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주인'을 보세요, 새로운 거장이 탄생했습니다
[김상목 기자]
"반장, 모범생, 학교 인싸인 동시에 연애가 가장 큰 관심사인 열여덟 '이주인'. 어느 날, 반 친구 '수호'가 제안한 서명운동에 전교생이 동참하던 중 오직 '주인'만이 내용에 동의할 수 없다며 나 홀로 서명을 거부한다.
어떻게든 설득하려는 '수호'와 단호한 '주인'의 실랑이가 결국 말싸움으로 번지고, 화가 난 '주인'이 아무렇게나 질러버린 한마디가 주변을 혼란에 빠뜨린다. 설상가상, '주인'을 추궁하는 익명의 쪽지가 배달되기 시작하는데..."
영화진흥위원회 데이터베이스에 적힌 <세계의 주인> 줄거리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극장에 가기 전, 즉 몇만 원 비용과 오가는 시간 고려한 기회비용을 고려하면, 누구나 자신이 선택한 작품에 관한 정보를 미리 파악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인터넷 사이트 검색하고, 동영상 쇼츠를 찾는 이유다.
하지만 가끔은 사전 정보가 독이 된다. '차라리 모르고 봤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경험은 영화 좋아하면 누구나 겪을 사례다. 영화감상에 정답이란 없다. 다수가 동의하고 공감할 순 있지만, 최종 선택은 관객 각자의 몫이다. '가성비' 따지는 요즘 시류엔 비효율 취급되기 딱 좋다. 그 불확실성은 우리에게 소외감을 느끼게 하지만, 때론 세상에서 오직 자신에게만 허락된 특별한 감상으로 남기도 한다. 종종 같은 소감에 도달한 이를 만나면 격한 기쁨도 누릴 수 있다. 영화가 주는 뜻밖의 선물은 너무나 달콤한 유혹이라 한 번 빠지면 헤어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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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의 주인> 스틸 이미지 |
| ⓒ 바른손이앤에이 |
그런데 여기에서 물음표. 영화는 수학 문제 풀이가 아니다. 꼭 미리 다 알고 예언할 필요는 없다. 워낙에 우리가 가성비에 집착하다 어느새 순수하게 새로운 존재와 만나는 모험을 회피하는 버릇이 생긴 건 아닐까? 이 작품은 관객에게 그렇게 질문한다. 원래 영화는 낯선 만남이라 호소하는 환청이 들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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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의 주인> 스틸 이미지 |
| ⓒ 바른손이앤에이 |
감독은 이후 장편으로 진입한다. 2015년 첫 장편 <우리들>, 2019년 두 번째로 <우리집>을 내놓는다. 그러나 이후 몇 년간 신작은 나타나지 않았다. 1982년생, 한창 활동에 열을 올릴 때인데 왜 이리 뜸할까? 세계를 휩쓴 대역병으로 인한 영화계 침체 때문일까? 너무 일찍 재능과 창의를 소진하고 만 걸까?
아이들이 주인공이지만, 그저 달콤하거나 훈훈함과 거리를 두는 일관성은 얼핏 정체나 답습으로 보일 수 있다. 평단은 늘 변화를 요구하고 관객은 새로운 만남보단 익숙하고 효율적인 걸 찾는다. 그런 시대에 일관성을 유지하는 감독의 방식은 답답하게 보이기 딱 좋다. '도파민' 중독에 쩔은 관객에게 자극적이지 않은 이야기는 다 알 법한 걸로 취급되기 그만이다. 감독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감독은 정공법을 택했다. 전작에서 햇수로 6년, 지각 신작이다. 촉망받던 신인도 40대다. 영화판 누구나 계속 활동할 수 있을지 안심할 수 없는 지경이다. 그만큼 요즘 상황이 얼어붙었다. 그러나 시류에 영합하려 몸부림쳐도 답이 없다는 걸 아는 감독은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한다. 지금까지 자신이 보여온 세계를 한층 더 갈고 닦았다. 기존 팬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극장으로 뛰어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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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의 주인> 스틸 이미지 |
| ⓒ 바른손이앤에이 |
일본의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가족'이란 보편적인 틀을 활용해 인가과 세계에 관해 탐구하듯, 윤가은은 꾸준히 '아이'라는 창문을 활용한다. 죽음과 우정 같은 익숙한 소재는 물론 불륜이나 빈곤 등 사회문제로 해체 위기에 놓인 가족 공동체에 대해 10대의 시선을 빌려 현미경처럼 조망하는 솜씨는 정평이 나 있다. 그렇게 동 세대 한국, 특히 여성 감독 사이에서 이미 감독의 이름은 특별한 위치에 올랐다.
