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서 만나는 전시회, 베일에 싸인 베르메르의 작품세계
김성호 평론가
네덜란드 제3의 도시 헤이그. 한국엔 고종이 만국평화회의에 일본의 무도한 침략을 규탄하기 위해 밀사를 파견한 사건 정도로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관광지로는 네덜란드 1,2위 도시인 암스테르담이나 로테르담에 비해 덜 유명한 이곳을 그러나 적잖은 한국인 관광객이 꾸준히 찾고 있단 사실이 자못 놀랍다. 그 주된 이유가 한 점의 그림이란 사실은 더욱 그렇다. 그 그림의 이름은 바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네덜란드의 행정수도 역할을 하는 도시로, 찾는 이 그리 많지 않은 이 곳의 손꼽히는 보물이 바로 이 그림이 되겠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서양화 중 하나라 해도 좋을 테다. 이 그림을 소재로 스칼렛 요한슨이 주연한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만들어져 널리 감상되기도 했던 터다. 덕택일까. 이 그림의 작가 요하네스 베르메르는 램브란트와 함께 네덜란드 회화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하며, 한국에서도 상식에 가까운 인지도를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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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르메르: 위대한 전시회 스틸컷 |
| ⓒ 영화사빅 |
그러나 그가 인기만큼 그 삶의 모양이 널리 알려졌느냐 하면 전혀 아니다. 작품만큼 살아간 삶의 궤적이 유명한 적잖은 화가들이 있는 반면, 베르메르에 대하여선 자식이 15명이나 됐다거나 하는 약간의 정보 외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생전 세계적 거장 반열에 들지 못한 탓으로, 공문서 외엔 그의 활동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는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올해 초 극영화와 다큐가 동시에 국내 개봉하고 한가람미술관에서 전시까지 열렸던 이탈리아 화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같은 이와의 차이라 하겠다.
<베르메르: 위대한 전시회>는 앞서 언급한 카라바조의 삶을 다룬 다큐 <카라바조. 영혼과 피>에 이어 또 한 편 찾아온 회화 다큐멘터리다. 데이비드 비커스태프가 감독한 96분 짜리 다큐는 베르메르의 삶에 더하여 그 작품이 변화하고 발전한 양상, 또 각 작품에 담긴 의미까지를 소개하는 한 편의 종합적 회화 다큐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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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르메르: 위대한 전시회 스틸컷 |
| ⓒ 영화사빅 |
색채, 또 빛을 잘 쓰는 화가라 알려진 베르메르다. 영화는 베르메르를 깊이 연구한 평자며 학자들을 카메라 앞에 세워 그 화풍의 특색과 그와 같은 특징이 발현된 이유를 알기 쉽게 설명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 베르메르의 그림에선 유독 그가 초점을 맞추는 대상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그 외엔 희미하게 그려지곤 한다. 그런데 그 이유가 그가 작품을 스케치할 때 활용한 도구, 카메라 옵스큐라의 영향이라는 이야기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현대 카메라의 전신이라고 알려진 물건으로, 어둡게 만든 박스 안에 작은 구멍을 뚫어두고 외부의 상이 빛을 타고 들어와 거꾸로 상이 맺히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카메라 옵스큐라를 통해 화가는 맺힌 상을 그대로 스케치하는 게 가능했는데, 베르메르가 그를 적극 활용한 대표적 화가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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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르메르: 위대한 전시회 스틸컷 |
| ⓒ 영화사빅 |
베르메르의 미술사적 의의로 이야기되는 또 다른 언급 또한 흥미롭다. 베르메르가 활동한 시기는 17세기 중엽으로, 소위 바로크(Baroque)라 불리는 새로운 미술 사조가 열리던 때였다. 이 시대 유럽에선 르네상스라 불린 종교 중심의 회화가 쇠퇴하고 세속적 소재를 적극 다루는 화가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가톨릭 교회의 면죄부와 마르틴 루터의 비판으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은 유럽 전역에서 가톨릭 교회가 구가하던 독보적 지위를 위협했다.
베르메르의 네덜란드도 그 여파로 독립전쟁을 거쳐 개신교 신자 중심의 공화국으로 거듭났다. 교회로부터 주문제작을 받는 기존의 방식이 더는 작동하지 않게 되자 화가들은 돈 있는 귀족과 상인에게 팔 수 있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종교화에서 일반 풍속화로 그림의 성격이 크게 옮겨간 배경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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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르메르: 위대한 전시회 포스터 |
| ⓒ 영화사빅 |
진위논란이 약간 일고 있으나 '프락세디스 성인 Saint Praxedis'과 같은 작품도 베르메르 작품세계를 잘 보여준다. 프락세디스 성인은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 심지어 교회 내부에도 얼마 알려지지 않은 생소한 이다. 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추존되긴 했으나 그녀가 언급되는 경우를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그녀는 2세기 교회가 탄압받던 로마에서 박해받던 그리스도 교인들을 돌보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순교자들이 처형을 당한 뒤 그 시체를 수습하거나 피를 모으는 일을 했다고도 전한다. 베르메르는 프락세디스 항아리에 헝겊을 짜 핏물을 떨어뜨리는 모습을 작품으로 그렸는데, 구태여 수많은 가톨릭 성인 가운데서 별 인지도 없는 그녀를 그렸던 이유가 남아 있지 않아 호기심을 자아낸다. 앞서 언급했듯 베르메르의 작품세계가 당대 교회와도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흥미로운 대목이다.
발전한 기술은 정보가 박약한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또 다른 수단으로써 주목된다. 엑스레이를 활용해 겉으로 드러나는 그림 아래를 들여다봄으로써 표면엔 드러나지 않는 진실을 캐어내는 것이다. 처음엔 그렸던 것이 나중에 덧칠돼 사라지기도 하고, 처음엔 그리지 않았던 것을 나중에 그려 넣기도 한다. 그를 역으로 해석하여 연구자들은 베르메르가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중시했던 것이나 꺼려했던 것을 추청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그림을 그저 평면적으로만 접하는 평범한 관객에게 이해의 지평을 넓히도록 자극한다.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작가가 고민하는 지점이 어떤 것인지 또한 알도록 한다.
한국에서 화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다룬 다큐, 소위 '비주얼 아트멘터리'가 점차 많은 관객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점이 이색적이다. 카라바조와 에드워드 호퍼, 안젤름 키퍼 등 시대도, 작품의 성격도 전혀 달리 하는 많은 작가들이 영화를 통하여 관객에게 보다 가깝게 다가선다. 대중의 기호와 괴리돼 있다는 오명을 받기도 하는 오늘의 미술 한편에선, 이처럼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서려는 노력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미술관 안에서만 만나는 도슨트가 아닌, 미술관을 벗어나 관객에게 찾아가는 영화로써 말이다. 그런 노력이라면 어찌 반기지 않을쏘냐.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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