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기자의 ‘영화로 보는 茶 이야기] (41) 고스포드 파크 | “미안하지만 우유는 나중에 넣어요” 우유 먼저? 차 먼저?

김소연 매경이코노미 기자(sky6592@mk.co.kr) 2025. 10. 2.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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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김소연 기자의 영화로 보는 차 이야기>는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 만난 차와 관련된 이야기를 모티브로 ‘알아두면 쓸 데 많은, 재미있는’ 차 이야기를 술술 읽어나갈 수 있게 풀어낸 스토리텔링 연재물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면 매월 1회 ‘차(茶라)는 렌즈를 통해 풍성한 문화·예술·역사 이야기’를 즐길 수 있습니다. ‘좋아요’와 ‘댓글’ 공유는 콘텐츠 제작과 전파에 큰 힘이 됩니다.
때는 1932년 1월 영국. 한눈에 봐도 수리가 하나도 된 것 같지 않은 데다 뭔가 빈티 꼬질꼬질 나는 스산한 집에서 할머니가 나온다. 스러져가는 집이지만 그래도 규모가 있고 집사가 기다렸다 차 문을 열어주며 운전사와 옆에 하녀도 있는 걸 보니 귀족이다. 빙고. ‘트랜썸 백작부인’이다. 트랜썸 백작부인이 차를 타고 가는 곳은 ‘고스포드 파크’. 억만장자 맥코들 경의 집이다. 맥코들 경과 부인 실비아가 사냥 파티를 연다며 지인들을 초대한 것. 실비아의 두 여동생 부부, 맥코들 경 사촌이면서 미국에서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아이버, 아이버와 동행한 영화 제작자 등등 10여명의 지인이 모였다. 이들을 따라온 시종들과 고스포드 파크에 원래 있는 수많은 하인까지. 그야말로 고스포드 파크는 사람으로 넘쳐나며 북적댄다.

북적대는 와중에 묘한 질서가 엿보인다. 1층부터 위쪽으로는 귀족들의 공간. 초대받은 귀족을 따라온 하인과 시종은 앞문이 아닌 뒷문으로 들어가고 거처하는 공간과 생활 공간도 지하 1층부터 아래쪽이다. 이들은 시중들 때를 제외하면 가급적 1층 위로 올라가지 않는다. 아니 ‘올라가지 못한다’는 표현이 맞으려나.

파티가 진행될수록 이들 간의 묘한 갈등 관계가 부각된다. 실비아의 숙모로 맥코들 경으로부터 생활비를 지원받고 있던 트랜썸 백작부인은 맥코들 경이 생활비를 끊으려 한다는 소식에 안절부절하며 그를 설득하려 한다. 백작부인뿐 아니라, 초대받은 이들 중 여러명이 맥코들 경에게 부탁하거나 심지어 애원해야 할 것이 있다. 그렇게 긴장 수위가 높아지던 두 번째날 밤, 맥코들 경이 서재에서 가슴에 칼이 꽃힌 채 쓰러진 모습으로 발견된다. 과연 범인은? 범인을 찾을 수 있기는 할까?

‘홍차의 나라’면서 ‘애프터눈티 문화’를 활짝 꽃피운 영국은 철저한 계급 사회로도 유명하다. 계급은 사라졌지만 계급 문화는 지금도 여전하다. 미국식 영어에 비해 상류층 언어와 하층 언어가 명확히 구분되는 영국식 영어를 떠올려보면 이해가 쉬우려나. 차와 관련된 단어와 문화에서도 이러한 계급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귀족과 하인들 세계를 대비해 그려낸 ‘고스포드 파크’인 만큼, 당연히 계급 문화의 정수를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장면이 맥코들 경 사망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고스포드 파크에 온 톰슨 경위가 맥코들 경 부인인 실비아에게 차를 주는 장면이다.

살인 사건이 벌어진 서재에서 실비아에게 몇가지를 묻기 위해 실비아를 부른 톰슨 경위는 뜬금없이 차를 따라주겠다며 잔에 우유를 붓는다.

“제가 따라드리죠.”

(밀크피처에 담긴 크림을 찻잔에 따른다.)

“미안하지만 크림은(우유는) 나중에 넣어요.”

“그러죠. 저도 항상 크림을 나중에 넣습니다.”

