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겹 쓰나미' 덮친 포항 제철업계 "한숨 넘어 죽을 맛" [장세정 논설위원이 간다]

장세정 2025. 10. 21.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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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사 갈림길에 선 포항은 지금


장세정 논설위원
#1. 추석 연휴 전후로 두 차례 방문한 경북 포항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포항 제철산업이 호황이던 시절엔 주말이면 사람들의 발길에 치일 정도로 인파가 몰렸던 구도심 죽도시장과 중앙상가 일대는 을씨년스러울 정도였다. 중앙상가 유리 벽에는 임차인을 찾는 '상가 임대' '점포 임대' 전단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1978년 9월 추석을 앞두고 포스코(포항제철소)는 3기 공장 종합 준공 일정에 맞추기 위해 성묘 미루기, 성묘 빨리 다녀오기 등 추석 휴가 반납 캠페인을 벌였다. 당시엔 일손이 크게 부족할 정도로 포항이 호황을 누렸지만, 이번 추석 연휴를 앞두고 철강 산업에 몰아닥친 다중 복합 위기 영향으로 고용자 수가 급감하고 있다. 격세지감이다. [PARK1538 포스코역사박물관]
사람들이 넘쳐났던 경북 포항 죽도시장은 추석 연휴 이후 분위기가 썰렁했다. 대구를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관광 버스를 타고 몰려 와서 수산물을 사갔으나 포항 철강산업 경기가 침체되면서 타격을 받고 있다. 장세정 기자
임동현(54) 중앙상가상인회 회장은 "대로변 공실률이 30%가 넘고 뒷골목은 60%나 된다. 대로변 상가 소유자가 자기 건물에서 장사하는데도 알바 인건비조차 제때 못 주는 형편이다. 6·25전쟁 이후 가장 어려워 여기 상인들은 요즘 죽지 못해 살고 있다"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포항의 철강 4사가 납부하는 법인지방소득세 수입이 급감하면서 포항시 재정에도 비상이 걸렸다. 2022년 967억원에서 지난해엔 154억으로 84.1% 급감했다.

중앙상가 공실률 60%, 지방세 급감
#2. 포항 시내를 흐르는 형산강 하구의 포항국가산업단지에 입주한 포스코 포항제철소. 대형 트럭들로 분주해야 할 도로가 한산했다. 포스코 1제강공장의 1고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1973년 6월 9일 국내에서 처음 쇳물을 생산하며 대한민국 철강산업 발전사에서 상징적인 역할을 했으나 2021년 12월 멈췄다. 48년 6개월 만이었다. 고로에서 잿빛 연기가 뿜어져 나오지 않아 맑은 동해 하늘이 오히려 짠했다.

「 중국 덤핑에 미국·EU 관세 폭탄
전기료·탄소세·건설 침체 악재

노후 철강 생산설비 잇따라 폐쇄
일자리 줄어 지역 상권에 직격탄

동국제강·MS 파이프 기술 혁신
포스코는 수소환원제철에 사활

포스코 포항제철소는 1고로가 있던 1제강공장이 지난해 7월 폐쇄됐고, 1선재공장도 지난해 11월 폐쇄됐다. 포항제철소뿐 아니라 인근 현대제철은 2공장 가동을 지난해 11월 중단했고, 1공장 중기사업부는 지난 6월 매각했다. 잇따른 공장 폐쇄는 포항의 일자리 시장에 직격탄이 됐다. 철강 제조업 분야의 고용자 수는 지난 7월 기준 2만 7700명으로, 지난해 11월보다 1000여명이 감소했다. 중앙상가 골목이 텅 빈 이유를 알 듯했다.

대한민국 제조업 중심인 경북 포항은 철강 산업에 몰아닥친 다중 복합 위기로 생사의 갈림길에 섰다. 영일만에 밀려드는 겹겹의 파도 너머로 포항국가산업단지에 입주한 포스코 포항제철소가 보인다. 장세정 기자

미국 철강산업의 메카였던 피츠버그와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 디트로이트 일대는 제조업 붕괴로 대량 실업 사태가 생기면서 '러스트 벨트(Rust belt)'가 됐다. 구조조정 위기에 내몰린 석유화학 기업들이 밀집한 전남 여수 종합석유화학공업기지와 마찬가지로 지금 포항 제철산업단지에서도 미국의 러스트 벨트와 비슷한 악몽의 그림자가 스멀스멀 어른거린다.

