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사랑까지도 지켜내는 도시, 강릉
이병록 2025. 10. 4. 16:27
이병록의 신대동여지도, 전설과 역사, 그리고 커피의 이야기
[이병록 기자]
강릉은 산과 바다 사이에 자리 잡은 독특한 고을이다. 서쪽에는 대관령이 장벽처럼 서 있고, 동쪽에는 수심 천 미터를 넘는 동해가 파도치며 부딪힌다. 육로는 남북으로 이어진 좁은 해안 길뿐이라, 마치 외길처럼 보이지만 이 길을 따라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이어져 왔다. 강릉에 유난히 사랑 이야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강릉 단오제의 뿌리다. 대관령에는 국사 성황이, 홍제동에는 국사 여성황이 모셔져 있다. 해마다 음력 4월 보름이면 대관령 국사 성황을 모셔 와 여성황과 만나게 한다. 단오가 끝날 때까지 이어지는 이 재회는 견우와 직녀의 만남을 떠올리게 한다. 하루에 한 번 만나는 별의 사랑보다 더 긴 시간을 함께하는 이 만남은, 강릉 단오제가 단순한 제례가 아니라 사랑을 기리는 축제로 자리 잡게 했다. 이 땅의 오래된 사랑 이야기가 공동체의 흥으로 살아난다.
신들의 사랑 이야기가 단오라면, 인간과 용의 이야기도 있다. 강릉 군수 순정공의 아내 수로부인을 탐낸 용이 부인을 바다로 끌고 갔다. 분노한 사람들은 "수로부인을 내놓지 않으면 용을 잡아먹겠다"라는 '해가'를 불러서 수로부인을 되찾았다. 신라 향가 '헌화가'는 사랑의 정서를 노래한다.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면 꽃을 꺾어 바치리다." 절벽 끝에서 꽃을 꺾어 바치겠다는 시골 노인의 수로부인에 대한 연모는, 사랑이 때로 목숨을 건 선택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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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화정과 월화거리 월화 거리는 철로를 땅으로 묻고, 걷는 길로 활용하고 있다. |
| ⓒ 이병록 |
월화정 설화는 강릉의 사랑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신라 진평왕 때 명주로 부임한 무월랑은 연화와 사랑에 빠졌으나 경주로 돌아가 잊어버렸다. 연화는 혼인을 강요받자, 잉어에게 편지를 실어 보냈고, 무월랑은 잉어 뱃속에서 편지를 발견해 다시 강릉으로 돌아와 혼인했다. 두 사람의 아들 김주원은 훗날 강릉 김씨의 시조가 되었고, 왕위 다툼에서 물러난 뒤에도 원성왕에게 명주 군왕의 예우를 받았다. 남대천에 서 있는 월화정에 오르면 두 사람의 이야기가 시내를 따라 흐르고, 밤이 되면 월화거리의 불빛 속에 옛사랑이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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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정탑 차순옥 여사가 자식을 위해 쌓은 3천개의 탑 |
| ⓒ 이병록 |
강릉의 사랑 이야기는 개인과 가족으로도 이어진다. 왕산면 모정탑은 차순옥 여사가 세운 탑으로 유명하다. 4남매를 키우던 그녀는 집안에 잇따른 우환을 겪다가 꿈속에서 "노추산에 돌탑 3천 개를 쌓아라"는 계시를 받았다. 이후 산속 움막에 거처를 마련하고 매일 돌을 올려 탑을 쌓았다. 집안은 차츰 평안을 되찾았고, 여사는 2011년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노추산 계곡에는 그녀가 쌓은 돌탑이 이어져 있으며, 방문객들은 그 앞에서 부모의 사랑이 남긴 흔적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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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정탑을 쌓은 차순옥 여사의 거처 차순옥 여사는 비닐로 움막을 만들어 생활했고, 오두막집은 사후에 만든 것이다. |
| ⓒ 이병록 |
구정면으로 가면 국무총리를 지낸 조순 박사의 생가가 있다. 2002년 태풍 피해 당시 그는 자신의 땅을 내주어 농경지 복구에 쓰게 했는데, 그 과정에서 커다란 바위가 드러났다. 어느 날 밤, 그 긴 바위는 칼로 가른 듯 두 동강이 났고, 그는 그 위에 "도를 따라 몸을 행하고, 하늘을 받들어 명을 받는다"라는 글귀를 새겨 세웠다. 단순한 이바지를 넘어, 고향을 향한 실천적 사랑의 모습이다.
오늘날 강릉은 또 다른 사랑을 키워냈다. 바로 커피다. 안목해변 일대 커피 거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 축제가 열린 곳이다. 이곳은 바다와 커피가 만나는 특별한 공간이 되었고, 전국의 커피 애호가들을 불러 모았다. '보헤미안' 박이추씨가 씨앗을 뿌리고, 최금정씨가 커피 농장과 박물관을 세웠으며, 테라로사의 김용덕씨가 고품질 커피 대중화를 이끌었다. 이들의 노력이 강릉을 '커피의 도시'로 만들었고, 바다와 커피가 어우러지는 사랑 이야기를 새롭게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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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목 커피 거리 유재기 씨의 지도로 커피를 만들고 있는 여행작가 동우회 |
| ⓒ 이병록 |
옥거리(옥천동)의 천년 은행나무 전설도 전해진다. 옛날 한 사냥꾼이 호랑이를 살려주자, 호랑이가 은혜를 갚기 위해 은행알을 물어다 주었고 그것이 거목으로 자라 지금까지 이어졌다는 이야기다. 강릉은 개발에서 암나무를 지켜내었고, 사랑의 결실인 은행 열매가 풍성하게 맺어 있었다. 강릉은 나무의 사랑까지도 지켜내는 도시였다.
강릉은 바다와 산 사이 좁은 길목에 있으면서도, 신들의 사랑에서 인간과 용, 연인과 가족, 고향과 나무, 그리고 커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랑 이야기를 품어왔다. 그래서 강릉은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수많은 사랑의 이야기가 겹겹이 쌓인, 마음이 머무는 고을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영암에도 실립니다.신대동여지도는 언론에 난 글을 보완해서 책을 만들었는데, 이후부터는 책에 쓸 내용을 요약해서 올리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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