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때 마시는 술에 담긴 메시지, 알고 계셨나요? [윤한샘의 맥주실록]
[윤한샘 기자]
음력 8월 15일, 8월 한가운데 있는 가장 큰 날, 가을의 풍요를 축복하는 날, 한가위다. 한가위가 다가오면 몇 장 남지 않은 달력 위로 한해의 끝이 보여 놀라곤 한다. 요즘은 일가친척이 모여 요란하게 차례상을 준비하고 왁자지껄 떠드는 풍경을 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조상 위패에 절을 할 때마다 경건함과 감사함이 가슴을 저미는 걸 보면, 핏줄의 힘은 무시할 수 없는 것 같다.
우리 조상들은 한가위가 되면 갓 수확한 쌀로 빚은 술을 조상께 올렸다. 집집마다 탁주를 내리고 내린 맑은 청주 향이 방방곡곡 흘렀다. 일제강점기, 그 좋던 우리 술 문화가 사라지며 사케의 흔적이 남아있는 정종이 차례상을 차지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최근 우리 전통주가 제자리를 찾고 있는 중이다.
가끔 차례상에 어울리는 맥주를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받곤 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맥주보단 우리 술이 격에 맞다. 우리 땅에서 자란 곡물로 담근 술이 한가위에 어울린다. 맥주는 차례가 끝난 뒤 즐겨도 충분하지 않을까.
한가위는 우리 명절이지만, 수확의 감사를 기리는 행위는 보편적인 인류 문화였다. 가을은 풍요의 계절일 뿐만 아니라 겨울을 예고하고 삶과 죽음을 동시에 돌아보는 시기였다. 중국, 베트남 같은 아시아는 물론 세계 곳곳에 이를 기리는 축제가 존재해 왔다.
흔히 가을 축제로 독일 옥토버페스트를 떠올리지만, 옥토버페스트는 19세기 바이에른 왕자의 결혼식에서 유래한 근대 문화다. 솔직히 말하면 독일 바이에른, 그중에도 뮌헨 도시 축제라고 하는 것이 맞다. 맥주조차 바이에른 맥주가 아니라 뮌헨의 맥주만 즐길 수 있다.
추수감사절에 어울리는 맥주는 축제를 의미하는 페스트비어가 아니라 추수를 의미하는 하베스트 에일(harvest ale)이다. 이 흔적은 유럽에서도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같은 켈트 문화에서 발아했다. 이후 가톨릭을 만나 종교 속으로 들어갔으며 미국 청교도의 '땡스기빙데이'와 영국 성공회의 추수감사절 속으로 스며들었다.
|
|
| ▲ 아일랜드에서 발견된 서기 1세기 경 루나사드 축제와 관련된 얼굴 상. |
| ⓒ 위키미디어 공용 |
켈트 전설에 따르면 루나사드는 원래 루그의 양어머니, 테일티우(Tailtiu)를 기리기 위한 제사였다. 테일티우는 척박한 땅을 개간하다 고된 노동으로 사망했는데, 대지와 곡물의 여신이었던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지냈던 제사와 잔치가 루나사드라는 명절이 됐다.
켈트인들은 루나사드 기간 빵과 맥주를 마셨고 말 달리기를 하거나 무술 대회를 열면서 수확의 기쁨을 나눴다. 큰 장을 세워 물자를 교환하며 다가올 겨울을 준비했고 남녀가 만나 약혼을 하며 길일을 축복했다.
6세기 이후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 가톨릭이 들어서며 루나사드는 교회 품으로 들어가 라마스(Lammas)라는 의례가 되었다. 8월 1일이 되면 사람들은 수확한 밀과 보리로 빵을 만들어 루그가 아닌 교회에 봉헌했다. 라마스는 토착 종교가 가톨릭의 전례 속에 편입된 독특한 경우였다. 다른 나라 가톨릭교회에서는 라마스 같은 의례를 찾기 힘든데, 이런 예는 9월 29일 미카엘마스(Michaelmas)에서도 발견된다.