“집사람이 크림을 먼저 넣다 보니… 그래야 소독이 된다나”

무슨 소독?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다. 이유가 있다. 영국에서 밀크티 마시는 방법은 두가지, MIA와 MIF다, MIA는 ‘Milk in After’의 약자, MIF는 ‘Milk in First’의 약자다. 쉽게 말해 차를 먼저 넣고 다음에 우유를 뒤에 넣을 것인가(MIA), 우유를 먼저 넣고 다음에 차를 뒤에 넣을 것인가(MIF)다. “그게 그거지, 뭐가 달라?” 싶으신가. 절대 ‘그게 그거지’가 아니다.

도자기는 ‘도기’와 ‘자기’가 합쳐진 단어다. 900~1000℃ 온도에서 구운 것을 ‘도기’, 1300℃ 넘는 고온에서 구운 것을 ‘자기’라고 한다. 더 높은 온도에서 구웠으니 그만큼 더 단단할 것은 당연지사다. 고대 이래로 전세계 곳곳에서 만들어질 만큼 도기는 만들기 쉽다. 그러나 얇으면서도 단단하고 투명하며 밝은 빛을 내는 데다 두드리면 맑은 소리를 내는 자기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15세기까지도 중국과 한국이 유일했다. 일본은 16세기 임진왜란 때 조선 도공을 대거 끌고갔고 이후 그들 덕분에 비로소 자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반면 유럽 사람들은 1804년 까지 자기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불 온도를 끌어올리는 방법을 몰랐고, 어떤 흙과 원료를 써야 하는지도 몰랐다. 드디어 유럽에서 자기를 만들게 되기까지 유럽 귀족들은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자기를 수입해 썼다. 자기 가격은 어마어마했고 자기를 보유했다는 것은 그만큼의 부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처음 귀족들만 마시던 차 문화는 산업혁명 이후 급속도로 평민에게까지 퍼져나갔다. 문제는 차를 마실 다구였다. 자기가 너무 비싸 평민들은 유럽에서 만든 도기에 차를 부어 마셨는데 차가 너무 뜨겁다보니 종종 도기가 터져나갔다. 유레카!!! 고민하던 이들은 찻잔에 미지근한 우유를 먼저 붓고 뜨거운 차를 그 다음에 넣었다. 먼저 넣은 우유 덕분에 뜨거운 차를 부어도 차 온도가 자연스레 낮아져 도기가 깨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온 게 MIF, 즉 ‘우유를 먼저 넣은 후 차를 넣는’ 방식이다. 당연히 비싸지만 강도 높은 수입 자기를 사용하는 상류층은 찻잔이 깨질 염려 없이 뜨거운 차를 먼저 붓고 우유를 넣는 ‘MIA’ 방식으로 차를 즐겼다. 이런 문화는 유럽에서 자기를 만들어낸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상류층은 ‘dinner’ 노동계급은 ‘tea’
이제 실비아가 우유를 먼저 붓는 경위에게 “미안하지만 우유는 나중에 넣어요”라고 말한 이 장면의 의미를 이해하실는지. 더 나아가 1930년대 당시 경위는 평민 계층이었음도 짐작해볼 수 있다. “집사람이 크림을 먼저 넣다 보니…그래야 소독이 된다나” 이 문장을 보면 처음에는 자기와 도기 문제로 시작된 MIA와 MIF가 나중에는 왜 크림을 먼저 넣는지도 모르고 그저 문화로 굳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있다. 고스포드 파크 영화 포스터에는 “TEA AT FOUR, DINNER AT EIGHT, MURDERAT MIDNIGHT” 라는 문구가 씌어있다. 티는 4시에 마시고 저녁은 8시에 먹는다고?

19세기 초 영국의 귀족이나 상류 계층은 식사를 하루에 두 번만 했다. 오전 10시쯤에 아침을 먹고 오후 3시 전후에 근사하게 차려 저녁을 먹었다. 3시에 저녁을 먹으니 진짜 저녁이 되면 배가 출출했을 터. 그래서 7시경 ‘애프터 디너 티’라는 이름으로 간단히 차와 간식을 준비해 먹었다. 이후 생활습관이 달라지면서 저녁 시간이 점차 늦어졌고 1850년경에는 7시 30분이나 8시까지 늦춰졌다. 이처럼 아침과 저녁 사이 시간이 길다보니 그 사이에 무언가를 먹어야 했고, 그렇게 점심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점심을 먹더라도 지금과 비교해 보면 저녁 시간이 늦긴 늦다. 그래서 오후, 더 정확하게는 오후 3~5시 경에 차와 디저트를 챙겨 마시기 시작했고 이게 굳어진 것이 바로 영국의 ‘애프터눈 티’ 문화다.

