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사이클’ 공식이 달라졌네 [HBM이 몰고온 메모리 반도체 호황]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들썩인다. 장기 호황을 의미하는 ‘슈퍼사이클’ 기대감이 커지면서다. 2000년대 이후 메모리 반도체 슈퍼사이클은 크게 3번 찾아왔다. ① 노트북 수요 증가에 힘입은 2000년대 초중반 ② 모바일 기기 확산이 본격화한 2010년대 초반 ③ 스마트폰 교체 수요와 가상자산 채굴에 힘입은 2010년대 중후반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슈퍼사이클이 과거와 분명한 ‘구조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입을 모은다. 과거에는 소비자 변덕에 좌우되는 ‘롤러코스터’ 형태였다면 현재는 인공지능(AI) 패권을 잡기 위한 빅테크 경쟁이 핵심이다. AI 시장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향후 몇 년간 슈퍼사이클이 지속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동희 SK증권 애널리스트는 “현재 AI 시장은 크게 떨어질 우려보다 크게 오를 가능성에 대비해야 할 시점”이라며 “이를 고려하면 반도체는 공급자 우위 사이클 장기화가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변동성 시달린 메모리 3사
앞선 3번의 반도체 슈퍼사이클 핵심 동인(driving force)은 소비재였다. 최종 소비재의 대중화나 교체 주기에 맞춰 슈퍼사이클이 도래했다. 먼저 2000년대 초중반은 PC 보급 확대와 인터넷 개막이 주도했다. 개인용 PC가 자리를 잡으며 D램 수요를 유인했다. 2010년대 초반 역시 마찬가지다. 스마트폰 혁명과 맞물려 슈퍼사이클이 시작됐다. 세트 제조사의 생산량 확대가 메모리 반도체 호황으로 이어졌다.
2017~2018년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데이터센터 증설이라는 인프라 수요가 일부 등장했지만 슈퍼사이클을 이끈 건 스마트폰 교체 수요와 태블릿 등 소비재 시장 확대와 가상자산 채굴 수요였다. 2018년 하반기 스마트폰 시장 성장세가 재차 둔화하고 가상자산 가격 폭락까지 겹치자 슈퍼사이클도 막을 내렸다.
소비재 중심 슈퍼사이클은 명확한 한계를 보였다. 극심한 변동성이다. 시장 흥망성쇠가 최종 소비자 구매 행태에 따라 결정되는 탓이다. 일례로 2010년대 초반 슈퍼사이클을 살펴보자. 소비자들의 피처폰 → 스마트폰 교체 수요 확대를 확인한 세트 제조사는 공급 물량 경쟁을 펼쳤다. 메모리 반도체 업계는 공격적인 설비투자(CAPEX)에 나섰다. 문제는 업종 특성상 리드 타임(주문일과 인도일 간 간극)이 길다는 점이다. 각종 장비를 받는 데만 2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메모리 반도체 업계에서는 호황이 지속될 것이라 보고 설비투자를 늘렸지만 수요 예측은 빗나갔다. 공급 물량을 확대하고 보니 스마트폰 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였다. 비싼 가격에 부담을 느낀 소비자의 교체 주기도 예상보다 길어졌다. 증설로 늘어난 물량은 곧 악성 재고로 이어졌다. 재고를 털어내려는 ‘치킨 게임’이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슈퍼사이클은 공급 시차 → 공급 과잉 → 치킨 게임 → 반도체 가격 급락·감산 악순환 구조로 막을 내렸다.
주문량 맞춰 설비투자 통제
공급자 우위 환경 조성돼
반면 지금의 슈퍼사이클은 이전과 다르다. 소비재가 아닌 AI를 둘러싼 빅테크 패권 경쟁이 핵심 동인이다. AI 인프라 확대를 위해 빅테크 투자가 늘면서 AI 칩 수요가 폭증했다. 자연스레 AI 칩 필수 부품인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도 고공행진이다. AI 패권 경쟁으로 HBM이 슈퍼사이클 중심에 섰다.
