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구만화와 일본 야구만화의 결정적 차이, 이거 아셨나요?
민족의 대명절 추석을 맞아 책, 영화, 드라마, 여행, 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꼭 챙기면 좋은 ‘필수템’을 소개합니다. 가족·친지와 함께하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긴 연휴에 어울리는 추천 콘텐츠와 함께 더욱 풍성한 연휴 보내시기 바랍니다. <편집자말>
[이용석 기자]
사실 어렸을 때 명절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외동아들이어서 나는 설날이라고 세뱃돈을 많이 받지는 못했고, 추석에도 오는 사람은 없고 갈 곳도 마땅치 않았다. 목포 외할머니 댁과 가까운 광주로 이사 간 뒤에야 그나마 나도 명절에 갈 곳이 생겼지만, 그전까진 학교도 안 가고 동네에 친구들도 다 떠난 명절에는 동생과 놀다 지쳐 텔레비전 보는 게 유일한 놀이였다.
그러니 명절 연휴가 길면 길수록 심심함과 지루함만 늘어났다. 지금처럼 OTT가 있던 것도 아니고, 케이블 채널도 없던 시절이라 종이신문의 텔레비전 편성표를 달달 외우다시피 했다. <폴리스아카데미> 시리즈나 <미스터 빈> 시리즈 같은 코믹물도 좋아했지만 내가 가장 기다린 건 만화영화 <떠돌이 까치>였다. 어렸을 적 이사를 자주 다녔던 탓인지, 까치가 아빠와 함께 용달차를 타고 떠돌이 생활을 하는 것에 어쩐지 마음이 쓰였다.
그 기억 때문이었을까? 역대급으로 긴 이번 추석에 무얼 해야 하나 고민할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바로 '야구'였다. 물론 야구를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구름 높은 가을 하늘 아래 야구장에서 맥주 한 잔 마시며 직관하는 것이겠지만, 그건 야구장이 위치한 대도시 주민들에게만 그리고 가을야구에 진출한 팀의 팬들에게만 허용되는 사치일 뿐이다. 진정한 야구팬은 야구 경기가 없을 때도 야구를 즐길 줄 알아야 하며, 어떤 야구팬들은 오히려 경기가 없을 때 야구를 더 즐길 수 있다(지난해에 우승했지만 올 시즌 8위로 추락한 기아 타이거즈 팬인 내가 그렇다).
팥빙수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팥빙수가 여름 음식이 아니라 사계절 음식인 것처럼, 사실 야구팬에게도 야구는 사계절 즐길 수 있는 스포츠다. 팥빙수나 냉면은 한겨울에 먹더라도 메뉴가 달라지지는 않지만 심지어 야구는 계절에 따라 즐길 수 있는 메뉴가 다르니 훨씬 더 다채롭다. 대체로 제철 야구를 즐기는 편이지만 이번 추석처럼 무척이나 긴 연휴라면, 그냥 사계절을 내리 코스로 즐기는 것도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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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머니볼> 스틸컷 |
| ⓒ 컬럼비아 픽처스 |
이 겨울의 이야기를 가장 잘 담고 있는 작품은 뭐니 뭐니 해도 <머니볼>이다. 대개 좋은 창작물들은 그 작품이 다루는 세계를 잘 모르면서 봐도 재미있는 것처럼 야구를 몰라도 <머니볼>은 재미있게 볼 수 있다. 특히나 <머니볼>이 초보 야구팬들이 고수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꼭 알아야 하는 이른바 세이버메트릭스(Sabermetrics, 통계·수학을 이용한 야구 분석 방법)의 대중화 기점을 다룬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영화의 만듦새가 더더욱 대단해 보인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타자의 가치를 측정할 때 타율을 우선시하던 시대에, 가난한 구단을 운영하는 빌리 빈(브래드 피트 분)이 데이터 전문가이자 야구 초짜인 피터 브랜드(조나 힐 분)과 함께 통계와 데이터에 근거해 구단 운영을 혁신적으로 개선하고 마침내 성적을 내는 과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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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BS 드라마 <스토브리그> 포스터 |
| ⓒ SBS |
냉혹하고 냉정한 백승수의 개혁 작업을 업무적으로 도우면서 사람들의 마음까지 다독이는 운영팀장 이세영(박은빈 분)의 분투가 인상적이다. 단장이 주인공이라는 점, 단장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이 <머니볼>과 비슷한데 한국 프로야구를 훨씬 더 밀접하게 다룬다는 측면에서 이제 막 야구에 입문한 팬이라면 <스토브리그>를 더 재밌게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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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스카우트> 스틸컷 |
