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과 역사의 자취가 서린 어승생악... 오르길 참 잘했다

전갑남 2025. 10. 8.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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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의 맹주' 어승생악에 올라 한라산 탐방을 대신하다

[전갑남 기자]

 국립공원 한라산 안에 있는 어승생악 정상. 해발 1169m이다.
ⓒ 전갑남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제주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섬이자 가장 높은 한라산이 있다. 우뚝 솟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산과 들,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360여 개의 오름을 안고 있다. 오름은 사람들 가까이서 몸을 낮추고 삶을 함께했다.

내 나이 70을 넘겼다. 한때는 지리산, 설악산, 속리산, 무등산 등 해발 1000m가 넘는 내로라하는 고지에 올랐는데, 이젠 힘이 부쳐 엄두가 나지 않는다. 제주에 왔으니 한라산 근처에라도 올라야 하지 않을까. 그래 지난 9월 12일 국립공원 한라산 안에 있는 어승생악을 찾았다.

어승생악은 한라산 어리목탐방안내소에서 출발한다. 정상까지 1.3km로 30분 남짓이면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다. 가벼운 등산을 원하는 탐방객들이 즐겨 찾는 오름이다.
 어리목탐방안내소에서 출발하는 어승생악 들머리.
ⓒ 전갑남
 길이 잘 닦여진 어승생악 탐방로. 1.3km로 30여 분이면 오를 수 있다.
ⓒ 전갑남
어승생악은 해발 고도가 1169m나 되지만, 한라산 자락에 붙어 있어 '꼬마한라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제주에 이름 있는 368개 오름 중 가장 큰 키를 자랑한다.

오늘 어승생악은 어떤 풍경으로 마음을 사로잡을까? 사뭇 기대된다. 탐방로 가까이에 조릿대가 무수히 자라고 있다.

"어릴 적 어머니가 밥 지을 때, 쌀에서 돌 골라내는 조리 재료 아냐?"
"맞아. 조릿대야."
 카 작은 한라산조릿대. 오르는 내내 조릿대가 깔려 있다.
ⓒ 전갑남
키 작은 조릿대가 숲에 쫙 깔렸다. 육지에서 본 것보다 더 작고 가장자리에 흰 무늬가 있다. 여기선 제주조릿대라 부른다. 혹독한 추위에도 잘 견디는 강인한 생명력을 자랑한다. 다른 식물의 생장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동물들의 소중한 보금자리가 되어주기도 한다.

역사 속 어승생악 이야기

조금 오르다 한라산 해설사를 만났다. 어승생악의 의미를 묻자 친절한 설명을 이어준다.

"어승생악(御乘生岳)이란 이름이 특이하죠.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해요. 제주말은 몽골어의 영향을 받았는데, 어승은 몽골어로 물, 생이는 좋다는 뜻이랍니다. 물이 좋은 오름이란 의미죠. 또 어승생이란 뜻 그대로 임금이 탔던 용마(龍馬)가 태어나 났다는 유례도 있어요."
 친절한 한라산 해설사가 어승생악 오름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 전갑남
어승생악에 대한 역사 속 이야기까지 들려준다.

"태평양전쟁 말기, 수세에 밀린 일본군이 제주도를 저항기지로 삼았대요. 그러면서 이곳에다 동굴 진지를 파 놓았어요. 이따 벙커도 볼 수 있으니 눈여겨보세요."

친절한 해설사는 생태계의 보고인 한라산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려주고 즐겁고 안전한 산행을 기원해준다.

물이 좋은 곳은 숲도 깊은 법! 어승생악은 곶자왈지대로 산세가 크고 고도가 높아 다양한 식생들이 조화를 이뤄 자라고 있다. 때죽나무, 산개벚지나무, 서어나무, 산딸나무 등 각자 이름표를 달아놓았다. 바위에 나무와 덩굴들이 서로 얽혀 살아가는 모습은 신비롭다. '누가 내 삶의 의지를 꺾을 수 있으랴!'라는 듯 나무뿌리의 아우성이 들리는 것 같다. 바위 속으로 파고 들어가 그들이 저장한 빗물을 먹고 살아가는 고귀한 생명이 익힌다.
 산길에 무수히 떨어진 산딸나무 열매. 산새들의 먹이가 되리라.
ⓒ 전갑남
산길에 빨간 열매가 무수히 떨어져 있다. 아내가 열매 하나를 주워 으깨어 향기를 맡아본다.