이 과정에서 ‘공급자 주도’ 환경이 갖춰졌다. HBM 특성 때문이다. HBM은 범용 D램과 달리, 고객사 요구에 맞춰 제공하는 주문형 반도체다. 쉽게 말해 과거 슈퍼사이클은 미리 생산라인을 지어놓고 주문을 기다리는 형태였다면, 현재는 주문이 들어와야 생산라인을 돌리는 구조다. 과거 사이클 때는 공급 단계별 정보 왜곡 탓에 수요 변동성이 컸다면, 주문·수주형 산업에서는 수요 가시성이 높다. 메모리 반도체 업체 입장에서는 수요를 넘어서는 비효율적 설비투자를 하지 않아도 된다. 같은 전략은 타이트하게 관리되는 재고 상태에서 엿볼 수 있다.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3분기 말 기준 세계 D램 제조 업체의 평균 재고는 3.3주로 역대 최저치다. 2017~2018년 반도체 슈퍼사이클 당시 평균 재고(3~4주)보다 낮다. 업체별로 살펴보면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의 재고는 각각 2주에 불과하다. 삼성전자는 6주 정도로 알려졌다.
공급자 주도 환경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메모리 반도체 업체가 설비투자 절제 전략을 취하는 와중에 HBM 수요는 급증하고 있어서다. 채민숙 한국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브로드컴이 최근 실적 발표 중 언급한 100억달러 규모 주문형 반도체(ASIC) 신규 고객사는 오픈AI로 추정된다”며 “이는 기존 HBM 수요 집계 시 반영되지 않은 신규 수요다. 엔비디아 컴퓨터그래픽장치(GPU) 수요와 HBM 확대가 지속되는 한편, ASIC에서도 HBM 수요 전망이 기존 대비 상향 조정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동희 애널리스트는 “반도체 업체가 투자를 절제하고 재고까지 떨어진데다 (HBM 수요 급증으로) 병목 현상까지 겹치는 상황”이라며 “장기간 공급자가 시장 주도권을 쥘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외 HBM 수요 증가로 인한 범용 D램 공급 부족도 슈퍼사이클 요인이다. 제한된 생산능력에서 HBM 라인을 늘리다 보니 범용 D램 공급 부족이 발생 중이다. 채민숙 애널리스트는 “2026년은 범용 D램 역시 수급 불균형에 따른 공급 부족으로 가격이 상승할 것”이라며 “일반 서버 출하량과 D램 채용량 급증으로 범용 반도체 수요가 늘고 있지만 공급 증가는 제한적일 것이다. 수요가 늘고 공급이 정체하면 평균 단가는 오를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상대적으로 업황 변동성이 크지 않다는 것도 과거 슈퍼사이클과 차이점이다. 현재 슈퍼사이클은 빅테크 생존과 직결되는 투자에 따른 결과다. AI 패러다임이 단기간 붕괴하지 않는다면 HBM 수요는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문남중 대신증권 애널리스트는 “과거 인터넷과 모바일 혁명 지속 기간은 각각 18년과 15년 정도”라며 “현재 3년 정도 된 AI 혁명 지속 기간을 감안하면 AI 버블을 논하는 건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빅테크 설비투자는 매년 늘고 있다. 메타는 지난 2분기 실적 설명회에서 연간 설비투자 전망치 하단을 기존 640억달러에서 660억달러로 높였다. 메타 최고재무책임자(CFO)인 수잔 리는 “지금은 AI 미래를 위해 본격 투자해야 할 시점이라고 판단한다”고 밝혔다. 구글 모회사 알파벳도 설비투자 전망치를 상향했다. 알파벳은 지난 2분기 실적 발표 자리에서 연간 설비투자 전망치를 750억달러에서 850억달러로 높였다.

삼성 ‘가격 정책’에 눈 쏠려
하지만 슈퍼사이클에도 변수는 있다. 2021년 사례처럼 돌발 변수에 발목 잡힐 수 있어서다. 당시 코로나19로 서버 수요가 확대돼 슈퍼사이클 분위기가 형성됐지만 전 세계적인 금리 인상과 엔데믹으로 6개월 ‘반짝 랠리’에 그쳤다.
지난 7월 골드만삭스는 2026년 ‘HBM 성장 속도 제동(HBM speed bump in 2026)’ 보고서를 내고 AI 칩 시장의 ① 구조적 문제로 인한 수요 증가폭 둔화 ② 삼성전자 공급망 진입으로 2026년 HBM 시장 공급 과잉이 예상된다고 밝혔다. 공급자 주도 환경이 흔들릴 수 있다는 의미다.
