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달' 품은 APEC 도시, 모든 왕조가 떠받든 까닭
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함월산이 흘려보낸 알천(북천)이 명활산성을 휘감아 돈다. 마립간 시대, 고구려의 간섭을 견제하고자 부득이 이 산성에 웅거해야만 했다. 불가피했으나 대대로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소지 마립간이 결단을 내린다. 신라의 뿌리인 월성으로 환궁이다.
삼년산성 등 나라 곳곳에 성을 쌓는다. 왕성인 서라벌 도시체계도 혁신적으로 변혁한다. 방리제다.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진 태종무열왕에 이르러 격자형 가로망을 갖춘 대도시로 거듭난다. 삼국유사는 '전성기에 서울 안 호수가 17만 8936호에 1360방이요, 주위가 55리였다'라 기록한다. 호수보다는 대체로 18만 인구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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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성도(皇城圖) 삼국통일 전후의 전성기 서라벌을 그린 황성도. 월성과 대릉원, 황룡사가 랜드마크(Land Mark)처럼 우뚝하다. 방리제(坊里制)로 구획한 격자형 가로망이 정연하다. 삼국유사가 대도시 서라벌의 위용을 묘사했다. |
| ⓒ 경주시청 |
월성 북쪽의 너른 개활지에 방(坊)과 리(里)를 정해진 규격에 따라 격자형으로 구획한다. 해가 떨어지는 북서쪽에 죽은 자들의 세계를 두었다. 지금의 대릉원이다. 남산엔 나라를 지키고 중생을 계도 하겠다는 의지로 불국토를 세웠다.
살아있는 모든 건 명멸하는 법이던가? 이토록 찬란한 서라벌이 통일하여 300년을 넘기지 못한다. 칼날보다 더 비정한 역사다. 927년 견훤의 말발굽에 왕이 목숨을 잃는다. 그로부터 8년 후인 935년 천년 사직이 종말을 고한다. 어느 시인의 한탄처럼 천년 도읍의 시간이 꿈처럼 흘러가 버렸다. 그랬어도 신라가 쌓아 온 천년은, 그로부터 다시 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빛을 발하고 있으니 마냥 한탄할 일만은 아니다. 세상사 새옹지마 아니던가.
신라의 돌이 쌓은 읍성
견훤과 달리 유화적인 왕건에게 사실상 나라를 들어 바친다.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고려도 서라벌을 홀대하지 않는다. 동경이라 부르며 서경인 평양과 함께 무척 비중 있는 도시로 대우한다.
서라벌을 대신할 이름 '경주'도 고려가 지었다. 신라 마지막 경순왕은 경주를 식읍 삼아 978년까지 천수를 누린다. 고려가 경주를 어떤 위계로 대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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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시가지 남측 옛 서라벌이다. 바로 앞에 대릉원이, 그 왼편으로 첨성대와 월성이 보인다. 멀리 남산이 우뚝하다. 고려 때 읍성을 쌓으며 이곳을 침범하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
| ⓒ 경주시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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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향일문과 경주읍성 2018년 복원된 경주읍성의 동쪽 성벽과 동문. 옹성 안의 동문이 고려 말 건립 당시 얻은 동문의 이름, 향일문이란 현판을 달고 있다. |
| ⓒ 이영천 |
이 골격이 조선 후기까지 유지된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읍성을 축조하며, 신라의 여러 폐 사찰에서 석탑과 석재를 가져다 사용했나 보다. 석탑 부재로 추정되는 돌들이 성벽 곳곳에 아직도 박혀있다.
조선의 경주읍성
융성했던 서라벌 유적이 언제 희미해졌는지 불분명하다. 다만, 고려를 지나오는 500년 동안 시나브로 지워졌으리란 추정이 타당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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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읍성 모형 경주 동헌의 내아이던, 현 경주문화원에 재현된 경주읍성 모형. 남문에서 바라 본 조선시대 경주읍성의 관청과 객사 등 곳곳이 모형으로 잘 재현되어 있다. |
| ⓒ 이영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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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경전 터 북성로의 계림초등학교 가는 길 옆 공터에 자리한 집경전 터 비석. 조선 왕조는 경주에 태조 어진을 보관하는 집경전을 두어 왕조의 이념을 이식하려 애썼다. |
| ⓒ 이영천 |
임진왜란 때 함락되어 훼철을 피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비격진천뢰로 왜적을 물리쳐, 성을 되찾은 건 무척 이례적인 사건이다. 군사는 물론 백성의 노력과 희생이 이룬 쾌거다. 경주의 중요성이 재확인되는 역사의 실제다. 17세기 중반 복원이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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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부(지승(地乘)_부분) 1770년대~1780년대 사이 그려진 옛 지도 지승의 경주부. 네모난 읍성에 관청이 빼곡하다. 남문 밖에 우스꽝스럽게 그려진 첨성대가 보이고, 그 옆으로 '반월성과 석굴'을 표현하였다. 남문 바로 아래 '종각'에 성덕대왕신종을 걸어 시각을 알리는 종으로 사용했다. |
|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
도시 성쇠와 몸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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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1930년대) 남천과 북천 사이, 옛 서라벌이 사라져 휑한 논밭으로 남았다. 경주읍성의 윤곽이 그나마 남아있고,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철길(朝鐵慶東線)이 남서쪽에서 올라와 남동쪽으로 빠지고 있다. |
| ⓒ 국토정보플랫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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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읍성(동벽) 2018년 복원 후 더는 복원이 막힌 경주읍성 동남쪽 끄트머리 성벽. 성벽으로 쓰인 돌들을 같이 전시해, 성벽에 쓰인 옛 서라벌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
| ⓒ 이영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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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읍성(동벽과 동문) 시민들의 노력으로 2018년 복원된 경주읍성 동벽과 동문(향일문). 이로써 영화를 누린 경주읍성의 옛 흔적을 되짚을 수 있게 되었다. 북벽의 복원도 시작되었다. 이들이 부디 경주 도시재생의 마중물이 되길 빌어 본다. |
| ⓒ 이영천 |
월성에서 꽃 피운 서라벌 돌들이, 고려의 공신으로 대접 받았다. 도호부로 변신이 읍성을 쌓았다. 조선은 왕조의 이상을 둘레 2.42km의 읍성에 이식하려 애썼다. 경주를 대우한 각 시대의 흔적이다.
노천역사박물관인 경주가 가야 할 길은 이미 정해져 있다. 최소한의 파헤침이어야 한다. 놓인 돌멩이 하나도 쉬이 옮기지 말아야 한다. 백척간두에 선 소지 마립간의 결단이다. 그 결단이 2000년의 빛으로 남았다. 로마에, 아테네에, 북경에, 경주가 앞서지 못할 게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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