미카엘마스는 대천사 미카엘을 기리는 축일이다. 다른 가톨릭 국가의 미카엘마스는 종교 행사에 머무르지만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는 지역 농경문화와 결합된 형태로 전래됐다. 켈트인들은 미카엘마스를 수확이 끝나는 시기라고 여겨 다 함께 모여 거위 요리와 맥주를 먹고 마시며 축제를 즐겼다.
|
|
| ▲ 고든 스카치 에일 |
| ⓒ 윤한샘 |
아일랜드에서는 아이리시 레드 에일이 떠오른다. 이 맥주는 가을을 품고 있다. 붉은 기가 도는 외관은 단풍잎을 녹인 듯하다. 알코올 도수가 낮고 효모에서 올라오는 섬세한 에스테르, 고소한 토피 향, 깔끔한 바디감이 좋아 몇 잔이고 마실 수 있다.
|
|
| ▲ 스미드윅스 아이리시 레드 에일 |
| ⓒ Smithwicks experience |
고대 켈트인들에게 가을은 여름이 죽고 겨울이 다가오는 시기였다. 10월 말이 되면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옅어져 망자의 영혼이 돌아온다고 믿었다. 사람들은 10월 31일부터 11월 초를 사마인(Samhain)으로 부르며 문밖에 음식과 맥주를 놓고 이승으로 넘어오는 조상의 영혼을 기렸다. 하지만 저승의 틈으로 들어온 악령을 막기 위한 대비도 빼놓지 않았다. 새 불을 피워놓거나 가면을 쓰고 분장을 하며 자신을 보호하기도 했다.
사마인 기간, 사람들은 분장을 한 채 마을에 모여 잔치를 벌여 음식과 맥주를 마셨다. 이 풍습은 8세기 교황 그레고리 3세가 11월 1일을 모든 성인의 축제(All Hollow's day)로 선포하며 가톨릭 축제로 바뀌었다. 특히 전날 밤은 '올 할로우스 이브'로 불리며 조상을 기리는 의례와 악령을 피하는 사마인의 풍습이 기독교 축일로 합쳐졌다. 중세를 지나 '올 할로우스 이브'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핼러윈(Halloween)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는 핼러윈을 켈트어로 '사마인의 밤'(Oidhche Shamhna)로 부르며 사마인의 전통을 이어갔다. 이날 사람들은 악령을 쫓기 위해 마을에 큰불을 놓았고 아이들은 분장을 하고 노래를 부르며 음식을 얻어먹으러 다녔다. 악령을 막기 위해 집 앞에는 순무를 파 촛불을 넣어 두었는데, 이 모든 풍습이 지금의 핼러윈 문화로 이어졌다.
현대 핼러윈은 19세기 미국으로 건너간 아일랜드 사람들의 산물이다. 순무로 만들었던 '잭 오 랜턴'(Jack-O-Lantern)은 구하기 쉬운 호박이 대신했고 아이들이 집 앞에서 음식을 먹기 위해 불렀던 노래는 '트릭 오어 트리트'(Trick or Treat)로 바뀌어 사탕이나 초콜릿을 받는 놀이로 변했다. 20세기 핼러윈은 미국 상업주의와 결합해 거대한 축제가 되어 전 세계 젊은이들의 놀이 문화로 정착하는 중이다.
핼러윈을 위한 맥주는 누가 뭐래도 펌프킨 에일이다. 미국에서는 핼러윈 시즌에 펌프킨 에일이 출시된다. 호박을 넣지만 향미보단 사실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다. 당도가 높은 호박, 파이 펌프킨(pie pumpkin)이 주로 사용되나 시즈널 맥주에 어울리는 시나몬, 정향, 생강 같은 재료를 첨가해 향미를 더하기도 한다.
|
|
| ▲ 미국 땡스기빙데이 상차림 |
| ⓒ 위키미디어 공용 |
매사추세츠주에서만 기념하던 추수감사절을 국경일로 지정한 사람은 링컨 대통령이다. 그는 남북전쟁 중이던 1863년 국민 통합을 위해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선포했다. 그리고 1941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11월 네 번째 목요일로 변경하며 완전한 명절로 정착시켰다. 마치 우리 한가위처럼 미국인들은 추수감사절, 고향에 모여 가족들과 칠면조 요리와 호박파이를 먹는다. 하지만 일부 원주민들은 이날을 민족애도의 날로 여기기도 한다.