21세기 한국 독립예술영화에서 여성주의 서사와 여성 창작자 활약은 특기할 만하다. 영화계에선 너무 당연한지라 역편향, 역차별이라는 볼멘 푸념이 나올 정도다. 물론 미투 운동이나 페미니즘 확산 같은 사회적 변화와 밀접하게 연동한 변화다. 그런 경향이 근래 여러 요인으로 정체기에 들어선 건 아니냐는 걱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자기만의 세계에 고립되거나 주장을 답습한다는 비판이 늘어났다. 부당한 편견도 있지만, 요즘 독립예술영화를 주도하는 해당 경향이 놓인 이런 평판은 영화판 전체에 심각한 위기가 아닐 수 없다.
감독은 분위기를 무겁게 받아들였다. 기존의 작품 세계를 정련하는 것과 함께, 현실 사회와 영화계의 예민한 쟁점에 작가로서 발언하려 했다. 물론 쉽지 않다. 하지만 박찬욱, 봉준호가 자기만의 성취가 아니라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듯, 윤가은 또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책무를 감수하려 했다. 고독한 수행은 개별 영화를 넘어 사회에 던지는 고언이자 영화 동료들을 향한 선언문으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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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의 주인> 스틸 이미지 |
| ⓒ 바른손이앤에이 |
자신만의 세계를 찾는 건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다양한 생각과 태도를 지닌 이들이 서로 단절하거나 절멸에 이를 때까지 싸울 게 아니라면, 결국 만나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 자기 세계로 침잠은 종종 영영 가라앉고 만다. 현재 영화는 물론 대중문호 전반에서 여성 서사가 노출하는 부분적 징후를 지켜보는 건 안타깝고 속상한 일이다. 애초 의도와 도전이 정당하고 선했기 때문에 더 그렇다. 하지만 그렇기에 한 번 굳어진 습관은 쉽게 바뀌기 힘들다.
감독은 복잡한 반성에 도전한다. 어떻게 자신은 물론 허우적대는 동료들을 구할 수 있을까? 서로 적대하고 불신하며 극단적 대립에 처한 우리 사회 갈등을 응시하며, 영화감독은 어떤 식으로 대안을 내놓을 수 있을까? 고양이 목에 방울 다는 모험을 감수하며 해답을 제시한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세계 안에서 더불어 살아야 한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는 것투성이에 사방에 위험 가득해도 말이다. 말은 쉽지만 실행은 힘든 과업이다.
영화 속에서 두 번의 화산 폭발을 목격했다. 처음은 다소 빨리 찾아왔다. 일상에서 흔하지만, 거의 완전히 갇힌 공간에서 주인공이 마음껏 참아온 울분을 분출하는 순간이다. 바로 그때 '주인의 세계'는 극점에 달한다. 이 장면만으로 충분히 수작 반열에 오를 만하다. 하지만 대체 벌써 이걸 보여주면 한참 남은 분량은 어쩌나 걱정이 밀려왔다.
하지만 차곡차곡 쌓아둔 화력을 미련 없이 쏟아내듯 놀라운 두 번째 폭발이 일어난다. 이번엔 아까와는 확 다르다. 누구나 목마르게 기다렸지만, 감히 풀지 못한 매듭이 일거에 스르륵 풀린다. 쾌감이자 깨달음이 동시에 밀려온다. 영화를 눈으로 확인할 이들만이 구할 수 있는 체험은 여기에서 정점에 달한다. 우리가 공동으로 노력해야 할 지향, 사회와 영화가 공히 매진할 과업이 한방에 정리된다. 희망과 믿음의 가녀린 싹이 얼어붙은 땅을 뚫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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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의 주인> 스틸 이미지 |
| ⓒ 바른손이앤에이 |
주인공이 닿은 곳에 정답은 없다. 그들은 방향을 선택했지만, 그 앞에는 여전히 가시밭길이 즐비하다.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관객이 직면할 온갖 사건사고처럼, 영화는 대략 갈등이 해소되는 순간까지도 화면 안과 밖 통틀어 불길한 기운을 해소하지 않는다. 세상은 늘 그래왔음을 직시하라는 현자의 태도다. 그게 두렵다면 자기만의 요새에 숨을 수밖에 없지만, 그런 삶은 불가능하다.
주인공은 가면과 갑옷을 벗고 세계로 나오려 한다. 그래야 가라앉지 않을 수 있다. 자력으로 앞으로 닥칠 온갖 수난을 견뎌야 한다. 그러나 냉혹한 세상에서도 의지를 꺾지 않는다면, 서로에게 쉼터가, 위로가, 용기가 되어줄 누군가를 찾을 수 있다는, 우리는 각자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줄 수 있다는 믿음만은 놓지 않는다. 그렇게 '주인'은 '세계'와 접속한다. 그리고 윤가은의 이름은 '제2의 봉준호와 박찬욱'을 넘어 다음 세대 상징으로 등극한다. 장담할 수 있다. 내기해도 좋다. 의심이 가면 극장에서 확인하라.
<작품정보>
The World of Love
2025|한국|드라마
2925,10.22. 개봉|119분|15세 관람가
감독 윤가은
출연 서수빈, 장혜진
제작 세모시, 볼미디어
배급 바른손이앤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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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의 주인> 포스터 이미지 |
| ⓒ 바른손이앤에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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