| ⓒ 두루미필름 |
우연인지 몰라도 한국 현대사에서도 유독 봄에 사람들이 많이 죽고 다치는 비극적인 사건이 많이 일어났다. 가깝게는 세월호 참사가 있을 것이고, 조금 멀게는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이 있다. 영화 <스카우트>는 바로 1980년 5월 광주가 배경인 야구 영화다. 주인공 호창(임창정 분)은 대학 야구팀의 스카우터다. 라이벌 팀에게 3연패를 당하고 나서 복수를 위해 그해 고교 졸업반 중 최고 투수인 광주일고 선동열을 스카우트 해오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광주에 내려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첫사랑이었던 세영(엄지원 분)을 만난다.
영문을 몰랐던 세영과의 이별을 둘러싼 이야기와, 초고교급투수 선동열을 스카우트하는 두 가지 이야기가 1980년 5월 광주라는 배경 속에서 복잡하게 얽힌다. 이 영화 또한 야구의 외피를 썼지만 광주민주화 운동에 대한 이야기이며 개인의 양심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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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태 타이거즈와 김대중> 겉표지 |
| ⓒ 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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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겉표지 |
| ⓒ 대원씨아이 |
하지만 여름에 더 뜨거워지는 소녀, 소년들이 있다. 만화 <H2>의 주인공 히로와 히데오, 그리고 하루카와 히카리다. 일본고교야구 대회 갑자원을 중심으로 동갑내기 절친이자 라이벌인 히로와 히데오, 그리고 히로를 좋아하는 하루카와 히로의 소꿉친구이자 히데오와 사귀는 히카리가 만드는 특별한 여름은 '청춘'이라는 두 글자를 떠올리게 한다.
마운드 위에서 높은 하늘의 하얀 구름을 쳐다보는 땀방울 맺힌 히로의 표정은 이 만화의 주된 이미지인 여름, 청춘, 야구, 꿈과 도전 그 모든 것을 담아내고 있다. 혹자는 야구를 빙자한 연애만화라고 이야기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며 그 지점 때문에 이 책 또한 야구를 몰라도 충분히 재밌게 볼 수 있다.
90년대 초반 연재한 만화라 지금 우리 시선으로 보면 불편한 점도 있다. 특히 여성 캐릭터의 역할이 너무 보조적인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뭐든지 잘 해내고 빈틈 없는 히카리뿐만 아니라 덜렁대마왕 하루카도 히로와 히데오에 종속되어 있지 않고 자신의 꿈을 찾아 행동하는 캐릭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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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포의 외인구단> ?겉표지 |
| ⓒ 학산문학사 |
무인도에서 고문에 가까운 지옥훈련을 받은 낙오자들이 프로야구를 접수한다는 설정은 비현실적이지만, 강력한 몰입감이 비현실성을 가려준다. 청춘과 낭만이 아니라 순수한 집착과 광기가 만화책을 가득히 채우고 있다.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두 결국에는 미치거나 처음부터 미쳐있던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다. 똑같이 첫사랑에 실패했지만 히로는 성장해가고 오혜성은 미쳐 가는 이유에 대해서, 야구를 즐기는 소년과 야구에 집착한 청년의 차이에 대해서, 군사독재의 폭력 아래 놓여있던 한국과 경제성장의 거품이 꺼지기 직전 일본의 80년대를 비교해보면 훨씬 더 재밌게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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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펜의 시간> 겉표지 |
| ⓒ 한겨레출판 |
소설 <불펜의 시간>은 승자가 되지 못하는, 될 수 없는, 되기를 포기한 이들의 이야기다. 어릴 적 야구를 했지만 재능 부족으로 야구를 포기하고 직장에 들어간 준삼, 역시 야구를 했고 뛰어난 재능을 뽐냈지만 여성이었기 때문에 야구를 그만둬야 했고 다른 방식으로 야구인이 되기 위해 스포츠기자가 된 기현, 빼어난 재능을 가지고 프로야구 선수가 되었지만 트라우마 때문에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탈주해 버린 혁오의 이야기가 서로 만나고 갈등하는 이야기다.
