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득 = 신분 상승’ 공식 깨졌다 [‘한국판 헨리’ 200명에 물었더니]
“연봉 1억원을 넘기면 뭐하나. 서울에 내집마련도 못한다.”
최근 국내 직장인 커뮤니티에서 흔히 오가는 푸념이다. 고연봉을 받아도 내집마련은커녕 생활비와 세금, 교육비 지출에 쫓겨 ‘흙수저’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토로다. 일부의 불만일까. 아니면 ‘고소득 흙수저’ 직장인 다수의 생각일까.
매경이코노미는 소득은 높지만 자산 축적에 어려움을 겪는 ‘한국판 헨리(HENRY)’ 인식을 설문조사했다. 데이터 분석 업체 오픈서베이에 의뢰해 연봉 8000만원 이상 2040 직장인 200명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난해 건강보험료 기준 상위 10% 직장가입자 세전 소득은 7700만~8000만원 사이로 추정된다. 설문 결과, 근로소득 상위 10%에 드는 집단이면서도 자산 축적이 어렵다고 답한 이들이 절대다수였고 응답자 절반 가까이가 그 이유로 세 부담 등을 꼽았다. 또, 10명 중 7명이 자산 양극화가 한국 사회 세대 갈등 뇌관이 될 것이라 우려했다.


전월세 부담에 세후 현금 ‘뚝’
첫 번째 질문으로 소득과 자산 축적 연관성을 물었다. ‘소득이 높아도 저축과 자산 축적이 어려운가’라는 질문에 응답자 51.5%가 어렵다고 답했다. 매우 어렵다고 답한 이가 22%, 어렵다고 답한 이가 29.5%였다. 전혀 어렵지 않다(4.5%)와 어렵지 않다(18.5%)라고 답한 이보다 2배 더 많았다.
자산 형성에 가장 큰 제약 요인 2가지를 뽑아달라는 질문에 높은 주거비와 교육비가 첫손에 꼽혔다.
응답자 67.5%는 주거비 부담 탓에 자산 축적이 힘들다고 했다. 전월세 등으로 세후 현금흐름이 급감한 데다 치솟는 아파트값 탓에 주택담보대출 부담이 커 자산을 축적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주택 임대차 시장에서 월세가 대세로 굳어지며 세입자 주거비 부담은 갈수록 늘고 있다. 아파트 월세화 흐름 속 ‘100만원 이상’ 고액 월세 비중도 증가 추세다. 이런 가운데, 고소득층이 선호하는 서울 지역 부동산 가격은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KB부동산에 따르면, 지난 8월 서울 아파트 매매 중위가격은 10억4000만원으로 지난 4월 10억원대에 진입한 후 4개월 연속 오름세다.
‘한국판 헨리·니콜라’들은 ‘고소득=신분 상승’ 공식이 사실상 무너졌다고 받아들인다. 201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억대 연봉 소유자라면 내집마련이 어렵지 않았다. 여유 금액을 저축해 돈을 모은 다음, 부동산으로 자산을 늘려 계층 사다리를 오르는 건 앞선 세대에선 ‘필승 공식’으로 통했다. 2020년대 들어 이 공식은 깨졌다. 고소득자가 자금 모으는 속도를 자산 가격 상승세가 훌쩍 앞질렀다. 아무리 연봉이 올라도 집 한 채 마련이 쉽지 않다. 매매가 막혀 집은 못 사는데, 전세 이자·월세로 내는 돈은 매년 증가한다. 주거 비용이 증가하며 연봉이 올라도 가처분소득과 저축액은 제자리를 맴도는 이가 대부분이다.
주거비 다음은 교육비를 꼽았다. 45.5%가 높은 교육비가 자산 형성을 가로막는다고 답했다. 한국 사교육 시장은 학령인구 감소에도 규모가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2024년 초·중·고 학생 수는 513만명으로 1년 새 8만명 줄었지만, 사교육비 총액은 29조2000억원으로 전년 대비 7.7% 늘어 역대 최대치를 갈아치웠다. 3040세대가 자녀 교육에 적극 뛰어든 결과다. 대기업 소득으로도 자산 형성에 차질을 빚자, 자녀는 의사 등 ‘초고소득’ 전문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교육 시장으로 몰리는 형국이다.
세금에 대한 불만 역시 팽배했다. 이번 설문에서 세금 체제에 대한 고소득 2040세대 부정적 인식이 그대로 드러났다. 설문 결과, 현재 부담하는 세금과 사회보험료가 과도하다는 응답이 46.5%였다. 부정응답(전혀 아니다·아니다)은 15.5%에 그쳤다. 3배 가까이 격차가 났다. 고소득자는 현 세제에서 가장 불리한 계층이다. 조세당국은 현재 연소득 8800만원 이하 과표구간에는 6~24%의 세율을 물리고 이를 초과하는 소득에는 35~45%의 높은 세율을 적용한다. 8800만원 초과 구간에서 세율이 10%포인트 가까이 급등한다. 고소득 직장인만 쥐어짠다는 불만이 거세지면서 이번 대선에서 과표구간 조정과 공제액 상승 등 정책 제안이 나왔다. 세수 감소 우려에 밀려 결국 개편안은 통과하지 못했다.
‘한국판 헨리·니콜라’ 계층의 가장 큰 불만은 내는 세금 대비 돌아오는 혜택이 적다는 점이다. 고소득층은 각종 복지 수혜에서 배제되지만, 세금 부담은 더 커져 ‘세금은 많이 내는데 돌아오는 혜택은 없다’는 불만이 드세다. 국회예산정책처 조사 결과, 전체 근로소득세 중 연봉 8000만원 이상 근로자가 부담하는 비중은 76%에 달한다. 이들이 근로소득세 대부분을 부담하지만, 2차 민생회복 소비쿠폰 등 각종 지원 정책에선 철저히 소외된다. 건강보험료와 소득세 등 형식적인 ‘소득’만을 기준으로 대상을 선별하는 탓이다. 자산은 많지만 소득이 적은 사람이, 소득은 많지만 자산이 없는 사람보다 오히려 유리한 구조다. 일각에서는 ‘백수 금수저가 성실히 일하는 고소득 흙수저 돈을 빼앗는다’는 불만까지 나온다.
자산이 쌓이지 않다 보니, 고연봉을 받아도 ‘상류층’이란 인식이 없다. ‘스스로를 어느 계층에 속한다고 생각하나’라고 묻는 질문에 59%가 ‘중산층’이라고 뽑았다. 상류층이라 답한 비율은 3%에 그쳤다. 오히려 본인이 하위 중산층(22.5%)과 서민(4%)이라고 응답한 비율보다도 낮았다.

