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독에 빠져 사는 혁명가의 처절한 딸 구출기

고광일 2025. 10. 13.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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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고광일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마스터>에서 사이비종교 '코즈'의 창시자인 랭커스터(필립 세이 호프먼)는 실험대상이자 친구인 프레디(호아킨 피닉스)에게 포인트 찍기 게임을 제안한다. 먼 풍경에 있는 하나의 포인트를 찍은 뒤, 바이크를 타고 누가 빠르게 돌아오는지 겨루는 게 게임의 규칙이다. 랭커스터가 먼저 포인트를 찍고 돌아온다. 프레디의 차례. 그는 랭커스터와 반대 방향을 포인트 찍고 바이크에 오른다. 핸들을 꺾지 않는 프레디. 그대로 달려 랭커스터의 곁을 떠난다.

필모그라피를 살펴보면 폴 토머스 앤더슨은 포인트 찍기 게임 중인 랭커스터와 프레디를 반반 섞은 것처럼 느껴진다. 자신의 기존 작품에서 어떻게 하면 더 멀리 달아날 수 있을까가 유일한 고민인듯 반대방향의 포인트를 찍는다. 1억 3천만 달러가 들었다는 블록버스터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전작 <리코리쉬 피자>는 1970년대 LA를 배경으로 자유를 갈망하는 청년들의 지지부진한 사랑과 성장(혹은 횡보)를 그린 소품이다.

예시를 들자면 필모그라피를 모두 소개해야 하기에 <리코리쉬 피자>의 앞선 작품인 <팬텀 스레드>까지만 살펴본다면, 1950년대 런던에서 피학과 가학을 오가는 의상 디자이너의 지독한 사랑을 담아낸 절제된 시대극이다. 이런 식으로 한 세계의 지평선을 포인트로 찍은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멀리 내달리는 PTA의 자취를 따르다보면, 그가 하나의 세계에 빠져 영영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근심어린 걱정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밥의 혁명을 실패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원배틀애프터어나더
ⓒ 영화
토마스 핀천의 소설 <바인랜드>에서 영감을 얻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는 반정부단체 프렌치75에서 활동한 폭파 전문가 밥(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과 리더격인 퍼피디아(테야나 테일러)의 과거부터 시작해, 16년이 지나고 10대가 된 그들의 딸 윌라(체이스 인피니티)를 스티브 록조 대령(숀 펜)이 쫓으며 시작되는 이야기다. 록조는 과거의 잘못을 은폐하려 하고 밥의 아내이자 윌라의 어머니인 퍼피디아는 자취를 감췄다. 밥은 록조에게서 딸을 구하기 위해 옛 동료들에게 다시 연락하고 가라테 도장을 운영하는 세르지오(베니시오 델 토로)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과거를 지운 혁명가 밥과, 그를 끈질기게 쫓는 악당. 수십, 수백 번은 만들어졌을것 같은 도식적인 추격전을 새롭게 하는 건 PTA가 살짝 뒤튼 캐릭터다. 밥은 폭파 전문가로 활약했지만, 혁명에 대한 대의명분이나 확고한 사상적 기반보다는 대단한 일에 동참한다는 도파민에 절어 퍼피디아의 명령에 순순히 따른 것처럼 보인다. 딸이 태어나자, 혁명 전선에서 이탈하고 소시민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하며, 현재는 술과 약에 찌들어 변변한 직업도 없이 생활하는 기성세대로 표현된다.

윌라는 밥의 편집증적인 보호에 진절머리를 낸다. 밥은 윌라에게 외우도록 한 이상한 구호를 시시때때로 확인하고 도청 당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휴대전화도 개통해 주지 않는다. 예쁜 옷을 입고 학교 축제에 갈 때도 제대로 작동하는지 모를 이상한 수신기를 지참해야 한다. 은행을 털다가 붙잡힌 후에 동료들을 밀고한 대가로 형을 감면받은 뒤 증인 보호 프로그램 중에 도주한 엄마 퍼피디아를 혁명 영웅으로 알고 있는 건 어쩌면 사소한 착각에 불과하다.

밥과 윌라도 다면적인 캐릭터지만 록조 만큼은 아니다. 불법 이민자 수용소를 관리하는 군인으로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이라는 백인우월주의단체의 가입을 갈망하는 인종 차별자이지만 흑인 여성인 퍼피디아에게 이상하리만치 집착한다. 미행한 뒤 멀찌감치서 망원경으로 그녀를 관찰하고 폭탄테러를 방조하는 대가로 성적인 관계를 요구한다. 프렌치75를 소탕 후 증인보호 프로그램으로 면책시켜 준 뒤에는 말끔히 차려입은 뒤 꽃다발을 들고 그녀의 집까지 방문한다.

술독에 빠져 살며 분노하는 법마저 잊은 과거의 혁명가. 추적당하는 중에도 몰래 휴대전화를 소지하던 철없는 10대.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는 듯 보이지만 철저한 강약약강의 선택적 미친놈. 한순간의 실수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스릴러적인 긴장감을 조성하기에는 결격사유가 있는 주인공들 탓일까.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함께 달리는 차 한 대가 반가운 끝없는 고속도로, 대마초를 키우는 외진 산속의 수녀회처럼 어딘가 느슨한 공간 속에서 나른한 도피와 추격전이 펼쳐진다.
 원배틀애프터어나더
ⓒ 영화
독특한 캐릭터만 이상한 이야기에 동참하지는 않는다. 현재에서 고작 16년 전인 프렌치75의 활동 시점도 곱씹을수록 의문을 자아낸다. 2009년이면 공화당 조지 W. 부시의 집권도 끝나고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가 백악관에 들어갈 시점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불거진 월가 점령 시위면 몰라도 불법 이민자에 대한 강경 진압에 군대가 투입되려면 15년은 이르다. 게다가 총기 난사라면 모를까 9·11 이후 미국 본토에서 폭탄을 이용한 대규모 테러 단체가 활동하는 걸 상상하기는 어렵다.