중국과 미국에 낀 샌드위치 신세로
철강산업에 위기는 언제나 있었지만, 지금은 다중복합 위기에 직면한 상황이다. 오대양에서 포항 앞바다 쪽으로 '오겹 쓰나미'기 동시에 몰아닥쳤다는 표현이 맞겠다. 첫째, 글로벌 시장에 철강의 공급 과잉과 중국의 저가 덤핑 공세다. 지난해 전 세계적으로 18억 t의 철강이 생산됐지만, 1억 t가량의 공급 과잉이 발생했고 상황은 더 나빠지고 있다. 지난해 10억 t을 생산한 중국은 약 1억 t을 해외로 내보냈다. 건설용 후판과 열연강판 등 범용 제품 위주로 중국산 철강재가 한국 시장으로 몰려오면서 수입량은 2020년 대비 지난해 62% 폭증했다. 후판 가격은 한국산이 t당 90만원(지난 2월 기준)인데 중국산은 78만원으로 20%나 싸다. 정부가 중국산 후판에 지난 2월 38%의 반덤핑 관세를 부과했지만, 중국산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둘째,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가 촉발한 신보호무역주의 관세 폭탄이다. 미국은 철강 품목세 50%를 부과했다. 한국무역협회 등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미국으로 수출되던 열연강판 가격은 t당 758달러였으나 트럼프 2기 정부 출범 이후 50% 관세(t당 405달러)가 부과되면서 t당 1215달러로 치솟았다. 그만큼 수출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지난 8월 철강 제품의 대미 수출량은 33%나 급감했다. 추석 연휴엔 유럽연합(EU)이 철강 수입 관세를 25%에서 50%로 전격 인상해 시름을 더했다. 중국의 저가 덤핑 수출과 미국발 관세 폭탄만으로도 포항은 미·중 사이에 샌드위치 신세가 된 대한민국 경제의 위기 현주소를 압축해 보여준다.

노란봉투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지난 8월 민주노총과 진보당 관계자 등이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환영 기자회견을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기업들은 노란봉투법에 강하게 반대해왔다.[뉴스1]

셋째, 산업용 전기료의 급격한 인상 조치다. 2021년 kWh당 105.5원이던 산업용 전기료는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를 거치면서 지난해 185.5원으로, 3년 만에 무려 75.8% 인상됐다. 전력 다소비 업종인 철강산업에는 원가 부담으로 직결됐다. 넷째, 국내 건설업 불황에 따른 자재 수요 감소다. 건설업의 철근 수요는 2020년 연간 1040만 t이었으나 코로나19 사태를 지나면서 원자재 가격과 인건비 급등으로 지난해엔 약 750만 t까지 떨어졌다. 다섯째, 탄소중립 정책과 규제 강화의 영향이다. 올해부터 글로벌 탄소 규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됐다. 미국은 철강산업 관련 탄소 규제인 청정경쟁법(CCA)을 지난 1월 시행했고, 유럽연합(EU)은 탄소세 부과를 위한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내년 1월 시행한다.

중대재해법·노란봉투법도 기업에 타격
최소한 오겹 쓰나미가 동시에 몰아치면서 국내 철강 산업 생태계는 붕괴할 지경이다. 국내외 시장 잠식→수익성 악화→고용 감소→연구개발(R&D)과 설비 투자 위축→산업 경쟁력 약화라는 악순환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한국의 전체 철강 생산량은 2018년을 정점(약 9500만t)을 찍더니 2024년에는 8100만t 수준으로 급감했다. 건설·조선용 철강제품 생산 기업 제일테크노스를 경영하는 나주영(70) 포항 상공회의소 회장은 "중국 덤핑과 미국 관세 등의 영향에다 국내에서는 중대재해법과 노란봉투법까지 겹쳐 기업 환경이 극도로 악화했다"며 "포항제철소의 연간 전기요금이 4000억원이 넘는데 정부는 급등한 전기 요금을 인하하거나 적어도 동결은 해줘야 한다"고 촉구했다.

