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 내 마음 살포시 데워줄 사랑 노래

길은영 2025. 10. 27.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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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설렘에서 영원의 꿈까지... 이 계절에 들어볼 만한 클래식 곡들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8년의 유럽 유학 생활을 마치고 고향 포항으로 돌아와 클래식 음악을 전하는 매개체로서 무대와 글을 통해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기자말>

[길은영 기자]

▲ 가을의 길 위에서 바람이 차가워질수록 마음은 따뜻한 것을 찾는다.
ⓒ pixabay
몇 주째 온도가 뚝뚝 떨어지더니, 바람이 달라졌다. 여름의 더움은 사라지고, 대신 따뜻함이 남았다. 차가워진 공기 속에서야 비로소 따뜻함의 의미를 느낀다. 가을이 되면 사람의 마음은 이상하리 만큼 '온기'를 찾는다. 누군가의 말 한 마디, 오래된 음악 한 곡 그리고 오래전에 들었던 한 통의 전화 속 목소리까지도 따뜻하게 되살아난다.

예전엔 모르는 전화번호를 찾으려면 114로 전화를 걸었다. 그때 수화기 너머로 들리던 첫 마디는 이랬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지금 생각하면 꽤 낯간지럽지만, 그 인사에는 묘한 온기가 있었다. 그 말은 꼭 사랑 고백이 아니었다. "당신의 목소리를 반갑게 맞이합니다"라는 다정한 환영에 가까웠다. 그 짧은 문장이 전해주던 온도는, 요즘의 차가운 세상에서 문득 그리워진다.

사랑이란 것도 결국 그런 게 아닐까. 조금은 어색하고, 때로는 망설여지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마음을 건네보려는 용기 말이다. 사랑은 늘 같은 무게로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사랑은 바람처럼 가볍고, 어떤 사랑은 돌처럼 무겁다. 시간이 지나면 진지해지고, 때로는 꿈처럼 희미해진다. 피아노 앞에 앉으면 그 감정의 무게가 음표로 흘러내린다. 그래서 나는 종종 사랑을 음악으로 설명한다.

[가벼운 사랑] 설렘의 리듬

모차르트의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Eine Kleine Nachtmusik) K.525>는 사랑의 첫인사 같다. 18세기 빈의 천재 작곡가였던 그는 늘 명랑하고 자유로웠지만, 그 시기엔 이미 경제적 어려움과 외로움을 겪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곡에는 그런 그림자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밤의 세레나데라는 제목답게, 음악은 가볍고 반짝인다. 처음 사랑에 빠진 이들의 눈빛처럼 밝고 솔직하다. 모차르트의 '가벼움'은 단순한 유쾌함이 아니라, 상처를 품은 사람이 세상을 다시 사랑하려는 용기였다.

[무거운 사랑] 인내의 선율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Vocalise)>는 가사가 없는 노래다. 그는 러시아 혁명 후 망명지 미국에서 모국어 대신 음악으로 감정을 표현하며 살았다. 이 곡은 "그럼에도 사랑한다"는 침묵의 고백이다. 사랑이 언어를 잃었을 때, 음악은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의 선율은 말보다 진실하다.

[진지한 사랑] 동행의 화음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1악장은 조용히 타오르는 내면의 불빛이다. 이 곡은 베토벤이 제자였던 줄리에타 귀차르디(Giulietta Guicciardi)에게 헌정되었다. 그녀는 귀족 출신이었고, 베토벤은 신분상 결혼이 어려운 음악가였다.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품었지만, 사회적 차이와 베토벤의 청력 문제는 두 사람의 관계를 가로막았다.

이 곡이 작곡된 1801년, 베토벤은 이미 귀가 서서히 들리지 않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찾아오는 절망 속에서 음악으로 자신의 감정을 기록했다. 이듬해 1802년, 그는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남긴다. 그 속에서 그는 "나는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절망에 죽음을 생각했지만, 예술이 나를 붙잡았다"고 썼다.

그러니 이 곡 속에는 단순한 사랑의 감정만이 아니라, 자신이 점점 잃어가고 있는 삶과 예술에 대한 고뇌가 함께 담겨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월광(Moonlight)'이라는 부제는 사실 베토벤이 붙인 이름이 아니다. 그는 이 곡을 <환상곡풍의 소나타>라고만 적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1832년, 베를린의 음악평론가 루트비히 렐슈타프가 "이 곡은 마치 달빛이 비치는 루체른 호수 위의 조각배 같다"고 평하며,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 작품을 '월광 소나타'라 부르게 되었다.