이 지점에서 다시 계급적인 단어가 등장한다. 귀족은 애프터눈티를 마시고 저녁 8시경 진짜 저녁을 먹었다. 이 저녁을 디너(dinner) 혹은 서퍼(supper)라 불렀다. 그 중 supper는 좀 더 가벼운 저녁을 가리킨다. 그런데 노동차 계층이 귀족의 애프터눈티를 따라 저녁 7시 경에 먹은 하이티는 애프터눈티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저녁 식사였다. 이들은 그 저녁을 tea라고 불렀는데 그 문화가 지금까지 남아있어 저녁을 ‘tea’라고 하는 사람은 주로 하층 노동 계급 사람이라는 스토리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다시 톰슨 경위와 실비아 장면으로 돌아가볼까. 차 먼저 넣고 우유 넣은 다음 톰슨 경위가 또 한번 묻는다.

“설탕?”

“아뇨.”

영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사회적으로 하층이고 가난할수록 설탕을 많이 먹는다는 인식이 있었다. 이 같은 인식은 현대에도 여전하다.

밀크티에 설탕 두스푼 팍팍 치는 당신은 노동자 계급…
영국에서 발간되는 ‘데일리 메일’이라는 신문이 있다. 2015년 9월 20일 이 신문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Two sugars in your cuppa? Then you are more likely to be in a low income bracket. (당신의 차에 설탕이 두 조각 들어갔다면 당신은 저소득층일 가능성이 높다.)

기사는 한 보고서의 설문조사를 인용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DE계층(전통적 노동계층과 빈민층)은 36%가 차에 설탕을 넣는 반면, AB계층(전통적 중산층) 26%만 차에 설탕을 넣었다. 차에 설탕을 2개 이상 넣는 사람은 AB계층은 9%, DE계층은 19%다.

그나저나 영국 하층계급은 어쩌다 이렇게 설탕 섭취를 많이 하게 됐을까. 원래 설탕은 아주 귀하고 비싼 식재료였다. 그래서 귀족들은 자신의 부를 자랑하기 위해 설탕을 가득 담은 설탕기를 테이블에 무심하게 올려놓곤 했다. 그러다 영국이 식민지인 카리브해 나라들에서 대규모 설탕 플랜테이션 농업을 진행하면서 설탕 가격이 엄청 싸졌고, 이제 귀족들은 값싼 설탕을 쳐다보지 않게 됐다. 반면 노동자들은 열량 보충을 위해 설탕을 대량 소비하기 시작했다. 영양이 불량한 극빈층이 아이에게 잘 나오지 않는 젖 대신 설탕물을 줬다는 스토리도 전해진다. 하층계급이 마신 홍차는 싸구려 홍차였던 만큼 쓰고 떫은 맛이 강해 이 쓰고 떫은 맛을 가리기 위해 설탕을 많이 넣었다는 얘기도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럼 영국 상류층은 어떤 홍차를 주로 마셨고 마실까. 전통적으로 얼그레이에 우유도 설탕도 넣지 않고 마셨다. 얼그레이에서 얼은 ‘Earl 백작’이다. ‘그레이 백작이 좋아하던 차’라는 의미의 이름이다. 백작이 마시던 차 정도는 마셔줘야 상류층이라 할 수 있으려나? 최근에는 서양홍차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인도 다즐링 다원의 퍼스트플러쉬(첫물차: 그해 가장 먼저 딴 잎으로 만든 차, 채엽 시기가 빠를수록 차 가격이 비싸다)를 애프터눈티에 많이 곁들인다는 전언이다.

‘builders tes’는 건설노동자들이 건설 현장에 나가기 전 날 진탕 마신 술도 깨고 각성도 할 겸 진하게 우린 차에 설탕 팍팍 넣은 차를 의미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영국에 ‘builder’s tes’라는 차가 있다. ‘builder’라는 단어는 묘한 어감을 지녔다. 최하층 노동자라는 뉘앙스가 담겨있다. builder’s tes는 건설노동자들이 건설 현장에 나가기 전에 전날 진탕 마신 술도 깨고 각성도 할 겸(그래야 사고가 나지 않을테니) 진한 차에 설탕 여러 스푼 팍팍 넣은 차를 의미한다. 정말 대단한 영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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