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부인과 불륜 선호…“신분제 오염시킬 것” [강영운의 ‘야! 한 생각, 아! 한 생각’]

2025. 10. 25.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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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불륜 치정을 문학으로 그린 스탕달

시대의 무게가 그를 짓눌렀음에도, 그는 어떻게든 상류사회로 비집고 들어가고 싶었다. 비싼 옷과 화려한 집에서 파티를 주재하는 번듯한 남자. 부(富)와 지식과 교양으로 무장한 세련된 사내. 그러나 세상은 그를 얕잡고 업신여겼다. “더러운 평민”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감히 쳐다도 못 볼 곳을 우러러보지 말라고.

피는 끓었고, 그는 복수하고 싶었다. 견고한 신분제를 오염시키고 싶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하나. 귀족 부인과 정을 통하는 것이었다. 굳고 단단한 신분제를 균열하는 완벽한 방법이었다. 소설 ‘적과 흑’은 귀족 유부녀를 유혹해 신분 상승을 노리는 평민 줄리앙 이야기로, 19세기 프랑스 작가 스탕달이 썼다. 사실 적과 흑은 완전한 허구가 아니다. 스탕달 본인 이야기가 반편 정도는 녹아 있었다. 귀족 유부녀를 탐하는 그의 욕망도 마찬가지였다.

‘적과 흑’으로 유명한 프랑스 소설가 스탕달 초상. 본명은 앙리 벨, 스탕달은 필명이다.
스탕달 본명은 ‘앙리 벨’

나폴레옹 영웅시…전쟁도 참전

스탕달은 그의 필명이었다. 그가 세상에 나며 받은 이름은 앙리 벨이었다. 아버지 케루빈 벨은 독실한 가톨릭주의자여서, 자신의 세간살이 하나하나 ‘하느님의 이름’으로 통제하기를 좋아했다. 다행히도 어머니는 너른 품을 가진 여성이었기에 앙리는 그곳에서나마 들숨과 날숨의 자유를 느꼈다.

어머니가 죽었을 때 앙리 나이는 고작 7세였다. 양육은 가톨릭 수도사가 전담했다. 고루한 가르침이 이어졌고, 순응하지 않으면 매질이 따랐다. 앙리는 아버지와 신을 향한 혐오감을 키웠다. 갈등이 커지면서 어린 앙리는 외할아버지 가뇽에게 맡겨졌다. 너르고, 자유로운 외가의 기운을 앙리는 빠르게 받아들였다. 외탁의 농도가 짙어졌다. 그가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앙리 벨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스탕달(독일 소도시 스텐달의 프랑스식 발음)을 필명으로 삼은 건 자연스러웠다.

1799년 16세 스탕달은 파리로 향했다. 학교 진학을 위해서였다. 파리에 도착한 다음 날, 도심은 혁명의 열기에 휩싸였다.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스탕달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엄숙한 권위주의, 견고한 신분제를 무너뜨리고 새 시대를 열어줄 영웅의 등장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스탕달이 나폴레옹의 군대를 따라 이탈리아 전쟁에 참가한 이유였다.

이탈리아는 엄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빛과 쾌락을 사랑하는 이탈리아적 감성은 스탕달이 그토록 염원해온 모양 그대로였다. 파리에서 위선적인 엄숙함을 내려놓고 이탈리아의 말랑함과 아늑함을 힘껏 즐겼다. 나폴레옹 체제가 무너진 뒤에 그는 이탈리아 밀라노로 향했고, 그곳에서 7년을 살았다.

강박적으로 육체적 쾌락 탐하다

가장 선호하는 여성군은 ‘귀부인’

스탕달은 혼인하지 않았는데, 결혼의 책임과 의무로 쾌락이 중단되길 원치 않아서였다. 그는 이곳에서 강박적으로 여자를 탐했다. 귀부인 유부녀는 특히 그가 가장 선호하는 여성군(群)이었다. 앞에서는 잰 체하면서, 뒤에서는 온갖 음란한 짓을 벌이는 그들을 조소하고 싶어서였다.

1818년 스탕달은 폴란드 장교의 아내 메틸드 부인을 열렬히 사랑했다. 다른 여성과 달리 그녀는 쉽게 그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았다. 몸가짐이 바르고, 성품이 얌전한 여성이었다. 스탕달은 3년간 속앓이를 했지만, 결국 그녀와 섞이지 못했다.

