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남의 영화몽상] ‘허공에의 질주’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사이

이후남 2025. 10. 21.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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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남 문화선임기자

미국 영화에 범죄 조직이 나오는 건 흔한 일. 한데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혁명 조직이 등장하는 점부터 이채로운 영화다. 영화 초반 국경 지대의 군사 시설을 급습해 이민자들을 풀어주는 장면은 이 조직의 성격을 짐작하게 한다. 그중 퍼피디아(테야나 테일러)는 거침없는 매력을 발산하는 행동파 여성. 그와 연인이 된 폭탄전문가 밥(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은 퍼피디아가 붙잡히자, 갓난아기인 딸을 데리고 도망쳐 신분을 감춘 채 살아간다. 그리고 16년이 흐르고, 딸이 납치된다.

시드니 루멧 감독의 팬이라면 이쯤에서 ‘허공에의 질주’(1988)를 떠올릴 터. 요절한 배우 리버 피닉스의 출연작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연기한 소년은 부모가 1970년대 초 반전 운동을 벌이다 모종의 사건으로 FBI에 쫓기게 된 처지. 이들 가족은 주기적으로 신분과 사는 곳을 바꾸며 도피 생활을 해왔다. 한데 새로운 상황이 닥치고,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소년을 위해 가족은 새로운 선택을 한다. 남다른 가족의 이야기가 애틋하고 절절하게 다가왔던 거로 기억한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역시 절절한 가족 이야기인데, 이 신작이 뻗어가는 방향은 ‘허공에의 질주’와 대칭이라 해도 좋을 만큼 다르다. 그 하나는 블랙 코미디. 이를테면 왕년의 폭탄전문가 밥의 현재 일상은 술과 대마초에 절어 한심하기 짝이 없다. 딸이 납치된 직후, 밥이 암호를 떠올리지 못해 쩔쩔매는 장면은 그야말로 코미디다. 게다가 군인 록조(숀 펜)와 이 가족의 관계, 배후에 있는 백인 우월주의 비밀 조직의 면면 등이 현란한 전개로 엮이며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준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액션 블록버스터다. 영화 후반 지형지물을 활용한 자동차 추격 장면은 단연 일품. 2시간 41분이나 되는 상영시간만큼이나 재미가 크다.

개인적으로 가장 이채롭게 다가오는 건, 미국 언론의 뜨거운 반응이다. 벌써 ‘올해의 영화’로 꼽는 것은 물론 신랄한 풍자를 비롯한 영화의 면면을 지금의 미국, 트럼프 시대 미국에 대한 이야기로 바라보는 시각이 쏟아진다. 사실 우리에게는 익숙한 일이다. 실화를 다룬 현대극이든 조선 시대 배경 사극이든 한국 상업영화의 흥행은 종종 정치적, 사회적 흐름과 맞물려 해석되곤 했다. 그에 비하면 할리우드는 ‘영화는 영화일 뿐’이란 시각이 지배적이지 않나 했는데 그사이 미국도, 할리우드도 달라진 것 같다.

사족으로 덧붙이면 폴 토마스 앤더슨은 2002년 칸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이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받을 때, ‘펀치 드렁크 러브’로 나란히 감독상을 받았다. 이후 ‘데어 윌 비 블러드’와 ‘마스터’로 베를린과 베니스까지, 속칭 3대 영화제 감독상을 석권했다. 이런 그의 첫 블록버스터이니,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그저 오락 영화로만 보일 리는 없겠다.

이후남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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