역하고, 추하고, 냉정한 세계에서 세 주인공은 각자의 방식으로 맞서거나, 회피하거나, 타협하거나 ,굴복하며 살아간다. 살아남기 위해 회식 자리에서 왈왈 짖으며 상사의 가랑이를 기어갔던 준삼도, '여성' 기자로 쓰이다가 필요없어지니 편집장에게 대차게 도려내진 기현도, 게임의 룰을 거스르며 혼자 누구도 이기지도 지지 않는 게임을 마운드 위에서 구현하려 했던 혁오도 결국 냉정한 현실에선 패배자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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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야구소녀> 스틸컷 |
| ⓒ 싸이더스 |
물론 중학교 때는 수인보다 한참 아래였던 남자 동기들이 고등학교에 와서는 에이스로 성장했지만 말이다.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사회구조뿐만 아니라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한계들까지, 고등학생 수인이 마주한 현실과 한계는 초등학생 기현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다. 하지만 수인은 자신의 열정을 높이 사서 프런트 직원을 제안한 프로구단의 제의를 거절하고 2군 선수가 되는 것을 택한다. <불펜의 시간>을 보고 조금 기분이 처졌다면 <야구 소녀>를 보고 다시 기운을 낼 수 있을 것도 같다.
인생은 길고, 야구 콘텐츠는 넘쳐나고, 연휴는 아무리 길어도 너무 짧다
한국 프로야구 43년, 한국 야구의 역사는 그보다 더 기니 야구에 관한 읽을거리 볼거리는 넘쳐난다. 위에 소개한 드라마, 소설, 영화, 만화 외에도 다양한 시선에서 야구를 분석하고, 즐기고, 탐구할 수 있는 좋은 작품들이 너무나 많다.
예를 들자면 과학잡지 <에피>의 최신호는 '야구'를 주제 삼아 과학 이야기를 풀어낸다. 기후위기 시대에 지속가능한 야구, 왜 우리는 야구에 열광하는지에 대한 진화론에 입각한 분석 등 흥미로운 내용이 넘쳐난다. 불세출의 야구 스타 선동열 감독이 쓴 <선동열 야구학>은 최신 야구 트렌드를 소개하는 책인 동시에 패배를 모르는 슈퍼스타 출신 감독이 리더십의 실패를 겪은 뒤 새롭게 공부하는 일종의 성장 스토리이기도 하다.
장진 감독의 영화 <아는 여자>처럼 야구 선수가 나오고 야구장이 나오고 야구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야구와는 큰 상관이 없는 영화도 있고, <슈퍼스타 감사용>이나 <퍼펙트 게임>처럼 실제 한국 프로야구의 인물과 스토리로 만든 영화도 있다. 여자 야구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외인구단 리부트>나 <여자 야구 입문기>같은 책도 좋다.
쓰고 보니 너무 많다. 역대급이라는 이번 추석 연휴, 야구를 충분히 즐기기엔 너무나 짧다. 이 많은 재밌는 야구 콘텐츠 중에 나는 이번 추석에 무엇을 볼까? 아마도 농구에 재미를 붙인 조카를 위해 <슬램덩크>를 같이 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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