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 칼럼] 상징계, 상상계, 실재계

라캉에 따르면 인간의 주관성은 ‘상징계-상상계-실재계’라는 세 개의 질서로 이루어진다. 그가 동의하든 말든 지금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부조리를 이해하기 위해 이 삼분법을 ‘개인’이 아닌 ‘사회’ 상태에 전용(轉用)해볼까 한다.
라캉은 ‘상징계’(symbolic)를 언어, 논리, 이성, 법률의 영역으로 규정한다. 내 멋대로 풀자면 교육, 학문, 공론, 사법, 의회 등 사회적으로 합의되고 공유되는 의미와 규칙에 따라 행해지는 공적 활동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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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짜뉴스가 법치와 공론장 삼켜
개혁 환상 심어주는 유튜브 정치
마약처럼 짜릿한 ‘정치적 효능감’
권력은 이용하고 시민들은 고통
」
한편, ‘상상계(imaginaire)’는 시각적·청각적 이미지로 이루어진 환상의 영역. 내 식으로 풀자면 영화, 만화, 게임, 아이돌 문화, 유튜빙, SNS의 셀카 문화 등 강렬한 욕망과, 이룰 수 없는 그 욕망의 환상적 실현의 영역이다.
지금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부조리들은 상상계가 상징계를 파괴하는 현상이다. 문자문화가 영상문화로 이행함에 따라 텍스트 친화적인 상징계가 이미지 친화적인 상상계에 서서히 제 영토를 내주기 시작한 것이다.

일례로 최근 민주당에서 대법원장을 청문회장으로 불렀다. 사유가 황당하다. 그가 ‘4인회동’을 하여 내란을 공모하고, 이재명 후보의 선거법 사건을 전원합의체로 넘겨 유죄취지로 파기환송하게 함으로써 대선에 개입했단다. 결국 4인회동은 AI 음성조작까지 동원한 가짜뉴스로, 선거법 사건의 전원합의체 회부는 정상적 절차로 드러났다. 상식적으로 대법원장이 10명의 대법관에게 특정한 방향으로 판결을 강요하는 게 애초에 가능하지 않음을 알 거다.
오직 개딸의 상상계에서만 가능한 이 음모론이 공당(公黨)의 어젠다가 되어 국회 법사위를 점령해 버렸다. 대법원장의 불출석을 예견하고 벌써 탄핵소추안을 써놓았다는 모당 비대위원장은 무려 전직 법학교수다. 문제는 이 음모론적 사유가 국민의 의식을 잠식하고 있다는 것. 한 여론조사에서 대법원장 사퇴에 반대의견이 47.5%, 찬성의견이 43.9%로 나타났다. 유권자의 거의 절반이 음모론을 사실로 여긴다는 얘기다.
상징계를 대표하는 레거시 미디어들은 이 상상계의 무차별적 공세에 무력함을 보인다. 그들의 역할은 상상계를 날것 그대로 중계하다가 ‘국민 절반이 사퇴하라니 대법원도 반성하라’는 전도된 논평을 덧붙일 뿐이다.
마샬 맥루언에 따르면 전자매체는 ‘공적 대중(public)’을 ‘집단적 청중(mass audience)’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때 사라지는 것은 공공(public)의 차원. 실재는 이제 현실의 전유물이 아니다. 집단의 환상은 실재가 된다.
검찰개혁을 둘러싼 논의도 상징계가 아니라 유튜브의 상상계에서 이루어진다. “추석 전까지 검찰 해체의 기쁜 소식을 전해 드리겠다.” 집권 여당의 대표가 ‘어준 그리스도’의 복음을 마라도 땅끝까지 전파하는 사도가 되었다.
검찰개혁과 사법개혁은 하나의 환상이다. 애초에 검찰과 법원의 권력에 피해를 입은 민초들에서 출발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두 개혁을 부르짖는 이들이 단 한 번이라도 서민의 피해를 사례로 인용하는 것을 본 적 있는가?
“검찰청 폐지를 노무현 대통령께 보고드린다.” 검찰개혁은 처음부터 힘없는 서민이 아니라 철저히 민주당 엘리트들을 위한 기획이었다. 그 수혜자는 처음에는 노무현, 그러다가 조국이었다가 지금은 이재명이 되었다.
다시 연어회 술자리 꺼낸 것은 이화영 사면과 이재명 공소 취하를 위한 장난, 대법관 증원은 대통령 퇴임 후 재판을 위한 보험, 배임죄 폐지는 이재명의 면소를 위한 대책. 하여튼 철저하기가 이를 데 없다.
이때 고통을 받는 것은 ‘실재계(reel)’. 이른바 ‘검찰개혁’으로 범죄자들은 살판이 났다. 부실수사, 부실기소, 공소유지의 어려움으로 무죄 받을 확률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반면, 피해자들은 이제 변호사비부터 걱정해야 한다.
개딸들의 정신은 상상계에 있을지라도 그들의 신체는 여전히 실재계에 속한다. 즉, 그들이 지지하는 정치인은 혜택을 보지만, 그들 자신은 그 잘난 개혁의 피해자라는 얘기. 그런데 왜들 자해적 행동을 하는 걸까?
상상계의 역할은 자기완성의 환상을 주는 것. 어차피 상징계는 실재계를 대리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무력해진 이들이 유튜브의 상상계에서는 의원들, 여당 대표, 심지어 대통령실까지 쥐고 흔드는 권력자가 된다.
헌법은 이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하나, 대의제하에서 이를 체감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개딸들은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 나라의 주권자임을 온전히 느낀다. 이 ‘정치적 효능감’은 마약만큼 짜릿하다.
물론 상상계가 상징계를 압도하고 실재계를 은폐한다고 실재계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그 가려지고 억눌린 고통들이 임계치를 넘어 상상계의 표면을 찢고 분출할 때, 그때 정권의 큰 위기가 올 것이다.
진중권 광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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