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따르던 계모였는데... 잔혹한 복수 시작한 아들

이준목 2025. 10. 29.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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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tvN 스토리 < 벌거벗은 한국사2 >

[이준목 기자]

태종 이방원과 신덕왕후 강씨는 조선 왕조 개국의 주역이었다. 계모와 새아들의 관계였던 두 사람은, 혼란했던 여말선초 시대에 결국 태조 이성계를 왕위에 올리고 조선을 만드는데 함께 기여했던 정치적 동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권력을 향한 끝없는 욕망은, 두 사람을 믿고 의지하던 모자 관계에서 철천지원수라는 악연으로 바꾸어놓게 된다.

28일 방송된 tvN 스토리 < 벌거벗은 한국사2 >에서는 '왕실잔혹사, 아들 이방원 vs. 어머니 신덕왕후'편이 그려졌다.

신덕왕후는 고려의 권문세족 가문인 신천 강씨 출신이다. 훗날 남편이 되는 이성계는 당시만 해도 수도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함경도 변방의 장수에 불과했지만, 수많은 전투에서 전공을 세우며 고려말 최고의 명장으로 부상했다.

고려의 중혼
  tvN 스토리 < 벌거벗은 한국사2 > 중 한 장면
ⓒ TVNSTORY
고려는 공식적으로 1부 1처제였지만, 말기에 접어들며 사회 혼란과 지배층의 문란으로 인해서 '중혼' 문제가 종종 발생했다. 이성계처럼 지방 출신의 인물들이 고향에서 이미 결혼을 하고도 개경의 중앙귀족 가문과 관계를 맺기 위하여 다시 결혼을 하는 폐단이 나타났다. 고향에서 결혼한 아내를 향처(鄕妻), 수도 개경에서 결혼한 아내는 경처(京妻)라고 불렸고, 둘 다 동등한 정처로 대우받았다. 신덕왕후가 바로 이런 경처에 해당했다.

이성계는 이미 향처인 신의왕후 한씨가 있었고 여섯 아들까지 둔 상태였다. 이성계의 5남 이방원도 신의왕후의 소생이었다. 이성계는 신덕왕후와의 혼인관계를 롱하여 아직 입지가 미약했던 중앙정계에서 처가인 강씨 집안의 든든한 후원을 받게 됐다.

이성계와 신덕왕후의 나이 차는 무려 21살이었다. 아들이 된 이방원의 나이 차는 약 11살에 불과했다. 이성계는 총명했던 아들 이방원을 개경으로 불러와 공부를 시키기로 했고, 신덕왕후는 친자식도 아닌 향처의 아들을 맡아 키워야 하는 상황이 됐다. 하지만 의외로 신덕왕후와 이방원의 초창기 관계는 매우 돈독했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신덕왕후는 이방원을 보고 "어찌 내가 낳은 아들이 되지않았는가?"라고 할 만큼 마음에 들어 했고, 이방원 역시 신덕왕후를 친어머니처럼 믿고 따랐다고 한다.

이방원은 신덕왕후의 후원을 등에 업고 공부에 매진하며 당당히 과거에 급제하고 이후 정계에 진출하면서 아버지의 든든한 오른팔이 된다. 또한 신덕왕후는 이성계와의 사이에서 딸 경순공주와 아들 이방번, 이방석을 낳았다. 내조뿐만 아니라 정치적 감각도 매우 뛰어났던 신덕왕후는 이성계가 중앙 정계에서 정적들의 견제를 받을 때마다 권문세족인 자신의 집안을 활용하여 여러 차례 남편을 지원하고 위기에서 구해냈다.

이성계의 쿠데타
  tvN 스토리 < 벌거벗은 한국사2 > 중 한 장면
ⓒ TVNSTORY
1388년 고려와 이성계 일가의 운명을 가른 정변인 '위화도회군'이 발발한다. 요동정벌을 위하여 고려의 대군을 이끌고 출정했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을 결정하고 고려 왕실에 쿠데타를 일으킨다.

하지만 당시 이성계의 가족들은 개경에 있었다. 고려군이 이성계의 가족들을 생포하려 몰려오자 이방원은 목숨을 걸고 신덕왕후의 가족들을 함께 대피시켰다. 당시 이방원은 어린 이복동생들을 직접 품에 안고 다녔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계모임에도 정성껏 자신을 돌봐준 신덕왕후의 은혜를 갚기 위한 이방원의 진심이었다.

쿠데타는 성공하고 이성계 일파는 마침내 고려의 권력을 장악한다. 이성계를 중심으로 신흥무인세력과 신진사대부가 결합하면서 새로운 나라의 건국을 꿈꾸는 혁명세력이 구축된다. 이방원의 활약에 힘입어 신덕왕후를 비롯하여 이성계의 가족들도 모두 무사할 수 있었기에, 이방원과 신덕왕후의 신뢰 관계는 더욱 굳건해졌다.

이방원의 '정몽주 암살 사건' 당시에도 신덕왕후는 이방원의 편에 섰다. 가문의 '해결사'를 자처한 이방원은, 아버지의 절친이었지만 이제는 최대의 정적이 된 정몽주를 제거하는 악역을 맡았다. 이성계는 대노하여 이방원을 강하게 질책했지만, 신덕왕후는 정몽주 제거가 불가피했다는 이방원의 입장을 지지했다. 이성계도 그런 신덕왕후의 주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처럼 신덕왕후와 이방원은 많은 면에서 정치적 견해가 일치했고, 두 사람은 모자관계를 넘어서 조선 건국을 위한 최고의 파트너이자 동맹이었다.

