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여자배구 덕후, 요즘 '원더독스' 열성팬이 됐습니다
[양형석 기자]
초등학생 시절,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을 통해 각 종목의 대략적인 룰을 익힌 나는 그 후 40년 가까이 '스포츠 마니아'의 삶을 살고 있다. 좋아하는 야구팀의 경기 결과에 따라 다음날 기분이 달라지고 월드컵이나 유로 같은 대형 축구 대회가 열릴 때는 대회 기간 내내 수면 부족에 시달리기도 한다. 스포츠 업계 종사자는 아니지만 스포츠는 내 삶에서 꽤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스포츠를 좋아하다 보니 스포츠를 소재로 한 예능 프로그램에도 자연스럽게 관심이 생기게 된다. 특히 <국대는 국대다>와 <뭉쳐야 찬다>, <씨름의 여왕> 같은 종합편성채널과 케이블TV의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들을 열심히 챙겨 봤다.
그리고 지난 9월 말부터 나의 일요일 밤을 책임지고 있는 또 하나의 스포츠 예능 프로그램이 생겼다. 바로 MBC에서 방송하고 있는 <신인감독 김연경>이다. 한국 여자배구 역대 최고의 선수로 꼽히는 '배구여제' 김연경이 은퇴 및 방출 선수 등을 모은 '필승 원더독스'의 감독으로 활동하는 배구 예능 프로그램이다. 사실 <신인감독 김연경>은 20년째 '여자배구팬'을 자처하는 내게 그야말로 '맞춤형 스포츠 예능'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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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시즌을 끝으로 현역 생활을 마감한 김연경의 첫 행보가 '감독'이 될 거라 예상한 배구팬은 많지 않았다. |
| ⓒ <신인감독 김연경> 홈페이지 |
나 역시 고 장윤창 선수가 활약하던 1980년대 후반부터 배구를 좋아했지만 여자배구에는 상대적으로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호남정유가 독주하던 1990년대 여자배구는 '누가 2위를 하느냐'를 결정하는 종목이었고 2000년대에도 현대건설이 IMF 외환위기로 해체된 팀들의 주축 선수들을 쓸어 담으면서 다시 독주를 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여자배구는 마치 '결말을 알고 보는 영화'처럼 허무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2005년 V리그가 출범하면서 15년 동안 가지고 있던 여자배구에 대한 나의 편견은 깨끗하게 씻어 내렸다. 한일전산여고(현 한봄고)를 갓 졸업한 신인 황연주(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가 남자 선수나 할 법한 후위공격을 자유자재로 시도하면서 여자배구의 새로운 재미를 선사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다음 시즌 '슈퍼루키' 김연경이 가세하면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는 단숨에 챔프전 우승을 차지했다.
V리그가 담아내기엔 너무 큰 존재였던 김연경은 2009년 일본의 JT마블러스로 임대 이적하면서 해외 생활을 시작했고 여자배구의 인기도 다시 떨어지는 듯 했다. 하지만 김연경이 떠난 후에도 양효진과 김희진(이상 현대건설 힐스테이트), 이소영(IBK기업은행 알토스), 강소휘(도로공사) 같은 새로운 스타 선수들이 꾸준히 등장했다. 여기에 2020년 김연경이 복귀하면서 여자배구는 최고의 겨울스포츠로 군림했다.
흔히 특정 스포츠를 좋아하려면 응원팀과 최애 선수가 생겨야 하지만 역설적으로 나는 응원하는 팀과 최애 선수가 없었기 때문에 지난 20년 동안 꾸준히 여자배구를 좋아할 수 있었다. 나는 특정팀의 승패와 특정 선수의 활약에 휘둘리지 않고 경기 자체를 즐기면서 여자배구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이제는 일부 선수가 아닌 코트에서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 모두를 응원하는 '여자배구 찐팬'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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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인감독 김연경>은 김연경 감독을 비롯한 선수들의 열정과 노력을 시청자들에게 잘 전달하는 배구예능이다. |
| ⓒ MBC 화면 캡처 |
하지만 지난 9월 28일 <신인감독 김연경> 첫 회를 봤을 때만 해도 기대보단 우려가 더욱 컸다. '언더에서 원더로'라는 캐치프레이즈는 훌륭했지만 프로 8구단 창단이라는 최종 목표가 너무 허황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첫 회에서 공개된 선수들은 여자배구의 열성팬을 자처하는 나에게도 낯선 선수들이 적지 않았다. 실제로 배구팬들에게 알려진 선수는 표승주와 이나연, 김나희 정도 밖에 없었다.
많은 걱정에도 여자배구에 대한 애정과 김연경에 대한 믿음으로 4회까지 시청한 결과, 어느새 나는 필승 원더독스의 열성팬이 됐다. 사실 체계적으로 연습할 시간도 많지 않았던 원더독스에게 프로 3팀을 포함해 실업 우승팀, 고교 우승팀, 대학 우승팀, 일본 고교 우승팀을 상대해야 하는 일정은 너무 가혹해 보였다. 하지만 김연경 감독과 선수들은 승리를 위해 열정을 쏟아내며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비록 예능 프로그램이지만 은퇴하자마자 곧바로 감독을 맡게 된 김연경의 지도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김연경은 초보감독 답지 않은 날카로운 분석과 예리한 작전으로 선수들에게 정확한 지시를 내리면서 원더독스의 경기력을 끌어 올리고 있다. 가끔 선수들이 안일한 플레이를 하면 '식빵언니'의 본색을 드러내면서 선수들을 강하게 질책하며 분발과 집중을 촉구하기도 한다.
과도한 '복사 및 붙여넣기'와 반복 재생으로 시청자들에게 피로감을 주는 일부 스포츠 예능들과 달리 배구의 재미를 극대화 해주는 깔끔한 편집도 <신인감독 김연경>의 큰 재미다. 또한 배구 중계가 익숙하지 않은 중계진 대신 배구 중계 경험이 풍부한 KBS N 스포츠의 이호근 캐스터와 이숙자 해설위원으로 중계진을 꾸린 것도 좋은 선택이었다(MBC는 2013-2014 시즌부터 V리그 중계를 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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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승 원더독스는 프로 및 아마추어 최강팀들과의 7경기 중 4승을 따내지 못하면 팀이 해체된다. |
| ⓒ <신인감독 김연경> 홈페이지 |
하지만 4승이라는 1차목표와 별개로 <신인감독 김연경>이라는 프로그램의 최종 목표인 '8구단 창단'은 또 다른 문제다. 현재 남녀 7개 구단 체제로 운영 중인 V리그에 8번째 구단이 탄생하려면 창단을 희망하는 기업이 나와야 하고 한국배구연맹의 승인 절차와 기존 구단 및 남자부의 협조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주 많다. 무엇보다 원더독스 선수들이 주축이 된 8구단이 V리그에서 경쟁력이 있을지도 미지수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을 차치하더라도 <신인감독 김연경>이라는 프로그램이 나를 비롯한 기존의 배구팬들은 물론이고 일반 시청자들에게도 여자배구의 재미를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리고 <신인감독 김연경>을 계기로 앞으로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배구 뿐 아니라 여러 스포츠 종목들의 매력을 널리 알리는 기회가 마련된다면 스포츠 팬으로서 더 바랄 게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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