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대신 아스팔트 까는 제주 산지천... 이 기억들도 함께 사라질까
[김명근, 강예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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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지천 하류를 따라 놓인 산지로의 사괴석이 8년 만에 철거되고 있다. 사진 왼쪽은 공사 전(4월), 오른쪽은 공사 뒤에 찍은 것이다. ‘차 없는 도로’를 기반으로 조성됐던 사괴석 도로는 각종 민원으로 아스팔트로 교체되고 있다. |
| ⓒ 제주특별자치도, 강예진 |
사괴석 도로는 민선 5기 우근민 도정이 추진한 '탐라문화광장' 조성사업의 일부였다. 구도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취지였고, 2011년부터 총 565억 원(국비 83억 원, 기금 156억 원, 지방비 326억 원)이 투자된 것으로 알려졌다. 우 지사는 2013년 "크루즈에서 내려 1km쯤 가면 제주도의 문화와 먹거리, 공연, 분수쇼, 쇼핑할 수 있도록 탐라문화광장과 주변을 연결하여 지역상권을 살리겠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지금 그 자랑거리가 헐리고 있다.
사괴석 도로는 광장과 시장, 주택가를 잇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주민과 여행자가 함께 걷던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괴석 도로가 걷히고 나면 각 장소들은 단절된다. 이제 그 사이를 메우는 건 아스팔트 도로 위 자동차다. 속도에 쫓기는 운전자들은 구도심의 역사와 문화, 이곳의 삶을 스쳐 지나갈 것이다. 지난 9월초, 사괴석이 모두 사라지기 전에 산지천을 걸으며 구도심의 기억을 마주해 봤다.
산지천에서 제주 역사를 읽다
산지천을 따라 걷다 보면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물길 옆 표지석이나 복원된 빨래터 하나에도 제주의 굴곡진 역사가 담겨 있다. 비릿한 바다내음 사이를 가로질러 퍼지는 귀뚜라미 울음도 오래 이어져 온 이곳 풍경의 구성요소이다.
김만덕 성공 신화도 산지천과 맞닿아 있다. 조선 후기, 그는 산지천 하류 건입포구에 객주를 열어 물산을 거래했다. 이곳은 탐라 시대부터 바다와 육지를 잇는 교역 중심지이자, 깨끗한 용천수 덕에 삶을 지탱하던 물길이다. 제주 행정 중심지였던 제주읍성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까지 더해지며, 산지천 일대는 늘 장터의 활기와 분주한 발걸음으로 가득했다.
일제강점기에 산지천은 큰 변화를 맞는다. 1920년대 세 차례 축항공사로 건입포구가 매립되고 물길은 직선으로 바뀌었다. 건입포는 '산지항'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제주는 대형 선박이 오가는 항구 도시로 변모했다. 세관과 공장, 조선소 등이 들어서며 도시는 근대적 풍경으로 바뀌었다. 매립된 포구는 70년이 지난 1990년대 후반에야 복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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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년대 산지천 빨래터 풍경. 산지천에는 용천수가 솟아 주민의 식수원이자 목욕, 빨래터로 쓰였다. 당시를 기억하는 노인들은 “빨래방망이 소리가 요란했다”고 회상했다. |
| ⓒ 제주특별자치도 |
특히 산지천 빨래터를 기억하는 노인들이 많다. 이곳은 주민들이 안부를 나누고, 함께 노동하며 추억을 쌓는 공동체 공간이었다. 아이들은 물가에서 고기를 잡으며 놀았고, 인근에는 '지들커(땔감) 시장'이 서기도 했다. 근처 동양극장에서 영화를 보던 시절을 떠올리는 이도 있다. 이처럼 경제와 생활, 문화가 한데 어우러진 무대가 바로 산지천이었다.
하지만 번영은 오래가지 못했다. 1980년대 행정 중심지가 신제주로 옮겨가고 물류 경로가 다양해지면서, 산지천은 점차 사람들 발길에서 멀어졌다. 온라인 소비가 확산하자 전통시장은 활기를 잃었고, 도시 인구는 하나둘 빠져나갔다. 북적이던 시절을 회상하는 이들의 말 끝에는 씁쓸한 아쉬움이 맴돈다.
