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흐르다 멈춘 마을[정명섭의 실록 읽기㉒]
경상북도 영주에 가면 피끝마을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있다. 지금은 승지골로 이름이 바뀐 김달삼모가지잘린골처럼 뭔가 사연이 있는 곳처럼 느껴지고, 실제로 슬프고 잔인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수양대군은 1453년 10월 10일 쿠데타를 일으켜서 고명대신 김종서와 황보인을 죽이고 조카인 단종을 압박해서 권력을 장악한다. 그것도 모자라서 자신의 동생인 안평대군조차 유배를 보냈다가 곧 죽였다.
수양대군은 계유년에 일어나서 계유정난이라고 불린 이 쿠데타의 목적이 왕권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주장했지만 같은 편도 그걸 믿지는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육신의 복위 운동을 빌미삼아 단종에게 강제로 양위를 받았다. 그리고 세조로 즉위한 수양대군은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킨 후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보낸다. 한편, 세조는 자신의 또 다른 동생인 금성 대군 역시 경계했다. 단종과 가깝게 지냈던 금성대군은 계유정난 이후 경기도 광주로 유배를 갔다가 지금의 영주시 순흥면인 순흥부로 옮겨졌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순흥부와 영월은 80리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물론, 차도 없고 도로도 발달되지 않은 시대라 쉽게 오갈수는 없지만 아예 왕래가 불가능한 거리는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금성대군은 단종 복위의 불씨를 다시 살리려고 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하늘이 도와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순흥 부사 역시 세조와 사이가 나쁜 이보흠이었다. 문종 때 사헌부 장령을 지냈던 그는 세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한 경력이 있다. 세조가 즉위하고 3년째인 서기 1457년에 순흥 부사로 오게 된다. 자세한 내막은 알려져있지 않지만 금성대군과의 대화 내용을 보면 안평대군과 가깝게 지낸 탓에 중앙 관직에서 밀려난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인지 이보흠은 자신의 관할 지역으로 유배를 온 금성대군과 자주 만나게 된다. 숨통이 트이게 된 금성대군은 단종을 다시 복위시킬 계획을 세우고 이보흠은 물론 순흥의 사대부들을 끌어들인다. 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에게 다음과 같이 얘기하면서 진지하게 거사 계획을 짠 것으로 보인다.
나와 더불어 오늘 밤에 곧장 영천을 공격하여, 영천에서 호응하지 않으면 군법으로 종사하고, 즉시 안동으로 향하면, 안동은 나의 가동이 모여 사는 곳이므로 2, 3천의 병사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이를 호령하면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는가?
그 밖에 풍기군을 접수하고 군사를 죽령으로 보내서 한양으로 오가는 길을 끊어버릴 계획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아마 영월에 있던 단종을 모셔올 계획도 꾸몄을 것이다. 계획이 너무 허술하다고 느꼈는지 이보흠은 적극적으로 호응하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 계획이 들통나고 만다. 순흥부사 이보흠과 유배 온 금성대군이 한참 계획을 논의하던 6월 27일, 안동의 관노 이동이 금성대군의 역모를 고변한 것이다.
며칠 후에 순흥부사 이보흠까지 고발에 동참하면서 금성대군의 꿈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역모가 쉽게 발각된 점이나 영월에 가까운 순흥에 유배를 보내면서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라 의심스럽다고 판단할 수 있는 이보흠을 순흥부사로 앉혔다는 점을 감안해서 진지하게 음모론을 펼치는 경우도 있다. 눈에 가시 같은 금성대군을 제거하기 위해 세조나 한명회가 일부러 모아놓았다고 보는 것이다. 어쨌든, 조사 과정에서 단종 복위 계획에 가담한 것이 밝혀진 이보흠은 처형당한다. 그리고 그해 11월에 사약을 받은 금성대군 역시 목숨을 잃고 만다. 세조는 자기 조카에 이어 동생들도 죽음으로 몰아 넣어버리는 피도 눈물도 없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죽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계획에는 순흥부사 이보흠뿐 만 아니라 순흥의 사대부들도 상당수 가담했다. 그것을 안 세조는 군사를 보내서 순흥의 백성과 사대부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했다고 한다. 이때 순흥의 청다리 아래에서 죽은 사람들의 피가 죽계천을 따라 10리나 흘러서 멈춘 곳이 바로 영주시 안정면 동촌 1리로 피가 멈췄다고 해서 피끝마을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죽은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세조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순흥도 같이 죽여버렸다. 도호부가 있을 정도로 큰 고을이었던 순흥을 없애버리고 인근의 영천과 봉화, 풍기로 편입시켜버렸다. 그 일로 인해 순흥은 작은 고을로 쪼그라 들고 만다. 물론, 여러 가지 기록들을 보면 군대가 와서 순흥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는 학살극을 벌인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가담자들 상당수가 처형당하거나 유배를 떠나게 되면서 순흥이라는 고을은 피바람이 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금성대군까지 없애버린 세조는 마지막 남은 목표를 노린다. 바로 노산군으로 격하된 단종이었다. 얼마 후, 단종에 유배를 간 영월로 사약을 든 금부도사가 향한다.

정명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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