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쩔 수가 없다' 관람 전에 원작을 먼저 본 이유
[강지영 기자]
* 주의! 이 글에는 영화 <어쩔 수가 없다>의 원작 <액스>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줄거리가 담겨 있습니다.
나는 지금껏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다. 살인을 하거나 누군가의 숨통을 끊어놓은 적이 없다는 얘기다.
소설 <액스>는 이 두 문장으로 시작한다. 문장 속의 '나'는 주인공 '버크'이다. <액스>의 저자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는 소설 전체를 버크의 독백으로 채웠다. 처음부터 죽음, 살인 등의 낱말이 나오는 것이 심상치가 않다. 암울하고 심각하고 무겁고 섬뜩하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다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주제는 무거우나 글투는 경쾌하고, 상황은 복잡하나 해결은 간단하다. 그것은 작가의 문체 내지는 필력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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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설 <액스>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AX)'는 '도끼' 또는 '정리해고'를 뜻한다. 도끼로 찍힌 자리에 피가 튀기는 모습이 자극적이어서 필자가 흑백처리하였다. 정리해고를 당하는 사람은 도끼로 찍히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느낄 수 있다. |
| ⓒ 오픈하우스 |
버크는 제지회사 해고 노동자다. 23년을 일해온 회사에서 뜻하지 않은 해고를 당한다. 1995년 10월, 버크가 일하고 있는 제지 회사를 캐나다의 계열사가 고스란히 흡수해 버렸다. 이 과정에서 여러 사람이 해고된다. 재취업의 기회가 줄어든다. 2년이 넘도록 재고용은 요원하다. 가정경제가 무너지고 가족들의 삶이 피폐해진다. 버크는 조급해진다. 자신이 가짜 회사를 지어내고 구인 광고를 내고 지원자를 모집한다. 이 아이디어가 신박하다. 수많은 지원자 중에서 자기보다 스펙이나 능력이 나아 보이는 사람을 추린다. 그 사람들만 죽이면 자기가 재고용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실행에 옮긴다.
버크가 한 사람을 사살한다. 단지 자신의 취업 경쟁자라는 이유만으로. 이어서 버크가 살인 계획을 세울 때마다 나는 어서 빨리 중단하기를 바랐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약자끼리 연대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건 너무나 나이브한 독자의 바람이었다. 결국 버크는 자신의 계획대로 여섯 번의 범행으로 일곱 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두 번째 범행에서는 계획에 없던 여자 한 명까지 살해하였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버크는 또 면접을 보러 갈 준비를 한다. 이번에는 꼭 될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왜냐하면 취업 경쟁자를 모두 제거했으므로.
이렇듯 <액스>는 처절하고 슬프다. 인간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이보다 더 처연한 이야기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주인공의 일처리 방식에 어처구니 없어 실소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취업 경쟁자를 죽이면 자신만이 취업해서 잘 살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단순하고 우매한 지 버크가 애처롭기까지 하다. 첫 번째 범행에서 '목표물'을 포착한 버크는 개처럼 할딱인다. 짐승처럼 반응하는 자신에게 넌더리를 낸다. 마지막 범행 현장에서, 목표물을 기다리던 버크는 잠이 온다. 이러면 안 돼, 잠들어버리면 큰일이다를 중얼대며 빙빙 맴돌기까지 한다.
버크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한다. 세상이 미쳐가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는 버크 자신도 미친 짓으로 저항하는 것뿐이라는 자기 합리화.
'나는 킬러가 아니다. 살인자가 아니다. 그랬던 적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무정하고, 냉혹하고, 영혼이 없는 킬러. 그건 내가 아니다. 지금 내가 벌이고 다니는 짓은 사건의 논리에 의해 강요된 것일 뿐이다. 주주들의 논리, 임원들의 논리, 시장의 논리, 노동력의 원리, 밀레니엄의 논리, 그리고 나 자신의 논리. 대안을 알려주면 살인을 멈출 수도 있다. 지금 내가 벌이는 짓은 끔찍하고, 까다롭고, 섬뜩하다. 하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p.162)
'어쩔 수가 없다'는 변명에도 불구하고 버크의 괴로움은 자신을 '괴물'로 여기게 한다. 멈추지 않는 괴물.
