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옷 입고 줄섰다…추석 쇤 어르신 스트레스 푸는 곳

"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는 말이 틀리지 않아요. 추석에 복작복작해서 좋긴 하지만 힘도 드니까. "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인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낙원동 실버영화관. 서부극 마니아 신모(74·여)씨는 차례를 지낸 뒤 자녀를 일찌감치 집으로 돌려보내고 27년 지기와 1952년작 〈하이 눈〉영화를 보러 왔다. 신씨는 “명절에 자녀를 보면 당연히 좋지만 대화가 통하는 또래와 보내는 시간이 있어야 스트레스가 풀린다”며 웃었다.
이날 실버영화관에는 저렴한 가격으로 옛 영화를 보며 연휴를 즐기려는 어르신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함께 온 노부부나 이혼·사별로 홀로 영화관에 온 어르신 등 모두 영화 포스터를 보며 추억에 잠겼다. 서울 관악구에서 온 강모(85)씨는 “10년 전쯤 이혼해서 명절을 혼자 보냈는데 요 며칠은 비가 와서 집에 있다가 오늘 나왔다”고 말했다. 중절모에 회색 정장을 차려입은 한 노신사는 티켓 부스에서 2000원으로 1959년작 〈벤허〉 표를 구매하기도 했다.
총 270석의 극장에선 어르신 90여명이 자리에 앉아 영화 상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노인이 “이게 1952년도 영화인데 왕한테 시집간 여자(그레이스 켈리)가 주연 배우”라고 말하자 뒷좌석에 앉은 한 어르신 관객이 “영화 마니아시다”라며 거들었다. 영화관 직원 백모(82)씨는 “추석 당일 직후인 7~8일엔 거의 만석이었다”며 “명절에 자녀 눈치 보며 스트레스를 받느니 영화나 보시겠단 어르신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명절에 정치 얘기 꺼냈다 말다툼”

비슷한 시각 서울 영등포시장에 있는 ‘금마차콜라텍’ 스테이지에선 어르신 100여명이 모여 있었다. 이곳의 입장료는 2000원으로, 백발의 한 어르신이 빈틈 없이 붐비는 스테이지에서 ‘잔발’(신문지 한장 공간에서 추는 춤)을 선보였다. 성예진 금마차콜라텍 대표는 “평소 350~400명쯤 손님이 오시는데 오늘은 100명쯤 더 몰렸다”고 했다.
노란 댄스복을 입고 콜라텍을 찾은 이모(72·여)씨는 “지난 설 때 정치 얘기를 꺼냈다가 가족하고 말다툼을 했다”며 “이번 추석엔 괜히 분위기가 어색해질 것 같아 빨리 돌려보내고 춤이나 추러 왔다”고 말했다. 박모(75·여)씨도 “명절 음식 장만해서 아들, 딸에게 보낸 뒤 연이틀 여기에 왔다”며 “갈 데도 별로 없는데, 여기서 운동한 뒤 또래와 식사하면 스트레스 푸는 데 그만”이라고 강조했다.
추석 연휴 동안 아예 자녀와 함께하지 않은 어르신도 있다. 직장인 박모(37)씨는 “결혼 전 양가 부모님께서 ‘명절에 굳이 안 와도 된다. 우린 우리대로 놀 테니 너희들끼리 여행을 가든 알아서 하라’고 하셔서 이번 연휴도 아내와 보냈다”고 했다.
이옥근 고려대 고령사회연구원 미래전략센터장은 “과거와 달리 최근 노인 사이에선 자녀와 자신을 분리하고 나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인식이 지배적”이라며 “경제적으로도 자녀 의존도가 낮아 이런 경향이 가속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영근 기자 lee.youngke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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