영국에도 하베스트 페스티벌(Harvest Festival)이라고 부르는 추수감사절이 있다. 영국의 추수감사절은 국가적 명절이 아니라 성공회 축제다. 1843년 콘월에서 로버트 스티븐 호커 목사가 수확 감사제를 연 것이 출발이다. 라마스 같은 가톨릭 문화와 다른, 성공회만의 문화가 필요했기 때문에 19세기에야 뒤늦게 제도화되었다.
영국 추수감사절은 국가 공휴일인 미국과 달리 10월 말 교회와 마을 중심 행사로 진행되며 예배 후 가져온 음식과 꽃을 이웃과 나누는 축제의 성격을 띤다. 종종 마을에 따라 장터와 퍼레이드 같은 행사가 벌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역사와 의미가 다른 미국과 영국 추수감사절에도 공통점은 존재한다. 바로 맥주다. 이 시기가 되면 두 나라 모두 하베스트 에일(Harvest ale)이라는 이름의 맥주를 마실 수 있다. 영국 양조장들은 그해 수확한 맥아와 홉으로 올드 에일 또는 발리 와인 스타일의 맥주를 양조한다. 미국의 경우, 그해 수확한 신선한 홉을 넣은 하베스트 에일을 출시하며 가을을 맞이한다.
|
|
| ▲ 태평양조 와일드 가든 방아 |
| ⓒ 태평양조 |
팜하우스 에일(farmhouse ale)은 말 그대로 농가에서 담가 마시던 맥주다. 뿌리로 보면 우리 막걸리와 비슷하다. 지역 곡물과 효모, 허브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야성적 풍미가 농경의 정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야생에서 채취한 미생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쿰쿰한 향과 산미가 도드라지며 지역특산물을 첨가해 지역색이 드러나는 것이 특징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토종 밀이나 방아잎 같은 재료와 지역에서 채취한 효모를 넣은 우리만의 팜하우스 에일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경북 문경 태평양조가 선두주자다. 한국의 멋이 담긴 다양한 팜하우스 에일을 선보이고 있다. 4.5% 알코올을 가지고 있는 와일드 가든 방아는 이름 그대로 양조장 뒤뜰에서 채취한 야생 효모가 빚은 맥주다. 신선한 자두, 향긋한 꽃 향 뒤에 짜르르한 산미가 매력이다. 경북 특산물 방앗잎도 빼놓을 수 없다. 마치 깻잎과 허브 향 경계에 있는 듯한 방앗잎은 쌉쌀한 향기로 입안을 물들인다.
4.3% 알코올을 가진 쌈은 과감하고 독특한 팜하우스 에일이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당귀, 깻잎, 겨잣잎이 마치 쌈처럼 들어있다. 짜릿하고 선명한 산미 속에 매콤하고 쌉쌀한 향이 느껴진다. 기름지고 무거운 차례 음식과 페어링하면 멋진 밸런스를 이룬다. 동태 전, 육전, 육적과 산적 모두 잘 어울리며 약과와 한과 같은 디저트에 곁들여도 훌륭하다.
한국 크래프트 맥주들이 지역 특산물로 빚은 팜하우스 에일을 보면 한가위와 맥주는 결코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조상과 계절을 잇는 맛있는 다리가 된다. 이번 한가위엔 한국산 팜하우스 에일 한 잔 어떨까? 보름달에 소원을 빌며 가족과 함께.
모두 즐거운 한가위 보내세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검찰개혁 중수청까지 했으니 끝? 또다시 물러날 건가"
- "검찰 없애도 좋다, 하지만 검찰이 망하면 개혁인가"
- [단독] 김건희 종묘 사적 이용 때문에 '이성계 고조부 신실' 개방
- 하늘에 계신 시어머니께...차례상 이렇게 바꾸려고 합니다
- [이충재 칼럼] 김현지, 이렇게 커질 일이었나
- 김용현 재판 멈춘 그 문자 "대통령께서 '다시 계엄하면 된다'고"
- [박순찬의 장도리 카툰] 검사의 전통
- 호텔신라 '국가 행사' 해명에 정부는 '할많하않'
- [단독] 경로당에 안마의자까지, 시의회 제동 걸자 "어르신 존엄 건드냐"는 도의원
- '윤어게인' 집회서 쏟아진 "XX" 구호...전문가 "정치권 혐중 선동 탓" 일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