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향인으로 살아남기] 외롭고 쓸쓸한 50대가 골프장 대신 찾는 곳
'내향인으로 살아남기'는 40대 내향인 도시 남녀가 쓰는 사는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송유정 기자]
남편에게서 수상함이 감지된 것은 석 달 전쯤이다. 칼퇴근을 하고 소파에 누워 TV를 보다가 잠드는 것이 낙이었던 그의 귀가가 늦어지기 시작했다.
밤 10시에서 11시쯤 귀가했는데, 술기운은 없었다. 맨정신으로 그때까지 무엇을 하고 들어온 것인지. 게다가 뭐가 그리 신나는지 늘 싱글벙글하고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이 더 이상했다. 지인과의 문자, 통화가 잦아졌고 급기야 주말에도 혼자 외출하는 날이 많아졌다. 집에 오면 피곤하다며 고꾸라져 잠만 잤다. 감이 왔다. 외도였다.
남편의 외도 상대는 금세 밝혀졌다. 머리채 잡고 싸울 일은 없었다. 상대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온 마음과 몸을 바쳐 사랑한 상대는 '당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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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페 분위기의 요즘 당구장 요즘 당구장은 차분하고 조용하다. 담배를 피우거나 자장면을 시켜 먹던 과거의 당구장이 아니다. |
| ⓒ 송유정 |
실전 연습을 하고 집에 오면, 바둑에서 하듯이 그날의 경기를 복기했다. 설계한 대로 되지 않았다며 아쉬워 하는 날도 있었고, 과학적인 스포츠라 계산을 잘하면 그대로 들어맞는 게 당구라며 흥분하는 날도 있었다. 연애까지 합쳐 30년 가까이 남편을 봐왔지만, 그렇게 달뜬 얼굴은 처음이었다. 제대로 바람이 나버렸다.
남편은 하고 많은 스포츠 중에 왜 하필 당구에 관심을 두게 됐을까? 한국갤럽이 2024년 조사한 바에 따르면, 50대 남성이 즐겨하는 취미는 낚시, 등산, 골프 순이었다. 직접 하는 스포츠 중 즐겨하는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골프, 등산, 축구, 걷기, 달리기 순으로 답했다. 당구는 어떤 목록에서도 10위 안에 없었다. 당구 인구가 1000만 명이 넘는다는 프로당구협회의 추산이 무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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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구를 학업처럼 하는 남편 태블릿을 이용해 진지하게 당구를 공부하는 남편. |
| ⓒ 송유정 |
코로나19가 시작되고 50에 가까워지면서 회식이 줄고 여가가 생기자, 남편은 당황했다. 평생 종종거리고 살았던 탓에 남는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코로나가 지속됐던 3~4년 동안 도서관에 살다시피 하며 경영지도사, 가맹거래사,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획득한 이유는, 인생 제2막을 준비하는 치밀한 계산 때문이 아니라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발버둥이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다시 시작된 남편의 공허와 조바심을 채운 것이 당구였다. 자기 평가의 기준이 돈, 명예와 같은 것뿐일 때는 자기를 존중하기 힘들어진다. 끈기, 인내, 성실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자기를 평가하게 되면 자신의 노력으로 얼마든 자기를 존중할 수 있게 된다.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이고 모든 것이 헛헛해지는 나이에 당구는 남편에게 성취감과 의욕을 불어넣어 줬다.
아무리 노력해도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 같던 인생과는 달리 당구는 정직했다. 공부하고 계산한 대로 공을 치면 그대로 결과가 나왔다. 자신이 설계한 대로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왔을 때의 짜릿함은 성취감으로 이어지고 작은 성취는 자기 효능감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당구는 배우고 성장하는 것을 좋아하는 남편의 성향에도 잘 맞았다. 일분일초도 함부로 쓰는 것을 싫어하는 그에게 공부와 취미가 하나로 이어지는 당구는 최고의 여가 활동이자 놀이 그 이상의 의미였을 것이다. "오늘 퇴근 후 당구하러 갑니다"가 아니라 "오늘 경기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에서부터 당구를 대하는 남편의 진지한 자세가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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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구 영상속 남편 앱을 통해 자신의 당구 경기 영상을 다시 볼 수 있다. |
| ⓒ 송유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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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족에게 공유하는 당구경기 영상 남편은 만족스러운 경기 영상을 가족에게 공유하곤 한다. |
| ⓒ 송유정 |
그럴 때 만난 좋은 친구가 당구였던 셈이다. 치열하게 경쟁하지 않아도 되고 자신의 생각과 손끝에만 집중할 수 있으며 하면 할수록 단단한 자신을 만들어가게 도와주는 친구. 이런 친구와의 외도라면 얼마든 응원할 수 있지 않을까.
남편이 당구를 좋아하게 된 데는 실재하는 친구도 한몫했다. 10년 전 우리 부부가 살고 있는 동네로 이사 온 친구인데, 대학 시절의 절친이었다. 90년대에 학교 앞 당구장에서 살다시피 한 동기와 50대가 되어서 다시 당구장을 찾게 된 것이 너무 재미있다며 해맑게 웃는 남편이 스무 살 청년처럼 보였다.
꿈과 희망이 가득하고 뭐든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그때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처럼 말이다. 매일 친구와 연락을 주고받고 스스럼없이 비속어도 주고받으며 마음 편히 놀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꽤 안심되었다.
50, 쓸쓸함을 극복할 자유
50대는 애매한 나이다. 청년도 아니고 노인도 아닌 세대, 꿈꾸기에는 늦은 것 같고 포기하기엔 이른 것 같은 시기, 마음은 아직 뛸 수 있을 것 같은데 몸은 서서히 고장나는 나이.
50대는 처연한 나이다. 윗세대를 부양하면서 아랫세대로부터는 부양받지 못하는 첫 세대, 오히려 청년세대인 아랫세대까지 지원해야 하는 부담이 있는 낀 세대, 은퇴를 앞두고 있지만 재취업을 고민해야 하는 현실을 마주하는 세대.
그래서일까. 국가데이터처의 국가통계포털 자료와 국회입법조사처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3년까지 발생한 고독사 사망자 2만 1897명 중 74.8%가 40∼60대였고 그중 50대가 31.1%로 가장 많다고 한다. 아직은 사회적으로 가장 활발해야 할 나이지만 가장 외롭고 쓸쓸한 나이가 50대였다.
아내가 알아주지 못했던 고독과 쓸쓸함을 당구로 극복하고자 한 남편이 고마웠다. 배움을 멈추지 않고 자신에게 집중하기를 성실하게 이어가는 사람. 행복은 추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이라는 것을 알기에 오늘도 경기에 출전하며 힘든 시기를 단단하게 걸어가는 그가 존경스러웠다.
남편은 당구장에서 우연히 15년 전 골프를 같이 치던 지인들을 만났다고 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60대의 은퇴 세대가 골프장 대신 당구장을 찾은 이유는 명확했다. 경제적 부담이 적고 꼭 친구와 함께 오지 않아도 되며 언제든 원할 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쯤 되면 당구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진정한 독립, 삶의 진정한 자유를 찾게 해주는 스포츠가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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