그래서 이 곡을 들을 때면, 단순히 고요하거나 서정적인 음악이 아니라 잃을 수밖에 없는 사랑, 그리고 삶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예술가의 마지막 의지가 들려온다. 베토벤의 음악은 그렇게 사랑과 삶, 예술의 경계에서 진동한다. 사랑이 진지해질수록 사람은 조용해지고, 더 많이 이해하며, 덜 말하게 된다.

브람스의 <Intermezzo Op.118 No.2>는 그가 평생 품었던 클라라 슈만을 향한 그리움을 담았다. 브람스에게 슈만은 자신을 세상에 알린 은인이었다. 슈만은 그의 재능을 인정해 음악잡지에 극찬을 실어주었다. 그런 스승의 아내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복잡했을까. 그 무렵 슈만은 정신 질환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결국 라인강에 몸을 던졌다는 소식에 브람스는 곧장 달려갔다.

그 후 그는 클라라와 일곱 명의 아이들을 돌보며 가족 곁을 지켰다. 얼마 후 슈만이 세상을 떠나자, 브람스는 결국 마음을 고백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사랑합니다. 저와 결혼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나 클라라의 대답은 단호했다. "나는 너의 음악을 사랑하지만, 너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는 없어. 나는 여전히 슈만의 아내다." 그녀의 사랑을 얻지 못한 그는, 대신 그녀를 평생 마음속에 품었다. 그의 음악에는 겉으로 드러내지 못한 감정의 깊이가 담겼다.

브람스가 64세로 생을 마감하기 4년 전, 그는 여섯 곡의 피아노 소품 <Klavierstücke Op.118>을 작곡했다. 그중 두 번째 곡 <Intermezzo>는 마치 클라라를 향한 그의 마지막 고백처럼 들린다. 처음엔 따뜻하고 부드럽게 시작하지만, 중반부에 이르면 감정이 격해진다. 세 개의 성부가 서로 얽혀 있는데, 위 성부는 클라라, 중간은 브람스, 아래는 그들이 서 있는 배경처럼 들린다. 서로의 마음이 교차하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구조다. 이 음악 안에서는 적어도 브람스와 클라라는 함께했다.

이 곡을 들으면 마치 브람스가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을 음악 속에서만 이룬 듯한 느낌이 든다. 브람스는 사랑을 말하지 못한 채, 조용히 가슴에 묻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화려하지 않지만, 한 음 한 음이 인간적인 진심으로 떨리고 있다. 그의 <Intermezzo>는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기록이 아닐까.

[환상적인 사랑] 꿈의 여운

드뷔시의 <달빛>은 시인 베를렌의 시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는 현실의 경계를 벗어나 자유를 꿈꾸었고, 그 자유는 음악 속에서 사랑의 환상이 되었다. 물결처럼 일렁이는 피아노의 음들은 사랑이 현실에서 벗어나 꿈으로 이어질 때의 그 미묘한 떨림을 닮았다.

모차르트처럼 웃고, 라흐마니노프처럼 울고, 브람스처럼 곁을 지키며, 드뷔시처럼 꿈꾸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사랑의 방식이다. 많은 동화의 끝에는 언제나 이렇게 적혀 있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주인공들은 수많은 사건을 겪고도 결국 행복으로 마무리한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 결혼을 해보니, 결혼이 종착점이 아님을 알게 된다. 행복은 끝이 아니라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다. 예전에 TV에서 한 부부 상담가가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며 한 문장을 덧붙였다고 한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싸우고 화해하고, 또 싸우고 또 화해하며, 딱 노력한 만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 문장을 들었을 때 마음이 오래 울렸다. 사랑의 무게는 변하지만, 그 리듬은 계속된다. 그것이 음악처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덧붙이는 글 | 가을은 마음이 음악을 닮는 계절이다. 사랑의 무게를 떠올리며 쓴 이 글은, 피아노 앞에서 느꼈던 여러 감정들의 기록이다. 연주자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처럼, 사랑도 매 순간 다른 온도로 연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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