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사지 보고가요" 자부심 차오르게 한 어르신의 한마디

나일영 2025. 10. 21.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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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문화 보전 중요성 일깨운 이한영차문화원과 월남사지

[나일영 기자]

 백운동원림과 주변 사찰을 중심으로 천년 차 산지였던 성전면 월남리의 월출산 남쪽 기슭에 1981년 10만 여평의 설록다원이 조성됐다.
ⓒ (사)사람길걷기협회
지난 13일 오전 10시, '이한영차문화원' 앞에서 걷기를 출발한다. 해가 보이지 않는 흐린 날씨에 공기가 신선해 걷기엔 가장 좋은 날씨다. 갇힌 도시를 벗어나 순간 이동한 듯 월출산 아래 서 있으니 마음도 날아갈 것 같다. 이날은 강진 끝자락부터 영암 영보 들판까지 걸어갈 예정이다. 우리 국토와 역사, 이 땅에 어린 삶의 향기를 맡기 위해 도로가 아닌 사람길로 걷는 약 20km의 여정이다.

출발지인 '이한영차문화원'과 백운동 지역은 우리나라 차의 역사를 이어 온 소중한 곳이다. 이곳에서 국내 최초의 녹차 제품인 백운옥판차를 만든 다부 이한영 선생이 1868년 태어났다. 백운차실 뒤엔 강진군이 2010년 복원한 이한영 생가가 있다.

월출산 정상 바로 아래 남쪽 자락에 감싸여 더 없는 풍광을 자랑하는 이 지역에 지금은 광대한 설록다원이 자리하고 있다. 옛부터 월출산 주변의 여러 사찰을 중심으로 차나무가 재배됐는데, 이곳 백운동은 고려시대부터 천년의 차 생산지였다.

강진의 차 만드는 기술, 이렇게 이어져왔다

그 연원이 이어져 조선 말기 우리나라 차문화가 대중적으로 다시 부활할 수 있었던 산실이 되었다. 근처의 국가명승 백운동원림(고려시대 백운사 터)에서 2006년 차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 서적인 '동다기'(이덕리 저, 1785년 경) 필사본이 발견된 것은 이를 방증한다.

동다기 필사본을 쓴, 각별한 다인(茶人)이었던 백운동원림 5대 동주 이시헌은 강진에 유배 왔던 다산 정약용의 제자이다. 신라 시대부터 고려 시대에 걸쳐 널리 사랑받은 우리나라의 차 문화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억불정책과 함께 쇠퇴한 것을 다시 일으킨 이가 다산이다. 다산의 제자인 초의선사가 오늘날 다성으로 추앙받게 된 것도, 강진에서 국내 최초의 녹차 제품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다산에게서 비롯됐다.

다산은 해배돼 강진을 떠날 때 다산학당을 구성했던 제자들에게 차를 만들어 마시며 신의를 지켜나가도록 '다신계茶信契'를 만들었다. 다신계를 통해 제자들은 1년간 공부한 결과와 함께 스승 다산에게 해마다 차를 만들어 보내기로 약속했다. 이 다신계는 강진에 차 만드는 기술이 이어져 온 결정적 원인이 됐다.
▲ 이한영차문화원 백운차실과 이한영생가, 이한영차문화연구소가 자리한 이한영차문화원이 지금도 우리차의 전통을 잇고 있다.
ⓒ (사)사람길걷기협회
다산이 완성한 차는 '구증구포'와 '삼증삼쇄'의 떡차로 중국의 보이차에 대응한 혁신적 제다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산으로부터 떡차 만드는 법을 세밀히 전수 받은 제자 이시헌은 이 약속을 평생 지켰고, 이흠을 거쳐 대를 이어 이 약속을 지켜온 사람이 이한영이다.

우리차의 계보를 잇고 있던 이한영에게 일제 강점기는 새로운 극복과 도전의 과제를 주었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차가 일본 차로 둔갑하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우리 전통차임을 강조하기 위해 월출산 옥판봉의 백운동에서 딴 차로 만들었다는 뜻의 백운옥판차로 이름 지었다.

우리 전통차의 계보를 잇는 다인을 통해 '독립의 차'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곳은 재배 조건으로나 굳게 뿌리내려온 차 문화로나 우리 전통차의 계보를 잇는 곳이다. 일부 포털사이트 지도에 펜션은 다 표시되면서, 우리나라 전통차의 계보를 잇는 이처럼 중요한 이한영 생가가 표시가 안 되어 있다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 월남사지 월출산 남쪽 아래 평지에 고려시대 진각국사에 의해 창건된 월남사가 있었지만 임진왜란 때 불에 타 폐찰된 것으로 추정된다. 1만 여평의 광대한 터가 월남사의 당시 규모를 짐작케 한다.
ⓒ (사)사람길걷기협회
거대 월남사가 갑자기 폐찰된 이유, 그 안타까움 달랜 보물 2점

출발하자마자 백운차실 인근 원림사지를 지난다. 월출산 아래 평지에 끝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장장 1만여 평에 달하는 사지가 초록 들판으로 펼쳐지고 있다. 비록 터만 남았지만 광대한 규모가 놀랍다.

원림사는 고려시대 진각국사(1178~1234)에 의해 창건됐다. 지금은 보물 제313호인 진각국사비와 보물 제298호인 원각사지 삼층석탑만 드넓은 사지에 횡그러니 남아 있다. 월남사지 삼층석탑은 원래 금당의 중심에 크기가 같은 두 개의 탑을 배치했던 통일 신라 후기 형식을 갖춘 석탑이었다. 석탑의 모양은 국보 제9호 '정림사지 5층석탑'과 유사한 조적식으로 백제의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다. 통일신라와 백제의 석탑 형식과 양식을 이어받은 고려 말기에 창건된 월남사의 가치가 매우 큰 이유이다.

그러나 이 빛나는 유산인 월남사는 임진왜란 때 갑자기 폐찰됐다. 인근 무위사의 사적기에 임진왜란 때 주변의 절이 모두 불타 사라졌다는 기록에 비춰 월남사도 이때 불에 타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313호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 (사)사람길걷기협회
남아 있는 국가 보물 2점의 유물이 안타까움을 달래준다. 진각국사비는 800년 세월에도 귀부의 강렬한 생동감과 균형미가 그대로 살아있다. 비신의 상단부가 절단 멸실돼 많이 아쉽지만, 숱한 풍파를 견뎌냈을 세월의 무게가 전해온다.

삼층석탑은 초록으로 덮인 사지를 배경으로 홀로 서서 월남사의 위용을 대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높이(8.4m)로도 정림사지 5층석탑(8.33m)보다 크거나 비슷할 만큼 웅장한 데다 미학적 진화의 결과인지 절제된 우아함과 세련미가 돋보인다. 화강암 재질의 최하부 기단저석은 무게가 무려 8.5톤으로 국내 석탑 중 단일부재로는 최대 규모다.

우리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의 일단을 직접 보며 출발부터 한껏 들떴다. 누릿재를 향해 월남사지를 돌아나가는 길가 잔디밭에 마을 어르신들이 일하던 중 쉬고 계시다가 우리를 보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월남사지 보고 가요."

마을 어르신들에게도 월남사지는 말로 다 못할 크나큰 자부심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보고 왔습니다."

우리도 같은 자부심으로 공감대가 형성됐다. 마을 어르신과 우리, 그리고 한국인 모두에게 우리 문화유산은 공통의 자부심을 안겨 준다.
 보물 제313호 월남사지 삼층석탑
ⓒ (사)사람길걷기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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