이다. 만찬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케이팝 데몬 헌터스’ OST 수록곡으로 미국과 영국의 빌보드 차트를 평정한 ‘골든’도 바이올린 연주로 울려 퍼졌다. K팝이 국제 문화의 공용어가 되었음을 실감하게 만든 장면이다.
![가수 지드래곤이 지난달 31일 경북 경주시 라한셀렉트호텔에서 열린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만찬에서 갓 모양 모자를 쓰고 나와 공연을 펼치고 있다. [사진 대통령실]](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1/06/joongang/20251106002350402uvdf.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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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꺼 내꺼 없는” 깐부는 동맹의 상징
비공식 석상에서도 K컬처의 이야기는 이어진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치맥 회동’이 ‘깐부 회동’이 된 것은 “깐부끼리는 니꺼 내꺼가 없는 거야”라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대사에서 비롯됐다. 극 중에서 “구슬이나 딱지를 같이 쓰는 친구”로 설명된 깐부는 친구이자 동맹, 신뢰의 상징으로 전 세계 시청자에게 각인돼 있다. 글로벌 기업 리더들이 회동 장소로 국내 치킨 업계 순위 17위에 불과한 ‘깐부치킨’을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메시지였다. 회동 다음 날인 지난달 31일 엔비디아는 글로벌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는 GPU(그래픽처리장치)를 삼성과 현대차에 각 5만장씩 공급하는 등 한국 정부와 기업에 총 26만장을 팔겠다고 발표했다.
백범 김구 선생은 1947년 ‘나의 소원’에서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며 해방 이후 우리나라가 나아갈 길로 군사 강국이나 경제부국이 아닌 문화국가를 제시했다.
이번 APEC에서 보듯 문화는 이제 외교의 분위기 메이커가 아니라 실체의 언어가 됐다. 이는 백범이 소원했던 '문화의 힘'으로, 냉전 시기 공산권 사회에 자유·다양성의 메시지를 전한 미국의 ‘재즈 외교’ 등 세계 역사에서 여러 차례 지켜본 바 있는 그 힘이다.
내년이 탄신 150주년인 백범은 최근 유네스코가 선정하는 ‘2026년 세계 기념 인물’로 결정됐다. 그의 문화국가 비전이 인류가 추구해야 할 보편적 가치로 다시 한번 인정받은 셈인데, 그 타이밍마저 절묘하다.
이지영 문화스포츠부국장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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