"옛날엔 동문시장이 제주도 백화점이었는데, 지금은 주민이 많이 빠지니 아쉽죠." - 고석호 동문시장상인회 대표이사
지금 산지천은 구도심의 고민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빈집이 늘었고, 몇몇 상가만이 명맥을 잇고 있다. 한때 맑았던 물길은 생활폐수와 쓰레기로 오염돼 탁해졌다. 쇠퇴한 항구 도시에는 더 이상 활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는 여전히 사람들의 삶이 얽혀 있다. 번영을 기억하는 주민과 상인, 오갈 데 없는 성매매 여성, 광장 한 켠 노숙인까지. 산지천은 이제 도시 쇠퇴와 사회 문제를 함께 비추는 거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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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현장상담센터 <해냄> 보고서에 따르면, 산지천 성매매 여성 중 가장 젊은 이가 50대다. 반면 성구매자는 주로 20대 남성이다. |
| ⓒ 강예진 |
산지천 일대의 성매매 역사는 꽤 길다. 산지항은 일제강점기 제주도 전체 교역량의 1/3을 차지할 만큼 규모가 컸다. 사람과 물자가 몰리면서 자연스레 성매매업소인 '유곽'이 형성됐다. 1960~70년대 산업화 시기에는 '여관/여인숙' 형태로 성매매 집결지가 형성됐다. 당시 정부는 관광산업진흥법을 제정해 성산업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했고, 국제관광협회는 '요정과'를 설치해 기생관광을 관리했다.
성매매 산업은 도시 쇠퇴와 맞물리면서 빠르게 추락했다. 1990년대 전후 관광산업 정책을 기반으로 산지천 성매매 산업은 전성기를 맞았다. 2000년대 초반에는 인구 대비 성매매 알선 업소 비율이 전국 최고 수준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구도심 인구 유출과 주민 민원, 정부 단속이 겹치면서 성을 사는 이와 파는 이 모두 급격히 줄어들었다.
성매매 여성들이 더 깊숙한 음지로 숨어들고 있다. 지금 산지천은 더 이상 공식적인 '성매매 집결지'가 아니다. 성매매 집결지란 성매매 업소가 최소 10개 이상 밀집된 지역을 말하는데,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산지천은 2016년 실태조사 이후 명단에서 제외됐다. 성매매 여성들이 단속을 피해 다니며 간판 없는 가정집 등에서 성을 팔고 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하지만 성매매 여성들과 관련인들은 산지천을 쉽사리 떠나지 못한다. 사회로 돌아가는 길이 더 험난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어디서 받아주겠어요? 식당에 가면 설거지를 해야 하는데, 이제 다리가 아프고 나이도 많으니 그것조차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이곳에 남아 있는 거죠." - 나까이
주민들 사이에서도 성매매 여성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산지천 일대에서 슈퍼를 운영하는 한 상인은 "합리화할 수는 없지만, 무작정 없애버리는 게 더 나쁘다"고 말했다. 또다른 상인은 최근 경찰이 사복을 입고 손님인 척 가장해 단속한 것도 비판했다. 단속이 거세질수록 여성들은 더 깊은 음지로 숨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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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지천 노숙인들이 길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취재진의 방문에도 호탕하게 맞아주었고, 일부는 우리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등 존중을 잃지 않았다. |
| ⓒ 강예진 |
"이곳에서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나고, 정신적으로 도움 준 분들도 있어요. 그러나 언젠가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산지천을 떠나야겠지요." - 이성균 노숙인
밤이 찾아오면 산지천에는 노숙인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낮부터 술을 마셨는지 비틀거리는 이들도 눈에 띈다. 이들이 즐겨 찾는 술은 소주가 아닌 막걸리다. 천천히 취해 시간을 때우면서도 배를 채울 수 있어서다.
산지천 문화광장은 서울역처럼 노숙인들이 모이는 '집합 장소'다. 본래는 탑동광장에 머물던 이들이 문화광장이 조성된 뒤 대거 옮겨왔다. 한 노숙인은 "바다와 사람이 있어서 이곳에 온다"고 답했다. 술에 취한 이들은 광장 벤치에 누워 잠을 청하기도 했다.
산지천 노숙인들의 생활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노숙의 모습과는 다르다. 이들 대부분은 기초생활수급을 받으며 낮에는 숙소에서 지내고, 밤이 되면 광장에 모인다. 이성균씨는 "수급비는 매달 20일에 나온다"며 "이곳 사람들은 주거비를 제하고 남은 돈으로 돌아가며 술을 산다"고 말했다.
"우리가 노숙하는 이유요? 죽을 때까지 어떤 일자리가 있다면 모르겠는데, 지금은 없잖아요."
한 노숙인은 라면 하나를 반으로 나눠 하루 두 끼를 해결한다. 다른 노숙인은 "방에는 선풍기 밖에 없어 외롭다"며, "외출하면 시간도 보내고 밤에 시원하다"고 말했다.
주민들이 노숙인을 보는 시선은 엇갈린다. 한 시장 상인은 "노숙인들이 관광도시 이미지를 망친다"고 걱정했다. 자치경찰단에 따르면 올해 7월까지 산지천 일대에서 경범죄 70건과, 주취자 해산조치 263회가 발생했다. 반면 오랜 시간 그들과 마주해 온 주민들은 연민을 느끼고 술잔을 나누기도 한다.