"아! 향기가 너무 좋네. 이거 먹어도 되나?"
"그럼. 달짝지근할걸!"
"대추씨 같이 딱딱한 게 몇 개 들었네."

산이 키워준 열매는 산새들의 먹이가 될 것이다. 녀석들이 먹고 똥을 싸놓으면 싹이 트고 숲은 또 생명을 이어가리라.

초록 가득한 울창한 숲에서 새들이 지저귄다. 잠시 귀 기울이며 쉬어간다. 흉내 내기도 어려운 기기묘묘한 노랫소리가 참 듣기 좋다. 새소리를 듣다 자꾸 하늘을 쳐다보게 된다. 멸종위기 종인 휘파람새가 한라산에 살고 있다는데, 지금 들려주는 게 그 녀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녀석도 우릴 보고 "당신은 누구지, 누구야!" 하는 것 같다.

겨드랑이를 파고드는 한 줄기 바람이 상쾌하다. 한라산 바람이라서 그런가? 더 시원한 것 같다. 숲으로 스며드는 햇살은 눈이 부시고, 새들도 나무들도 숲의 신선함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한라산을 같은 눈높이로 마주하다

아늑한 숲길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정상이 가까워진 걸까? 조금씩 시야가 훤해진다. 고지가 머지않았다.
 정상부에 있는 태평양전쟁말기 일본군이 저항기지로 삼았던 벙커(등록문화재 제307호).
ⓒ 전갑남
조금 전 설명을 들었던 동굴진지가 보인다. 어승생악에는 정상부에 2개의 벙커와 능선에 3개의 동굴진지가 남아있다. 그중 길이가 300m나 되는 동굴진지는 입구가 세 곳이고, 내부 공간은 격자형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벙커는 두꺼운 철근과 시멘트로 견고하게 구축하였고, 밖을 관측할 수 있는 총안(銃眼)이 사다리꼴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다. 태평양전쟁 말기, 수세에 몰린 일본군이 제주도를 저항기지로 삼았던 침략의 역사가 이곳에 있다니! 일제 침략의 아픈 역사를 보여준다.
지금부턴 발걸음이 더욱 빨라진다. 드디어 해발 1169m 어승생악! 정상 표지석이 반겨준다. 민족의 영산 한라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다. 1950m의 높은 한라산을 올려다보지 않고 마주한다. 눈높이가 거의 같다.
 어승생악 정산에서 바라본 제주 산하. 참 아름다웠다.
ⓒ 전갑남
 정상에서 바라본 제주시와 오름들.
ⓒ 전갑남
 구름에 가려있어 신비감을 더해주는 한라산 백록담. Y자형 계곡이 참 멋지다.
ⓒ 전갑남
한라산의 웅장한 자태가 감동으로 다가온다. 눈 앞에 펼쳐진 한라산의 Y자 계곡이 한 폭의 그림이다. 제주시도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발아래 둘레가 250m 분화구가 보인다. 고만고만한 오름들, 푸른 바다, 사람 사는 세상들이 어우러져 그림이 되어 펼쳐진다. 어느 순간 한라산을 감싼 구름이 계곡을 따라 미끄러지듯 내려온다. 도심에선 결코 볼 수 없는 몽환적 분위기에 잠시 숨이 멎는 기분이다.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걸까! 한라산에서 불어오는 걸까? 제주의 바람이 온몸을 감싼다.

정상 표지석에 여행자들은 차례차례 인증숏을 날린다. 나 여기 다녀왔다고! 어떤 여행자는 조용히 한라산을 향해 생각에 잠겨있다. 말이 필요 없다는 듯이!

제주 오름들은 화산이 빚고 시간이 다듬었다. 오름에 오르는 묘미는 산의 높이에 있지 않다. 오름은 낮은 키지만, 오르면서 느껴지는 것은 하늘만큼 높은 기지와 많은 것들을 들려준다.

우리나라 최고봉 한라산을 올라야만 제주의 자연을 아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름의 맹주'라는 어승생악에 올라 제주의 참맛을 느끼고 만끽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오늘도 살아있는 한라산은 찬란했다. 제주도가 더욱 좋아진다.
 어승생악의 정상.
ⓒ 전갑남

덧붙이는 글 | 지난 9월 10일(수)부터 9월 16(화)까지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이 기사는 인천in에도 동시 송고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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