경북 포항시에 자리한 포스코 포항제철소 정문에 자원은 유한, 창의는 무한이란 문구가 내걸려 있다. 기후위기 대책 차원에서 탄소 규제가 대대적으로 강화되자 포스코는 수소환원제철 상용 기술 개발에 사활을 걸고 있다. 장세정 기자

정부 지원이 절실하지만, 생존을 위해서는 기업들의 자구 노력도 필수다. 포스코의 경우 국가기간산업이라 저렴한 외국인 근로자를 쓸 수 없다 보니 일본 신일철의 평균 임금이 포스코의 70%일 정도로 경쟁력이 낮다는 지적이 나온다. 포스코 홀딩스 관계자는 "철강은 자동차·조선·가전·건설 등 거의 모든 산업에 필수적이고 국가안보에 직결되기 때문에 전통산업이지만 절대 포기할 수 없다"며 "탄소 규제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탄소 배출이 제로인 최첨단 수소환원제철 기술 개발에 사활을 걸고 있다"고 말했다. 포스코는 2030년부터 수소환원제철 생산을 위한 세계 최초의 상용기술 개발을 위해 연내에 실증 설비를 착공할 예정이다
현대제철 포항공장 입구에 가니 '철, 그 이상의 가치 창조'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동국제강은 후판을 용접한 대형 형강(D-mega beam)을 개발해 기존 H형강보다 강재 소모량을 줄이는 친환경 기술 혁신으로 주목받고 있다. 자동차용 강관 전문 생산기업인 MS파이프 박력(36) 부사장은 "중국의 덤핑 공세가 점진적으로 시장을 잠식한다면 미국의 50% 관세는 거래처와 매출이 하루아침에 끊기게 하는 즉각적인 충격"이라면서도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과 협력을 바탕으로 기술 진입 장벽이 높은 틈새시장을 공략해 위기를 기회로 바꾸려 노력중"이라고 말했다.

이강덕 포항시장은 지난 9월 초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 백악관과 의회 앞에서 철강 관세를 철폐하라며 1인 시위를 벌였다. [사진 포항시]

이강덕 포항시장, 백악관 1인 시위도
포항 철강업계에 따르면 지난 8월 25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철강 관세 인하는 안건에도 못 올라갔는데, 이는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무역대표부(USTR)가 철강산업을 국가안보 차원에서 보호하려는 의지가 워낙 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강덕 포항시장은 지난 9월 초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 백악관과 의회 앞에서 이례적으로 1인 시위를 벌였다. 이 시장은 "외국산 제품이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고 판단해 트럼프 대통령이 무역확장법 232조에 따라 철강 관세 50%를 부과했다. 그러나 미국의 우호적 동맹인 한국산 철강이 미국 안보를 위협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 시장은 "여야 의원 108명이 지난 8월 발의한 'K-스틸법(철강산업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특별법)'의 조속한 국회 통과가 시급하다"고 촉구했다. 친환경 디지털 공정 전환, 기술혁신 거점 지정, 공급망 안정화, 전력 요금 인하 등 정책 특례 등을 담은 법이다.

박정희·박태준의 열정과 리더십
지금은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생사의 갈림길에 섰지만, 포항은 1970년대부터 승승장구하며 '산업의 쌀'을 공급해왔다. 2021년 세워진 포스코역사박물관에 가면 어촌 항을 철강산업 기지로 탈바꿈시킨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 포철 초대 사장의 열정과 분투의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1965년 한·일 협정으로 마련된 대일청구권자금 일부를 제철소 건설에 투입하면서 박 사장은 "조상의 핏값으로 짓는 제철공장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겠다"며 독려했다. 이런 결기로 1970년 4월 착공한 포스코 첫 용광로에서 1973년 6월 9일 최초의 쇳물 생산에 극적으로 성공했다.
'해가 지지 않는다'던 대영제국이었지만 철강·조선 등 핵심 제조업의 경쟁력을 잃으면서 제국의 영광도 저물었다. 미국과 일본도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나라 안팎의 규제로 지금 '대한민국 산업의 심장'인 포항은 숨통을 죄는 듯한 생존 위기에 직면했다. 고 박태준 명예회장이 외쳤던 필사즉생(必死則生)의 결기와 리더십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1970년 4월 1일 포항종합제철소 착공식에 참석한 당시 박태준 사장, 박정희 대통령, 김학렬 부총리가 착공 버튼을 누르고 있다. [PARK 1538, 포스코역사박물관]
포항제철소 착공 8주년을 기념해 1978년 4월 1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쓴 휘호(철강은 국력)가 포항 PARK 1538 포스코역사박물관 입구에 대리석에 새겨져 있다. 장세정 기자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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