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의 마음 읽기] 메밀꽃 같은 삶의 풍경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면서 스산한 기운이 없지 않다. 긴 소매의 옷을 입고 나니 시절이 늦가을로 향해 가고 있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산뜻한 풍경이 내 살림 가까이에 있다. 메밀밭이 개중 하나이다. 동네의 몇 군데 밭에 메밀을 심었는데, 메밀꽃이 한창이다. 바닷물이 바위에 부딪쳐 생기는 물보라 같기도 하고, 염전에 깨끗한 소금이 온 것만 같기도 하다. 그래서 볼일 보러 가면서도 멈춰 서서 메밀밭을 바라보곤 한다. 자연은 때마다 풍경을 바꾸지만 신비스럽고 근사한 장면을 곳곳에 숨겨놓는다. 그리고 그런 놀라운 풍경이 숨겨져 있기에 우리는 오늘 색다르게 만나게 되는 그 귀한 풍경에 기대어 마음을 시원하게 또 푸근하게 지니게도 된다. 시인 임보 선생이 시 ‘오늘은’에서 “그대가 지금 비록 개똥밭에 굴러도/ 오늘은 보석보다 소중한 축복의 시간이다/ 왜?/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아름다운 생각의 씨를 틔울 수 있는/ 귀한 시간이므로”라고 노래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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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값 계산 다투는 식당의 소란
아침을 깨우는 닭 홰치는 소리
우리는 긴 끈으로 연결돼 있어
」

내게도 지난 한 달 사이에 특별한 경험이 없지 않았다. 그것은 잔잔하게 내 마음을 움직이는 일들이었다. 혹은 누군가 자신의 외투로 내 몸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것 같은 일이었다.
남도의 소읍에 있는 국밥집에 들렀을 때였다. 한 어른이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주인에게 인사를 건네더니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돈을 꺼내 주인에게 주는 것이었다. 손님과 주인은 꽤 잘 알고 지내는 사이로 보였다. 나는 밀려 있던 밥값을 주는 것이겠거니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명의 어른이 왔고, 그 손님은 손짓을 하면서 두 명의 어른을 불러 앉혔다. 세 명의 어른들이 식사를 끝내고 식당을 함께 나갈 때에 작은 소란이 있었다. 알고 보니 먼저 온 어른이 세 명의 밥값을 미리 냈던 것이었다. 평소 신세를 졌으니 국밥이라도 한 그릇 사야겠다고 생각해 일행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밥값을 앞서 치렀던 것이었다. 사는 게 각박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밥값을 계산하는 일이 빨라도 너무 빠르지 않은가.
또 하나의 일은 비행기를 탔을 때에 일어났다. 제주공항으로 가는 비행기에 승객들이 타고, 이륙 준비를 하고 있을 때에 승무원의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검색대를 통과하면서 승객 가운데 누군가 깜박 잊고 물건을 두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물건이 하모니카였다. 승무원은 하모니카를 손에 번쩍 들어 보였고, 내 건너편 좌석에 앉은 한 분이 자신의 것이라고 크게 말했다. “그거 내 하모니카라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백발의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하모니카를 받으며 승무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연거푸 했다. 하모니카를 부는 할아버지라니. 여행을 떠나면서 챙겨가는 물품 가운데 하모니카가 있다니. 참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리코더나 피아노는 물론 어떤 악기도 연주할 줄 모르는 나로서는 너무나 부러운 모습이었다.
마지막 일은 내 이웃에 관한 것이다. 내 이웃은 정원의 일과 목공의 일을 아주 잘한다. 그 집에서는 화초도 더 잘 자라는 것 같고, 꽃도 훨씬 일찍 피어 한참 나중에 지는 것 같다. 새로운 나무 의자도 금방 태어난다. 그런데 얼마 전 아내가 내게 말했다. “옆집에 닭을 키우나 봐요. 흰 닭이 있어요, 두 마리.” 아닌 게 아니라 닭장을 하나 뚝딱 만들어 놓았고, 닭 두 마리가 그 속에 있었다. 이웃집에서 닭을 키우기 시작하면서 내 아침에 작은 변화가 찾아왔다. 아침마다 닭이 길게, 여러 번 울었다. 이즈음의 내 아침을 구성하는 것 가운데 하나로 닭이 홰치는 소리와 우는 소리가 새롭게 포함되었다. 으스스한 바람과 낮은 기온, 물든 잎사귀와 낙엽 등과 함께 말이다. 그리고 닭이 만들어내는 소리에 점차 정감이 생겼다. 내 어릴 적 시골집 마당에서 키우던 닭 생각이 떠올랐다. 닭의 둥우리에서 내 작은 손으로 감싸 쥘 때 느꼈던 달걀의 온기가 떠올랐다. 이웃집의 닭으로 인해 나는 잊고 있었던 옛일과 옛 풍경을 되찾았다.
폴 엘뤼아르는 시 ‘우리 서로 멀리 있을 때라도’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 서로 멀리 있을 때라도/ 모든 것은 우리를 이어 준다// 메아리의 몫을 마련하라/ 거울의 몫/ 방의 몫 도시의 몫/ 남자의 몫 여자의 몫/ 고독의 몫도/ 그리고 그것은 항상 네 몫이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내 몫이다/ 우리는 나누어 가졌다/ 그러나 네 몫 너는 그것을 내게 바쳤고/ 내 몫 나는 그것을 네게 바친다.”
이 시에서 노래하는 것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긴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메아리라는 긴 끈으로. 내 몫은 너의 몫이고, 너의 몫은 나의 몫이기도 하다. 그래서 살면서 인상을 강하게 남기는 것, 크게 감격하게 하는 것, 바라는 일이 생겨나게 하는 것, 잃었던 것을 되찾게 하는 것 등이 있는 것일 테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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