“기성세대 복지 왜 우리가” 불만
고령층 연금·복지 부담을 2040 고소득 계층이 떠안고 있다는 불만도 뿌리 깊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응답자 대다수는 현세대에게 부담과 희생을 강요하는 구조가 한국 사회 세대 갈등 ‘뇌관’이 될 것이라 봤다.

응답자들은 이 같은 세대 간 경제적 갈등이 추후 한국 사회를 뒤흔들 뇌관이 될 수 있다고 봤다. 73.5%가 ‘세대 간 경제적 갈등이 한국 사회 주요 갈등으로 확대될 것’이라 답했다. 고소득 흙수저 계층 해법으로는 ▲주택 가격 안정 ▲세금 부담 완화 ▲대출 규제 합리화 등이 꼽혔다.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 2가지를 뽑아달라는 질문에 ‘주택 가격 안정 및 맞춤형 주거 지원’이 필요하다는 응답(50%)이 가장 많았다. 이어 소득세율 인하(43.5%)와 부동산 대출 규제 합리화(38.5%)가 뒤를 이었다. 근로소득 세 담을 줄여주는 한편, 부동산 등 자산 시장 진입로를 터 계층 이동 경로를 마련해주는 게 시급한 해결책인 것으로 풀이된다.
[반진욱 기자 ban.jinuk@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29호·추석합본호 (2025.10.01~10.1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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