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나더 라운드’, 휘게 찾다 허리 휘게 된 사연 [임희윤의 ‘영화 (쏙) 음악’⑬]

데스크 2025. 10. 4.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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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나더 라운드’ (쏙) Scarlet Pleasure ‘What a Life’

낯선 나라 현지인을 만나도 기죽을 일 없어. 언어 장벽을 한 큐에 뚫어버릴 치트 키 몇 개가 있으니.

브라질에 가면 ‘따봉(ta bom)!’을, 포르투갈에서는 ‘빵(pao)!’을, 핀란드라면 ‘‘휘바(hyva)!’나 ‘사우나(sauna)!’를 외쳐보라고. 상대방이 신기해하며 ‘이런 말을 어디서 배웠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 그러면 ‘K-학교에서는 전 세계 190개국 언어를 가르친다’고 ‘K-뻥’을 쳐도 좋아. (근데 이 말은 어떻게 현지어로 하냐고? 정곡을 찌르셨다….)

술 광고는 아니야. 블랙 코미디에 가깝지.

덴마크 친구를 사귈 땐 일단 ‘휘게(hygge)!’를 외쳐봐. 덴마크어로 편안함, 안락함을 뜻하는데, 한 10년 전부터 힐링이 우리 사회에서도 키워드로 떠오르면서 덩달아 대중화된 외래어지. 자, 여기에 휘게를 외치며 잔을 든 동네 바보 형들이 있어. 정확히는 동네 고등학교 선생님 네 분이시지.

오늘의 100분 토론 주제는 술입니다. 소재도 술입니다!

덴마크 영화 ‘어나더 라운드’(2020년)의 주·조연 여러분 말이야. 니콜라이, 마르틴, 페테르, 톰뮈. 주인공은 마르틴이야. 역할을 맡은 배우는 덴마크 국민 배우 매즈 미켈슨. 마침 맥주 광고 모델로도 유명한데 술 영화 주연까지 맡은 거야. 네 명의 고교 교사는 친구인데 저마다 고민이 있어. 공통 분모는 생의 낙이 없는 데다 학생들은 지지리도 말을 안 듣는다는 거야. 넋두리하러 술집에서 만난 넷 중 누군가가 노르웨이 심리학자 스코르데루의 가설을 던져. ‘인간에게 결핍된 0.05%의 혈중알코올농도를 채워 유지하라. 느긋하고 대담해질 지니.’

0.05%! 마르틴의 역사 수업엔 잠시나마 활기가 돌지.

네 사람은 곧바로 실험에 들어가. 자신들의 심신을 대상으로. 술 두어 잔을 감기약처럼 복용한 뒤 수업에 들어가는 거야. 집중도 제로였던 학생들이 눈을 반짝이고 웃기 시작해.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우리의 ‘쌤’들, 긴장이 풀리니 실없는 농담도 하고 파격적인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한 거야. 아이들의 맘도 열리기 시작하지. 여기서 끝난다면, 영화는 10분짜리 해피엔딩 단편영화로 영영 묻혔겠지. 문제가 생겨. 늘 그렇듯 ‘브레이크 고장’이 문제야. 고작 0.05%로도 삶이 이렇게 나아졌는데, 좀 더 복용해보면 어떻겠냐는 거지. 시음 실험이 과음의 난장으로 번지면서 네 명의 교사는 위기를 맞게 돼.

학생들 아님 주의.

영화 제목 ‘어나더 라운드’는 영어로 ‘한 잔씩 더’라는 뜻이야. 좀 더 우리 식으로 달라붙게 말하자면 ‘한 순배(巡杯) 더’쯤이 되겠지. ‘인생 2라운드’도 뜻하는 중의법일 수도 있어. 삶의 엔진은 식게 마련이야. 제아무리 뜨거웠던 사람도 나이가 들면 차분해지지. 불안과 설렘, 열정과 분기(憤氣)의 선홍색 열기가 사라진 자리엔 타다만 잉걸과 재뿐이겠지. 그래도 어쩌겠어.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여전히 불덩이인 것을. 36.5℃로, 0.000% 그 자체로 삶은 이미 채워져 있는 것 아닐까. 가설의 주창자인 스코르데루도 나중에 자기주장을 수정했다고 해. ‘0.05%설’은 잘못된 실험 결과 산출로 인한 오류였다고.

영화에선 체육 시간에도, 음악 시간에도 덴마크 국가나 애국의 노래가 울려 퍼져. 즉, 이건 어떤 마을에서 일어난 가상의 해프닝이 아니라 덴마크에 만연한 현실이라는 뼈 아픈 지적이란 뜻이지.

한가위야. 친척이 모이고 친구가 모이겠지. 술도 몇 순배 돌 수 있어. 술이 술을 먹기 시작하는 단계, ‘한 순배 더!’의 시간으로 가기 전에 사람이 사람과 마주하는 시간이었으면 해. 0.05는 마법의 숫자가 아냐. 도로교통법에 따라 음주 운전에 해당하는 숫자(0.03% 이상)일 뿐이지. 영화의 처음과 끝은 덴마크의 3인조 팝 그룹 ‘스칼렛 플레저(Scarlet Pleasure)’의 노래 ‘What a Life’가 장식해. 라틴풍 선율, 힙합적 비트와 플로에 만취한 밤, 인생의 열락을 찬양하는 곡처럼 들리지만 가사를 뜯어보다 보면 술이 깬 뒤 마주할 현실 세계를 두려워하는 이의 정서를 기막히게 표현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스칼렛 플레저는 덴마크에선 대중성과 음악성을 두루 잡은 밴드인데 바로 이 영화와 이 노래를 통해 ‘커리어 하이’를 찍게 되지. 덴마크는 알코올 남용으로 유명한 나라야. 알코올 과소비, 알코올 중독자 수 등에 관한 세계 조사를 하면 1위를 뺏기지 않는 악명을 갖고 있지. 그 배경으로 청소년 음주에 관대한 사회적 분위기, 그리고 휘게(hygge)라는 미명 아래 음주가 권장되는 세태가 지적되곤 해.

호프(HOF)가 부디 희망의 호프(HOPE)로 대체될 수 있기를.

영화를 본 뒤, ‘What a Life’의 리듬과 함께 잔향으로 남는 것은 영화 도입부에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등장하는 다음의 네 문장이야.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의 말이지.

젊음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꿈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꿈의 내용이다

부디 꿈꾸고 사랑하는 한가위가 되기를. 젊음은 지나갔거나 곧 지나갈 예정이고 삶은 36.5℃로 계속해 불타오를 테니까. 꿈과 사랑이란 땔감을 헛되이 쏟아붓지 말기를. 보름달!

임희윤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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