골드만삭스는 2026년 HBM 공급(39억8200만GB·기가바이트)이 수요(37억6400만GB)를 5% 이상 앞설 것으로 봤다. 핵심 근거는 엔비디아 컴퓨터그래픽장치(GPU)의 구조적 변화다. 골드만삭스는 차세대 GPU 루빈 아키텍처(R100)와 현재 블랙웰 아키텍처(B300) HBM 용량이 같다는 점을 지적했다. R100과 B300의 HBM 용량은 288GB로 동일하다. 적용되는 HBM 수도 8개로 변화가 없을 전망이다. 적용 제품만 HBM4와 HBM3E로 구분된다. 그동안 GPU 아키텍처 진화에 따라 HBM 탑재 용량과 개수가 늘어 수요가 자연 증가했다. 예를 들어 호퍼 아키텍처(H100·80GB)에서 B100(192GB)로 진화할 때는 용량 확대가 개수 증가로 이어져 GPU 수요가 동일해도 HBM 수요는 늘었다. 하지만 블랙웰 → 루빈 아키텍처 진화 국면에서는 자연 증가 효과를 누리지 못하는 구조다.
또 다른 변수는 삼성전자의 엔비디아 공급망 진입이다. 골드만삭스는 삼성전자가 엔비디아 공급망에 진입할 경우, 2026년 삼성전자의 HBM 공급 물량(용량 기준)이 2025년 대비 60% 이상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시장 예상보다 공급량이 더 크게 늘 것이란 판단이다. 골드만삭스는 엔비디아 역시 삼성전자 공급망 진입을 바라고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HBM 가격 인상률이 GPU 가격 인상률을 앞지르는 만큼 엔비디아가 가격을 낮추기 위해 추가적인 공급망을 확보하려는 유인은 충분하다는 논리다.
삼성전자 가격 정책에도 시선이 쏠린다. HBM 판도를 뒤집으려 ‘치킨 게임’ 카드를 꺼내들 수 있다는 예상이다. HBM이 범용 D램과 마찬가지로 가격 전쟁 구도로 접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슈퍼사이클은 기대를 밑돌 가능성이 높다. 가격 협상력을 온전히 엔비디아 등 고객사에 넘겨야 하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는 마진을 남기지 않는 수준까지 고려할 수 있다”며 “경영진 차원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의지를 표명했다고 들었다”고 설명했다.
증권가에서는 공격적인 가격 정책은 사실상 예고된 수순이라고 본다. 한동희 애널리스트는 “삼성전자는 HBM 점유율을 확보하는 동시에 경쟁 업체의 수익성 훼손이 동반돼야 경쟁사와 격차를 좁힐 수 있다”며 “공격적인 HBM 가격 정책을 통한 가격 하락 유도의 명분”이라고 말했다. 채민숙 애널리스트도 “2026년 HBM 평균 단가는 2025년보다 하락할 것”이라며 삼성전자의 적극적인 가격 정책에 따른 경쟁 구도 변화와 HBM3E 판매 연장을 이유로 제시했다.
중국 반도체 굴기도 변수다. 공급 물량이 큰 폭으로 늘어 공급자 주도 환경이 흔들릴 수 있다. 최근 화웨이는 자체 개발 HBM ‘HiBL 1.0’을 발표하며 내년 1분기 출시 예정인 AI 칩 ‘어센드(Ascend) 950PR’에 이를 탑재하겠다고 밝혔다. HiBL 1.0은 128GB 용량과 최대 1.6TB/s의 대역폭을 구현한다고 소개됐다. 업계는 현존 HBM3와 차세대 HBM4 사이 수준으로 보고 있다. 중국 1위 D램 기업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이미 HBM3 샘플 개발을 끝냈다. 2026년 양산을 시작해 2027년 HBM3E 양산까지 계획 중이다.
최정구 카운터포인트 책임연구원은 “중국은 CXMT를 중심으로 HBM3 개발을 추진하고 있지만 동작 속도와 발열 등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올해로 예상됐던 출하는 2026년 하반기 가능할 것”이라면서도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HBM 시장을 선도하겠지만 마이크론과 중국 물량 공세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최창원 기자 choi.changwo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30호 (2025.10.15~10.2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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