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 타결 매우 가깝다" 트럼프 압박에, 딜레마 빠진 한국

김원 2025. 10. 26.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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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이 2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한미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2025.8.26


미국이 한국 정부의 결단을 재촉하는 가운데, 한국은 어느 쪽을 택해도 부담이 따르는 정치·경제적 딜레마에 직면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3500억 달러(약 500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 패키지 협상 타결을 압박하면서 한국은 타결 시 재정 부담과 외환 불안을, 결렬 시 시장 불안과 외교 리스크를 동시에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24일(현지시간) 아시아 순방길에 오른 트럼프 대통령은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원 안에서 기자들과 만나 한·미 협상에 대해 “타결(being finalized)에 매우 가깝다”며 “그들이 준비됐다면, 나도 준비됐다(If they have it ready, I'm ready)”고 말했다. 전날 트럼프 행정부 고위 당국자도 “가능한 한 빨리 한국과 협정 체결을 매우 열망한다”고 밝혔다. 29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한국 정부의 결단을 재촉하는 발언이 이어진 것이다.

한·미 양국은 협상의 큰 틀에서는 일정 부분 의견 접근이 이뤄졌지만, 세부 쟁점에서는 여전히 간극이 남아 있다. 핵심은 한국이 약속한 3500억 달러 투자 가운데 직접(현금) 투자 비중과 분납 방식이다.

미국은 한국의 현금 투자 금액을 2000억 달러(약 290조원) 수준으로 하고, 연간 200억~250억 달러 이상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은 연간 150억 달러(약 22조원) 안팎의 분할 투자가 최대치라는 입장이다. 이는 외환시장 안정 한도를 고려한 판단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최근 국회 국정감사에서 “외환시장에 충격을 주지 않고 조달 가능한 외화 규모는 연 150억~200억 달러 수준”이라고 밝혔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도 지난 24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유사한 논의가 있었다”며 “어느 수준이 적정한지 두고 양국이 팽팽히 맞서 있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할지, 협상 테이블을 더 끌고 갈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정부 안팎에선 협상을 서두르지 말자는 기류도 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개막 이전에 미국과 추가 대면 협상은 어렵다”며 “APEC 계기 타결을 기대한다면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이재명 대통령도 최근 CNN 인터뷰에서 “조정·교정에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며 협상 속도 조절을 시사했다. 일각에서 제기된 ‘부분 합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정부는 “고려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협상이 길어질수록 시장 불안은 커지고 있다. 미국은 철강·알루미늄(50%)·자동차·부품(25%)에 이어 금속 파생상품(해당 금속 함유율에 따라)에도 관세를 부과하고, 반도체와 의약품에는 최대 100% 관세를 물리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국제비상경제권법(IEEPA)에 따른 상호관세가 위헌 논란에 휘말리자, 트럼프 행정부는 무역확장법 232조에 근거한 품목관세로 정책의 무게 중심을 옮기고 있다.

협상이 더 지연되면 반도체·자동차·철강 등 한국의 주력 수출품이 최혜국 대우(MFN) 적용에서 제외되거나, 관세 인하 혜택을 받지 못할 상황에 놓여 있단 의미다. 이미 대미(對美) 자동차 수출은 지난 3월 이후 7개월 연속 감소세를 이어가고 있다.

협상 불확실성이 길어지며 원화값은 지난 7월 달러당 1390원대에서 이달 장중 한때 1440원까지 밀렸다. 이에 따라 3500억 달러 규모 투자액의 원화 환산 부담도 487조원에서 504조원으로 17조원가량 늘었다. 한 외환시장 관계자는 “협상 지연이 장기화할 경우 투자자 심리 불안이 확대되고, 환율 상승이 재정 비용에 직접 반영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요구대로 매년 250억 달러 이상의 해외 투자를 지속할 경우, 국내 재정 압박이 눈덩이처럼 커질 수 있다. 일부 금액이라도 현금으로 직접 지급해야 하는 상황에서 원화 약세가 겹치면 외환시장 불안도 심화될 가능성이 있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에게도 경주 APEC과 이를 계기로 진행할 한·미, 한·중 정상회담은 ‘트럼프 관세’의 외교적 성과를 부각할 수 있는 무대라는 점에서 정치적 의미가 크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20일(현지시간) 공언한 “좋은 협상 결과(fantastic deal)”가 미국 입장에서도 필요하다. 특히 30일 미·중 정상회담보다 하루 앞서 열리는 한·미 회담에서 실질적 진전이 있어야 하는 상황이다. 한 통상전문가는 “한·미 양국이 정상회담을 통해 직접 투자 규모·이익 배분 구조 등에서 한 발씩 양보할 경우 극적 타결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했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트럼프는 전형적인 거래론적 접근으로 협상을 주도하고 있으며, APEC을 앞둔 정치 일정상 한국에 대한 여지를 남겨두려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며 “장기화는 양국 모두에 부정적이므로, 양측이 실익을 고려한 정치적 절충점을 찾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번 협상의 관건은 금액보다 합의의 문서화 여부”라며 “양해각서(MOU)든 공동선언이든, 기본 틀만 명확히 문서로 남긴다면 의미 있는 성과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김원 기자 kim.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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