산지천 광장은 노숙인의 삶을 붙드는 공간이다. 인근에서 노숙인들을 위해 밥차를 운영하는 김화정 목사(창성교회)는 "코로나19 전에는 80명 정도 모였지만, 집합 금지 명령 이후 절반 가까이 줄었다"고 전했다. 그 사이 일부는 더 음지로 숨어들었고, 어떤 이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노숙인들에게 광장은 삶의 마지막 보루였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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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천에 거품이 끼어 있다. 인근 코사마트 주인은 ”올해 유독 냄새가 심하다“며 비가 와 잔해물들이 씻겨 내려가길 기다리고 있다. |
| ⓒ 강예진 |
주차공간 부족 문제도 시급하다. 원도심의 주차 전쟁은 하루이틀 문제가 아니다. 산지천 주변에는 산짓물공영주차장과 북수구공영주차장 등이 있지만, 여전히 좁은 골목에 주차한 챠량들이 빼곡히 늘어서있다.
열악한 주차 환경을 개선하는 일은 원도심의 지속가능성과 직결된 문제이다. 국토교통부 자동차 등록통계에 따르면 6월말 현재 제주도의 1인당 자동차 보유대수는 1.07대로 전국에서 가장 높다. 제주시는 주차난 해소를 위해 관련 토론회를 열고, 주차 공간 부지를 매입하는 등의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산지천 일대의 문화 프로그램도 지속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산지천갤러리, 아라리오뮤지엄, 김만덕기념관, 아트스페이스 빈공간 등 역사와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있지만, 서로 연결성 없이 운영돼 큰 시너지를 내지 못하고 있다. 매년 마을 축제와, 플리마켓, 공연도 열리지만, 대부분 단발성에 그친다. 결국 전성기 시절의 산지천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에게 이곳은 여전히 낯선 공간으로 남는다. 백금아 작가는 "제주만의 문화콘텐츠가 없다면 지속성이 떨어질 것"이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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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입동 주민자치위원회가 마을 축제를 준비하고 있다. 위원들은 “건입동은 원도심 중에서도 자연과 역사 자원이 풍부한 마을”이라며 애정을 드러냈다. |
| ⓒ 강예진 |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는 산지천에 '고씨주택'을 운영하고 있다. 1930년대 일본식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이 주택은 안거리·밖거리·이문간 등 제주 전통의 공간 구성도 함께 지니고 있다. 센터는 이곳을 제주책방 개념의 주민 시설로 활용 중이다.
나 원장은 "도시재생사업에서 공공 기능은 주민과 가까이 있어야 한다"며, "제주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부터 도시재생이 시작된다"고 강조했다. 제주의 정체성을 삶의 공간에 담아내기 위해서는 '지역화'가 우선이라는 설명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주민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
"'예전엔 영했져(이렇게 했다)'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무엇을 개발하든, 이 공간이 과거에 어떤 의미를 지녔고 어떻게 활용돼 왔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래야 미래에 기억될 산지천의 모습을 그릴 수 있습니다." - 고경대 큰바다영갤러리 대표
고 대표는 구도심 일대의 '문화 클러스터'를 제안했다. 어린 시절부터 산지천에서 살아온 그는 하드웨어만 복원해 갖게 된 지금의 결과를 아쉬워했다. 복원된 빨래터, 공장터 등에 스토리를 담아두지 않으니 '영혼 없는 공간'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또한 구도심의 여러 전시관 운영이 개별화한 점을 지적했다. 그는 "하나의 클러스터 형식으로 서로 연결돼 문화 도시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여진 제주여성가족연구원 연구원은 "산지천의 도시재생은 '여성친화공간'으로 전환과 결합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여성친화공간은 크게 경제사회적 활동, 안전과 관리, 녹색환경, 참여와 공동체로 나뉜다. 그는 여성 일자리 창출과 접근성 보장, 성매매 피해 여성의 참여가 가능한 주거공동체 조성, 충분한 가로조명과 안전장치 설치, 수변 공간과 공원 확충 등을 구체적 방안으로 제시했다.
강두웅 건입동주민자치위원장은 "청년과 노인 세대를 아우르는 도시로 거듭났으면 한다"고 전했다. 현재 건입동에서는 신혼부부에게 마을 주택을 반값으로 임대해주고 있다. 강 위원장은 "올해 열릴 산지천 축제에도 청년들을 임원에 배치했다"며, "앞으로 건입동 청년들이 의미 있는 일을 해낼 것"이라 기대했다. 몇몇 동문시장 상인들은 구도심 상권 활성화를 위해 소비쿠폰 지급과 주기적인 문화행사 개최 등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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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다리 위에서, 산지천의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
| ⓒ 강예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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