영화가 무조건 현실을 반영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치밀한 세계관 구성에 정통하던 PTA에게서 다소 의아한 선택이다. 이런 의문은 제목을 곱씹으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One Battle After Another"는 1969년, 혁명단체 웨더 언더그라운드가 발표한 성명에서 딴 것으로 '끝없는 전쟁'을 의미한다. 불법 이민자와 인종차별 문제 등 동시대 미국의 현안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좁히기에 끝없는 전쟁이라는 표현이 갖는 부피가 크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는 무결점의 위인이나 치밀한 악의 세력이 아니라 모순과 결합으로 뭉친 캐릭터들이 각자의 욕망에 충실하게 혁명의 주체이자 반동으로 활약한다. 의도적으로 희석된 배경은 특정한 시대나 지역, 지도자의 정치 성향이나 사상이 문제가 아님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이런 설정들은 관객의 몰입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핸디캡일 수도 있지만 평범하고 복잡한 경계선의 선과 악인 탓에 동시에 현실로 받아들이기 수월한 장치로 기능하기도 한다.

관객들은 밥의 실패뿐인 여정에 동참하며 기이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밥은 록조의 추격에서 딸을 구출하기 위해 옛 동료들과 연락을 취하지만 중요한 암구어를 까먹어 집결지를 가는데 애를 먹는다. 세르지오가 마련한 탈출 루트에서 한 번은 체력 이슈로, 또 한 번은 차에서 맥주를 먹다가 경찰에게 들켜서 낙오된다. 기껏 잡은 록조 사살 기회에서는 스코프가 달린 저격용 총으로도 실패하고, 크리스마스 킬러의 추격은 예상도 못 한 채 윌라의 기지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상황에 도달한다.

하지만 감독은 '밥의 혁명을 실패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어쨌거나 밥은 인맥으로 집결지를 알아내는데, 동료들 사이에서 전설적인 영웅으로 칭송되고 있다는 점이 과거의 성취를 증명한다. 무엇보다 그는 16년간 홀로 윌라를 키워냈다. 카체이싱 끝에 마주한 언덕에서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윌라가 내뱉은 '당신 누구야!'라는 처절한 질문에 '너의 아빠야'라는 대답으로 지금까지 암기하라 강조한 비밀조직의 암구어를 대체한 사건은 혁명을 바라보는 시각의 혁명적 전환이다. 끝없는 전쟁을 끝내지는 못했어도 의지를 이을 다음 세대를 키워냈으니까.

잠시 멈추고 파도를 생각해
 원배틀애프터어나더
ⓒ 영화
2007년 <데어 윌 비 블러드>부터 함께한 라디오헤드(Radiohead)의 멤버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은 본작에서도 하나의 배경처럼 작동한다. 끊어질 듯 끝나지 않는 신경질적으로 계속되는 반복적인 선율은 16년간 이어지는 록조의 끈질긴 추격 같기도 하고, 겨우 숨통만 붙인 채 명맥을 유지하는 프렌치75 잔당의 생명력 같기도 하다. 누구의 배경음이 됐든 끝없는 전투에 참여한 이들의 진을 빼놓는다.

윌라 구출 작전이 뜻한 대로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도 세르지오는 '파도를 상상하라'고 말하며 밥을 진정시킨다. 파도를 상상하라는 건 무슨 의미일까. 파도는 멈추지 않는다. 파도를 멈출 방법은 끝없이 지구를 도는 달을 산산조각 내는 것 뿐.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처럼 끊어질 듯 잔잔해지는 순간도 있지만 모든 걸 집어삼킬 듯 집채만 한 해일로 변하기도 한다. 그럴 때는 빠르게 뚫고 가는 게 능사가 아니다. 가라앉지 않는 게 먼저다.

'언덕의 강(River of Hill)' 시퀀스는 횡으로 이루어진 커브가 아닌 종으로 연결된 파도로 넘실댄다. 가장 높은 파도에서 윌라는 멈추기를 택한다.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 구분하기 위해. 크리스마스 킬러 머스탱을 타고 질주한다. 록조 대령의 닷지 챌린저를 단번에 따라잡을 만큼 빨랐지만 멈출 줄은 몰랐다. 파도를 닮은 파란색 머스탱에서 튕겨 나온 그는 윌라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파도의 정점에서 목숨을 잃는다.

밥은 오래된 닛산 차를 훔쳐탔다. 속도를 낼 수 없었던 밥은 그 덕분에 멈출 수 있었다. 혁명이란 이름의 난폭한 물살에서는 잠시 물러났지만, 바닥까지 가라앉지는 않았던 그의 16년의 삶처럼. 멈추기를 선택한 밥과 윌라가 갖고 있던 각각의 무전기를 통해 퍼진 음악이 하나로 합쳐진다. 목숨을 걸어도 된다고 수없이 말해온 잔잔한 파도 같은 선율이다. 아버지를 밥이라고 불러온 윌라의 입에서 처음으로 아빠(Dad)라는 말이 터진다. 우리의 삶에도 전쟁은 끝이 없겠지만 이제 관객과 밥은 파도를 상상하라는 센세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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