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미터 달리기에 담긴 인생들... 우정 또한 사치였다
[김성호 기자]
나이를 먹게 되면 여러 가지를 잃는다. 그게 인생이야. 하지만 잃기 시작하면서 그 사실을 알게 돼. 인생은 1인치의 게임이란 걸 알게 될 거야. 풋볼도 그래. 인생이건 풋볼에서건 오차 범위는 매우 작아서 반걸음만 늦거나 빨라도 성공할 수 없고 반초만 늦거나 빨라도 잡을 수 없다. 모든 일에서 몇 인치가 문제야. 경기 중에 생기는 기회마다 매분, 매초마다 그래. 우리는 그 인치를 위해 싸워야 돼! (중략) 내가 인생을 더 살려고 하는 건 아직 그 인치를 위해 싸우고 죽을 각오가 돼 있기 때문이다. 그게 인생이기 때문이다!
영화 <애니 기븐 선데이> 중 토니 다마토(알 파치노 분)의 연설
스포츠를 그저 게임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스포츠 경기에 이기거나 패하거나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사는 이는 살고 죽는 이는 죽는다. 전쟁이 멈추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는다. 연인, 친구, 부모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스포츠와는 상관없이 될 대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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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 미터. 스틸컷 |
| ⓒ 미디어캐슬 |
좋은 스포츠 영화는 스포츠 안에 깃든 게임 이상의 면모를 볼 줄 안다. 그 안에 담긴 집념, 꿈, 열망, 절망, 좌절, 슬픔, 극복, 희로애락과 그 이상의 것들을 이야기한다. 이달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100 미터.>를 보기 드문 작품이라 소개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토가시는 빠른 아이다. 일대에서 가장 빨라 벌써부터 소문이 자자하다. 지역 신기록을 모조리 경신하는 이 아이의 미래를 두고 학교, 도내, 나아가 나라 전체의 보물이 되리란 기대가 쏟아진다. 누구와 뛰든 압도적 1위만 하는 토가시의 주력은 천부적 재능이란 말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다.
토가시의 학교에 한 아이가 전학을 온다. 코미야란 이름의 소년으로, 토가시는 바로 전날 그를 길에서 보았었다. 그때 코미야는 달리고 있었다. 토가시가 이전엔 본 적 없는 방식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당장이라도 엎어질 듯 뜀박질하던 코미야의 속도는, 그러나 토가시의 기준이 아니라도 턱없이 느리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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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 미터. 스틸컷 |
| ⓒ 미디어캐슬 |
<100 미터.>는 육상만화다. 그중에서도 단거리의 꽃인 100미터 달리기를 다룬다. 토가시와 코미야가 처음 만난 어린 시절에서 시작한 만화는 이내 고등학교 동아리로 건너가 도 대회에서 꿈을 펼치려는 선수들의 화려한 한 때로 건너간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점프. 이번엔 토가시와 코미야 모두 어느덧 일본 육상 실업 선수가 되어있다. 매 순간의 상황이 이전과는 전혀 다르다. 토가시는 매 시즌을 앞두고 재계약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기대만큼 기록이 꾸준히 늘지 않아서라고 했다. 반면 코미야는 절정의 기량을 가진 주목받는 신예가 되어 있다.
<100 미터.> 가운데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토가시는 단거리에 분명한 재능을 가진 어린 선수였다. 중학교에서 본격적으로 뛰었으나 기대만큼 기록이 단축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다. 마침내 육상을 포기하려던 어느 날인가. 고등학교에서 우연히 찾아온 계기가 그로 하여금 다시 달리도록 이끈다. 그가 고등학교에서 만난 이들이 있다.
부원 부족으로 폐부 위기에 놓인 육상부에 이름만 빌려줬다는 니가미 선배. 그는 한 때 일본 학생육상 최고의 기대주였다. 국가대표였던 아버지의 자질을 물려받아 차기 국가대표감이라 불렸던 그가 어느 순간 기대만큼 성적을 내지 못한 건 그저 노력의 부재 때문은 아닌 것이다. 그는 끝내 육상을 포기하고 방 안에 틀어박혀 아무렇게나 살아가고 있다. 토가시와의 만남은 그에게 다시 한 번 달리고 싶다는 마음을 품도록 한다. 트랙 위로 돌아와 전의 기록엔 댈 수 없다지만 어찌됐든 저의 최선과 경주하는 그의 모습이 영화 허리즈음에서 인상적으로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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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 미터. 스틸컷 |
| ⓒ 미디어캐슬 |
영화 중후반부, 그러니까 토가시가 성인이 되었을 시점의 이야기 가운데 이 세계 최강의 실력자들이 몇 등장한다. 일본 신기록 보유자 자이츠, 그에게 늘 조금씩 미치지 못하는 만년 2인자 카이도, 그리고 신성 코미야다. 최고 수준에서 경쟁하는 이들 곁에서 토가시는 그저 그런 선수일 뿐이다. 어릴 적 제법 주목을 받았다곤 하지만, 그와 같은 선수는 이미 차고 넘치는 것이다.
어느 종목이나 마찬가지일 테다. 처음 시작할 땐 수두룩한 이들이 한 단계 한 단계를 넘어서며 우수수 떨어지고 최고 수준에 이르는 건 지극히 소수일 뿐이다. 프로에 진입하는 것조차 상위 1-2%라 하지 않던가. 토가시의 현재는 어쩌면 수많은 문턱을 건넌 자랑스런 결과일 것이지만, 앞선 이의 등판을 보며 제 한계를 느끼는 초라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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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 미터. 포스터 |
| ⓒ 미디어캐슬 |
모두가 모두의 어려움을 각자의 방식으로 대면한다. 일본을 넘어 세계수준을 넘보았던 괴물 자이츠도 기록이 점차 떨어지는 모습이다. 단 한 순간도 그를 넘어서지 못했던 카이도는 또 저만의 달리는 이유를 지켜내고 있다. 모든 걸 육상에 쏟아 붓는 코미야는 또 어떠한가. 단 한 순간이라도 영예를 얻을 수만 있다면, 그는 어떤 대가도 치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그러했으니까.
빠른 이나 빠르지 않은 이나 빨라지고 있는 이나 느려지고 있는 이나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달리기와 대면한다. 고작 십여 초면 끝나버리는 이 짧은 경기에서 이토록 긴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작가가 있다는 사실이 대단하다. 이와이사와 켄지의 애니메이션은 <지. -지구의 운동에 대하여->로 주목받은 일본의 신성 만화가 우오토의 장편 데뷔작을 원작으로 한다. 철학적 깊이가 엿보이는 대사와 캐릭터, 구성으로 빠르게 주목받은 그의 진가가 <100 미터.> 안에 그대로 녹아 있다.
그저 달리기 만화가 아니다. 그저 스포츠 콘텐츠가 아니다. 그저 청춘이나 우정을 다룬 흔한 이야기가 아니다. 100미터 달리기라는 종목에 모든 것을 내거는 인간의 이야기다. 꿈을 향해 매진해 본 이라면, 제 재능에 무너지고, 제 한계에 대응하고, 때로는 저보다 나은 이를 질시하고, 그 질투조차 극복해본 적 있는 이라면, 공감하고 감탄하며 매혹될 만한 이야기다. 그리하여 나는 <100 미터.>를 좋은 작품이라 여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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