실연을 앓는 누구나 철학자가 된다. 고통의 근원을 알고자 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니까. 그가 실연으로 앓던 해 ‘사랑에 관하여(De l’amour)’라는 이름의 에세이를 썼다. 사랑은 그에게 있어 이탈리아 도시 볼로냐에서 로마로 가는 길과 같았다. 산 높고 골이 깊어 멀고 지난하지만 아름답고 찬란한 자연으로 기진한 인간을 달래는 것처럼, 사랑도 단계를 밟아가면서 무르익는다는 것이었다. 에세이는 묘사의 밀도가 높고, 감정의 처연함이 돋보였다.

밀라노에서 아팠던 그는 그래서 파리로 돌아왔다. 사랑의 아픔을 사랑으로 잊었다. 그의 쾌락은 여성으로만 충족되는 것이어서, 어디에서나 여자를 찾았다. 애정이 없는 관계도 개의치 않아 그는 자주 창녀와 붙었다. 그의 몸에 매독이 똬리를 튼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살인 사건에서 영감 얻은 ‘적과 흑’

귀부인 여성 유혹한 수도승의 최후

스탕달이 적과 흑의 초고를 만난(?) 건 1827년이었다. 그가 자주 읽는 신문 ‘가제트 데 트리뷴오’에 한 살인 사건이 보도됐다. 하급 계층의 청년이 불륜관계인 귀족 유부녀를 살해하려 한 치정극이었다. 유부녀가 사실을 공개해 자신의 성공을 방해한다는 이유였다.

귀족 여성과 치정을 삶의 동력으로 삼은 하급 계층 스탕달은 기시감에 전율했다. 그는 그 길로 적과 흑을 써 내려갔다. 한 남자의 치정, 그리고 프랑스 사회가 품은 모순까지 담은 작품이었다. 적(赤)은 나폴레옹을, 흑(黑)은 성직자의 검은 수도복을 의미했다. 주인공 줄리앙은 나폴레옹을 숭배하는 인물이어서 그처럼 훌륭한 군인(빨간 군복)이 되고자 열망했다. 하지만 군인이 주도한 혁명의 시기는 저물었고, 그에게 남은 유일한 성공의 길은 성직(검은 수도복)의 길뿐이었다. 나폴레옹을 열렬히 숭배해, 그의 군대에서 입신했지만, 결국 좌절한 스탕달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줄리앙은 성직의 숭고함으로 귀부인 여성을 유혹해 자신의 영달을 추구했지만, 결국 불륜이 발각돼 동네를 떠나야 했다. 이후 불륜녀를 총으로 쏴 죽이고 스스로는 단두대에 목이 잘린다. 칼날에 서린 적색의 피는 그의 야망만큼이나 허망히 흩날렸고, 그는 흑색의 죽음으로 스러졌다.

성병과 수은 후유증으로 사망

묘비명 “썼고 사랑했고 살았다”

당대 문학의 주류는 낭만주의적이었던 탓에 귀부인과 낮은 신분의 청년 사이의 간통을 다룬 소설에 세상은 기함했다. 손가락질과 비난이 쏟아지는 건 당연했다. 그럼에도, 스탕달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말했다. “소설은 거울이어야 하며, 세상의 진창을 비쳤다고 해서 거울을 비난할 순 없다.” 적과 흑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은 건 50년이 지나서였다.

성공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기 전에 그의 몸은 문드러졌다. 성병이 퍼진 데다가, 치료를 위해 사용한 수은이 후유증을 부르고 있어서였다. 파리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1842년 3월 거리에서 발작으로 그가 쓰러졌다. 죽음의 냄새를 미리 맡았기 때문인지, 그는 몇 해 전 묘에 세울 비명을 미리 지었다. ‘Arrigo Beyle, Scrisse Amo Visse’. 이탈리아어로 “썼고, 사랑했고, 살았다”는 뜻. 정지돼서 완성된 명사적 삶이 아니었고, 끊임없이 움직여 역동했던 동사적 삶. 스탕달이 보여준 삶이었다.

[강영운 매일경제신문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32호 (2025.10.29~11.0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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