1392년 7월 17일, 마침내 이성계 일파는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했다. 이성계가 왕위에 올라 조선을 개국하고 태조가 되면서, 아내 신덕왕후도 자연스럽게 조선 최초의 왕비에 등극했다. 당시 태조와 먼저 혼인한 정처였던 신의왕후는 이미 사망한 상태라, 신덕왕후가 정비의 지위를 인정받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신덕왕후의 책봉을 가장 축하해준 아들도 이방원이었다.

하지만 조선 건국 이후, 완벽한 파트너였던 신덕왕후와 이방원의 관계는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이미 고령이었던 태조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조선 조정은 의견이 엇갈렸다. 신하들은 조선 건국에 가장 공이 많았던 이방원이 세자가 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유력했다. 그러나 태조는, 정몽주 암살사건 등으로 자기 뜻을 어기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던 이방원을 탐탁지 않아 했다.

결정적으로 후계 구도를 뒤흔든 것은 신덕왕후의 변심이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신덕왕후는 태조와 신하들이 후계자 문제로 회의하고 있는 편전 앞에서 돌연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는 소리를 내며 모두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신덕왕후는 태조에 이어 자기 친자식들까지 왕위에 올리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다.

결국 태조가 세운 후계자는 신덕왕후의 둘째 아들이자, 모든 형제 중 막내였던 이방석이었다. 하지만 이 선택은 지극히 무리수였다. 태조에게는 이미 이방원을 비롯하여 여러 장성한 아들들이 있었고, 이들은 저마다 조선 건국 과정에 기여하며 나름의 정치적 입지와 지지세력을 갖추고 있었다. 반면 이방석은 나이도 어린 데다 태조의 적장자도 아니었기에 정통성 면에서도 명분이 취약했다.

이 과정에서 신덕왕후와 이방원은 든든한 우군에서 완전한 정적 관계로 돌아서게 된다. 신덕왕후는 태조의 최측근인 정도전과 손을 잡고 세자가 된 아들 이방석의 후견인으로 삼았다. 또한 아들의 왕위 등극을 위하여 가장 위협적인 걸림돌인 이방원을 조정에서 밀어내고 노골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했다. 이방원은 친어머니처럼 믿고 따르던 신덕왕후에게 하루아침에 배신당한 셈이 되어 큰 충격을 받고 분노했다.

하지만 1396년 8월, 조선의 운명을 가르는 뜻밖의 사건이 발생한다. 신덕왕후가 불과 40세의 나이로 건강이 악화되며 요절한 것. 실록에 따르면 태조는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크게 통곡하며 슬퍼했고 조회를 10일이나 정지하였다고 한다.

신덕왕후의 때 이른 사망은 이방원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됐다. 정치력과 수완이 뛰어나고 나이도 젊었던 신덕왕후가 오래 건재하여 이방석의 후견인으로 남았다면, 이방원이 재기할 기회는 아예 돌아오지 않았을 가능성도 높다.

신덕왕후가 사망하고 약 2년 뒤인 1398년 8월 26일, 이방원은 아버지 태조가 잠시 병석에 누운 틈을 타, 마침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 일파를 모두 제거하고 궁궐을 장악했다. 조선의 개국공신이던 정도전에 이어, 이복동생인 이방석과 이방번 역시 모두 피살된다. 한때는 이방원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지켰던 동생들을 하루아침에 잔혹하게 살해한 것은, 그만큼 신덕왕후에 대한 깊은 원한도 작용했음을 짐작게 한다.

이방원은 권력을 장악한 뒤 형식적으로 잠시 형 이방과(정종)을 왕위에 올렸으나, 2년뒤인 1400년 마침내 조선의 3대 국왕 태종으로 등극한다. 태종은 '2차 왕자의 난'과, '조사의의 난' 등을 진압하고 혼란했던 여말선초의 권력투쟁에서 '최후의 승자'가 된다.

태종은 왕위에 오른후에도 신덕왕후를 향한 복수를 멈추지 않았다. 1408년 아버지 태조가 승하하자, 태종은 곧바로 '신덕왕후 지우기' 작업에 돌입했다.

태종은 신덕왕후를 조선의 정식 왕비가 아닌 후궁으로 취급하며 종묘에 배항하지 못하게 했다. 또한 신덕왕후의 무덤을 파묘하여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산기슭으로 이장시켰고, 능에서 묘로 격하시킨다. 무덤 일부는 광통교(현재의 청계전)로 이전하여 사람들이 밟고 지나다닐 수 있게 됐다 심지어 이장된 무덤마저 무덤인지 알아볼 수 없게 평평하게 만들고 왕실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석상까지 매장시켰다. 죽은 계모를 그야말로 두 번 욕보인 셈이다.

실록에 따르면 태종은 세월이 한참 지난 1416년에도 신덕왕후를 언급하면서 "정릉(신덕왕후의 무덤)이 내게 조금도 은의(은혜와 의리)가 없었다"며 비판했다고 한다. 평생 정몽주와 정도전 등 수많은 정적들을 거침없이 제거한 태종이지만, 사후에도 특정인에게 이 정도로 적대감을 드러낸 인물은 신덕왕후가 거의 유일하다.

그만큼 신덕왕후가 태종 이방원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위협적인 경쟁자이자, 자신으로 하여금 가족 간에 피까지 보게 만든 원흉이었다는 원망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 한때는 희로애락을 함께한 가족이었지만, 권력이라는 욕망 앞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원수가 되어버린 두 사람의 비극적 운명은, 진정한 가족의 의미에 대하여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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