버크의 자기 합리화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미국을 휩쓸고 있는 대량 인원 삭감의 폭풍에 대해 공개적으로 입장을 표명한 모든 CEO들도 같은 아이디어를 내세운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내기 이 일을 하는 이유, 내 목적과 목표는 간단하다. 나는 내 가족을 잘 돌보고 싶다. 이 사회의 생산적인 구성원이 되고 싶다. 내가 가진 기술을 유용하게 써먹고 싶다. 납세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일을 해서 번 돈으로 떳떳하게 생활하고 싶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은 쉽지 않았지만 나는 결승점만 바라보고 달려왔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 CEO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미안한 마음을 전혀 가질 필요가 없다.' (pp. 325~326)
살인만 아니라면, 버크의 논리에도 일리는 있어 보인다. 읽다 보면 그의 논리에 휘말리게 되기도 한다. 이 소설은 강력한 흡인력이 있다. 그러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과연 그러한가.
이처럼 소설 <액스>는 대량해고를 당한 50대 나이의 한 남자가 어떻게 무너져 내리고 어떤 자기 합리화를 거쳐 어이없는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지를 상세히 보여준다. 사회비평 요소가 담겨 있고, 세태 풍자도 가득하다. 물론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이 가장 큰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건 고도의 서사 장치로 여기면 될 것 같다. 그가 보이는 극단의 광기는 버크의 총체적인 좌절을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대체로 인간은 자신과 직업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직업을 잃으면 자신의 모든 것을 잃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액스>의 옮긴이 말처럼,
"세상의 어떤 직업도 살인까지 불사해 가며 지켜야 할 가치는 없다."
우리나라의 고용불안도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고용불안은 대학입시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바로 취업이 잘되는 이공계 학과와 메디컬 학과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자연계 학과에 입학하고서도 메디컬 학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아 자연계 학과에서 인재를 뺏긴다는 인식이 발생한다고 한다.
특히 최상위권 학생이 의대 치대 한의대 약대에 몰려드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바로 직업 안정성과 고소득이 보장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동안 낮은 연봉으로 인기가 줄어들었던 공무원의 인기도 최근 3년간 다시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연봉이 올라서가 아니라 고용안정을 원하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젊은이의 다양한 꿈과 희망이 몇몇 학과나 직업군에 매몰되고, 그러다 보니 한정된 분야의 경쟁률만 높아진다. 취업이 되었다 해도 대부분의 직군에서 고용불안은 여전하다. 쏠림 현상을 방지하고 고르게 학문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고용안정은 필요하다.
소설 <액스>를 원작으로 한 영화 <어쩔 수가 없다>가 요즘 장안의 화제다. 해고노동자의 취업 분투기! 그것도 광기 어린 투쟁기! <어쩔 수가 없다>는 공간적 배경, 음악, 그리고 배우의 연기가 돋보인다. 감독은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날의 풍경을 스크린 가득 담았다. 이병헌, 염혜란, 이성민이 벌이는 난투극에 가수 조용필의 '고추잠자리' 노래가 울려 퍼진다. 선곡이 적절하다. '거사'를 마치고 귀가하는 주인공의 비애와 심란한 속내를 묘사하는 배경 음악, 가수 김창완의 노래 '그래 걷자'도 인상적이다.
소설 속 버크를 연기한 배우 이병헌의 연기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어리숙하면서도 치밀하고, 순진한 듯하면서도 섬뜩한 버크를 연기하는데 딱 맞는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로 영화를 보는 묘미를 만끽할 수 있다. 다만 영화와 소설을 둘 다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소설을 먼저 읽기를 권한다.
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도 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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