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은 왜 '실직' 다룬 영화 만들었을까?

강찬호 2025. 10. 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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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어쩔수가없다>

[강찬호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추석 연휴에 화제의 영화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를 봤다.

사전에 소문이 난 영화인만큼 기대하고 봤다. 혹시나 너무 기대했다가 실망하면 어쩌지 하는 약간의 불안도 있었지만,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전 영화 <헤어진 결심>을 재밌게 봐서 나의 기대는 어쩔 수가 없었다. 박찬욱 감독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영화의 시작은 단란한 가정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누구나 꿈꾸는 그런 모습. 그 가정의 구성과 스토리는 도입부의 짧은 이야기 속에 담겨있다.

영화의 장면들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도입부에 비친 가족의 모습은 우리 시대 가장을 비추고, 가장인 만수(이병헌 분)에 기대는 가족들의 모습을 압축적으로 비춰야 한다. 그래서 가장의 어깨는 되도록 무거울 대로 무거워야 한다.

가장의 어깨
 영화 <어쩔수가없다> 스틸컷
ⓒ CJ ENM MOVIE
큰 집이 그렇고, 그 큰 집은 만수 아버지의 역사를 간직한다. 부인도 그렇다. 부인은 만수와 재혼한 사이다. 부인은 이혼한 전 남편 사이에 아들이 있다. 이혼한 부인과 전남편 사이의 아들을 함께 키울 만큼 부부의 사랑에 대한 만수의 어깨는 무겁다. 결혼 후 둘 사이 태어난 딸은 또 어떤가. 그 감춰진 재능이란. 그 재능을 살려야만 하는 가장의 어깨는 그렇게 무겁다.

가장을 가장답게 하는 것은 결국 그의 경제력이다. 사회에서 갖춰야 할 경쟁력이다. 돈을 버는 능력이 경제력이고 경쟁력이다. 그 능력은 대부분 직장을 통해 실현된다. 그런데 그 가장이 갑자기 위태로워진다. 여기까지 어떻게 달려왔는데. 영화는 지나온 시간에 그가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을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물론 가끔 보여주기는 한다. 나머지는 도입부의 행복함으로 대신한다. 그것이 영화이고, 감독의 역량이다. 최대한 행복한 모습. 그런데 무언가 그 속에 담긴 불안함 또는 불안정함.

이 영화는 노골적으로 '실업(실직)'을 이야기한다. '실업자'를 다룬다. 박찬욱 감독은 왜 이 시점에서 실업의 문제를 다룬 것일까. 실업은 늘 우리 사회에서 놓여 있는 문제이다. 주요한 경제지표가 실업률이다. 경제가 잘 돌아가면 실업률은 떨어진다. 내수가 잘 돈다. 국가 지도자는 실업률을 잘 관리하는 것에 사활을 건다. 적정한 수준에서 실업률을 관리하는 능력. 고용은 기업이 창출한다.

때론 대통령도 기업의 비유를 맞추는 이유 중 하나다. 국민들 배가 따뜻해야 권력은 안심할 수 있다. 간혹 기업이 억지를 부리기도 한다. 투자도 안 하고 고용도 줄인다. 골치 아픈 상황이다. 어쩔 수가 없이 기업이 하지 않으면 국가나 공공부문이 나서서 일자리를 창출해서 실업률을 낮춰야 한다. 국가와 기업 간에 줄다리기도 한다. 시장경제는 그런 것이다.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실업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해왔다. 실업과 임금은 양면성을 갖는다. 높은 임금을 주고 실업률도 낮으면 금상첨화다. 그런데 현실은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돈을 벌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에게 실업은 위협이다. 그래서 때로는 불리한 임금, 낮은 임금도 마다하지 않는다. 낮은 임금이 실업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실업과 낮은 임금이 자본주의를 떠받치고 일부 자본가나 자산가의 부를 증식시킨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원청기업과 하청기업 등 수많은 갑을구조에서 이런 착취구조는 만연한다.

이런 수탈 체계는 국가 간에도 이뤄지고 있다. 일자리를 찾아 떠도는 이들에게 저임금 수탈 구조는 실직 상태보다는 낫다. 그만큼 실직은 무서운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있는 이야기이고, 그래서 대부분 아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박찬욱 감독은 이 시점에서 실직의 문제를 다룬 것일까. 그것도 왜 이런 식으로 다룬 것일까. 처음에는 도입부에 이어 스릴러 같은 비현실적 영화 이야기로 넘어 가면서 약간 필름이 튀는 느낌을 받았다. '이거 너무 비약이 심한 것 아냐'하는 식으로. 영화를 보고 이런 의문이 남았다. 이런 의문을 품고 영화를 다시 살펴봤다. 영화가 왜 그렇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지, 왜 그런 영화를 만들어야만 했는지가 이해됐다.

다 아는 상투적인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은 영화가 될 수 없다. 다 아는 이야기라고 그냥 넘어간다면, 그 또한 외면이다. 다르게 이야기해야만 했고, 그래야만 어쩌면 우리는 현실을, 곧 다가올 미래를 '대비'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 아닐까. 어떤 각성, 자각을 일깨우려면 영화는 '자극적'이어야만 한다. 어쩔 수가 없다.

그만큼 감독은 어떤 절실함을 갖고 이 영화를 만든 것 아니었을까. 영화대로라면 이 영화는 '디스토피아'에 가깝다. 실직 디스토피아. 누군가는 변칙적으로 좁은 사다리를 올라탈 수도 있겠지만, 무고한 우리의 이웃들 상당수는 영화처럼 도륙될 수도 있겠구나. 영화 속 사건은 내 가족과 주변의 어떤 이들과의 관계를 다루지만, 감독은 더 큰 이야기를 말하고자 한다는 걸 관객이라면 다 알 것이다.

그 이야기는 영화의 끝부분에서 보여준다. 이미 시작된 미래에서 영화처럼 '어쩔 수가 없다'고 말 것인가. 정말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 오고 있는 것일까. 낙관할 것인가. 비관할 것인가. 종종 지인들과 이야기하지만 현재로서는 뾰족한 수가 없어 보인다. 아마도 다가올 미래의 실업은 과거와 현재와는 다르게 역대급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 역대급은 가보지도 않았고, 살아보지도 않았던 미래일지도 모르니까. 그렇다고 영화처럼 디스토피아로 가는 것을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어쩔 수가 없다고? 그건 아니니까, 영화가 우리에게 함께 하자고 말을 거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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