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가진 부녀 관계, 미국 좌파 운동의 실패가 불러온 비극
[김건의 기자]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폴 토마스 앤더슨(이하 PTA) 감독의 영화 세계의 전환점으로 볼 만하다. 단지 그가 만든 최초의 블록버스터라는 사실 때문은 아니다. PTA 이전부터 지금까지 미국의 과거를 해부하는 역사가였다. 1900년대 초 석유 산업을 대표하는 미국의 욕망(<데어 윌 비 블러드>), 1950년대 전후 미국을 은유하는 컬트문화(<더 마스터>), 1970년대 포르노 산업(<부기 나이트>)과 히피 문화의 종말(<인히어런트 바이스>)을 거쳐온 그는 미국이 어떻게 지금의 모습으로 망가졌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해왔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 영화에서 달라진 건 시제다. PTA는 줄곧 미국의 과거를 응시하고 진단해 왔었지만 마침내 현재를 응시한다. 그는 과거의 잔재와 현세대를 동시에 소환하며 묻는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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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 |
| ⓒ 워너브러더스 |
16년 뒤, 밥 퍼거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과 그의 딸 윌라(체이스 인피니티)가 사는 레드우드 숲속의 오두막은 혁명의 실패가 남긴 잔해를 상징한다. 밥은 혁명의 실패와 퍼피디아의 실종 여파로 대마와 술에 찌든 편집증 환자로 분한다. 그는 딸에게 스마트폰을 멀리하게 하며 언제든 위험에 빠질 수 있음을 은연중에 심어준다. 이러한 부녀 관계는 세대 간 단절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과거의 혁명이 남긴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아버지와 그 무게를 떠안지만 결국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딸.
윌라는 이전 세대의 갈등과 과오에 휩쓸리면서도 혼란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내려는 영화의 핵심이자 상징이다. PTA는 이런 부녀관계를 통해 미국 좌파 운동의 실패가 다음 세대에게 어떤 짐을 남겼는지 탐구한다. 밥이 <알제리 전투>를 거듭 시청하는 장면은 과거의 혁명 이상에 갇힌 세대의 무력함을 은유한다. 반면 윌라는 그 역사를 배우면서도 현재의 위기에 능동적으로 대응한다. 영화는 이 둘의 분리와 재결합을 통해 세대 간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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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 |
| ⓒ 워너브러더스 |
디카프리오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 보여준 코믹한 에너지를 무리 없이 발휘하면서도, 약물에 찌들어 정신이 흐릿한 혁명가의 비극성을 놓치지 않는다. 숀 펜은 극우 군인, 기독교 원리주의를 신봉하는 백인 군인이라는 캐리커처를 연기하면서 진실과 과장 사이의 위태로운 균형을 유지한다. 록조의 뒤틀린 성적 욕구와 인종적 집착은 평면적인 악당의 광기를 넘어서 미국 극우 세력의 심리적 병리를 드러낸다. 그가 가입하려는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이라는 백인 우월주의 비밀 결사는 SNL 스타일처럼 과장된 풍자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상징하는 메시지는 우스꽝스럽기보다는 현실적인 공포를 자아낸다.
밥과 윌라, 밥과 세르히오 간 대화는 모두 스크루볼 코미디의 빠른 대사 교환과 기지를 활용한다. 이런 코미디적인 순간들이 영화를 숨 쉬게 하지만 PTA는 결코 영화의 긴장을 완전히 풀어주지 않는다. 이러한 웃음 뒤에는 항상 폭력의 위협이 도사린다. 그는 왜 이런 장르적 혼합을 선택했을까? 이것은 단순히 스타일의 과시가 아니다. 정치적 메시지를 오락 안에 녹이는 전략이고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결정적 전환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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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 |
| ⓒ 워너 브러더스 |
영화는 벤자민 프랭클린에 대해 역사 시간에 가르치지 않는 것들, 권력자들이 진실을 신화로 바꾸고 인종 순수성을 강요하는 방식을 흐르는 대화 사이에 끼워넣는다.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시작된 미국 신화 해체 작업의 연장선이다. 그러나 이전 영화들이 냉소와 절망으로 끝맺으며 과거의 과오를 다루는 선에서 끝났다면 이 영화는 말미에 희망의 불씨를 피우며 PTA 필모그래피에서 아주 낯선 낙관주의를 보여준다. "계속 싸워라(Keep fighting)"라는 메시지는 그의 가장 직접적이고 희망적인 선언이다.
록조를 위시한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역사 왜곡 시도는 현재 미국 사회의 교육 검열과 문화 전쟁을 직접적으로 반영한다. PTA는 과거를 다룬 영화들에서 이미 이런 왜곡의 뿌리를 추적해 온 전적이 있다. 그리고 이제 그 결과물이 현재에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준다. 혁명 조직 '프렌치 75'는 1960,70년대 급진 조직 'Weather Underground'를 연상시키지만 영화는 그들의 실패를 단순 비판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꿈꿨던 저항 정신을 다시금 더듬는다. 그 방법이 바로 블록버스터다.
그는 예전 인터뷰에서 "영화 학교를 중퇴한 이유는 교수가 < 터미네이터 2 >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으면 떠나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그 반항의 결실이자 PTA만의 <터미네이터2>다. 1억 5천만 달러가 투입된 영화는 제임스 카메론의 액션 문법과 토마스 핀천의 문학적 복잡성을 결합한다. 두 명의 전사가 한 소녀의 미래를 놓고 추격전을 벌인다는 설정은 <터미네이터 2>를 직접 참조했지만 PTA는 그 구조 안에 현대 미국의 정치적 위기를 녹여낸다.
이 영화가 주류 블록버스터 형식을 취하면서도 급진적인 이유는 그것이 좌파 혁명 운동의 실패를 진지하게 다루면서 오락적 쾌감 또한 생생하게 살려냈기 때문이다. 미등록 이민자들이 모인 도시 박탄 크로스에서 시위대와 진압 경찰이 충돌하는 장면은 게릴라 다큐멘터리같은 즉물성을 가지면서 액션 영화의 스펙터클로서도 기능한다. 영화는 직접적으로 정치적 메시지를 설교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액션을 배치한다.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이 만드는 리듬, 장르 혼합이 창출한 긴장과 이완, 그리고 블록버스터의 형식이 모두 하나의 목표를 향한다.
관객을 즐겁게 하면서 동시에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세르히오 세인트 카를로스는 영화가 제시하는 저항의 모델처럼 보인다. 베니치오 델 토로가 연기한 이 인물은 미등록 이민자 공동체의 지도자다. 그는 밥의 혼란스러운 에너지와 대비되는 모습을 보이며 늘 침착하게 행동한다. 이민자들을 향한 끊임없는 습격과 좌절에도 불구하고 한 번에 한 전투씩 싸워나가는 실용적 저항을 체현한다. 윌라가 배우는 태도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감독 스스로가 영화를 통해 보여주는 태도이기도 하다. 과거의 혁명이 실패했다고 해서 저항을 포기하고 과거를 돌아보는 것만이 아닌, 형식을 바꿔가며 끝없이 계속 싸워 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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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스틸 |
| ⓒ 워너 브러더스 |
영화는 마치 관객에게 지치지 않았는지 묻는 것만 같다. 갈등이 일상이 된 시대, 변화를 꺼리고 관성적으로 끌려가는 시대에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혁명가들처럼 모든 것을 걸고 폭력이라는 방식을 택하는 게 아니다. 한 번에 한 전투씩, 체계적으로, 연대하며 싸우는 것이다. 그 싸움은 이제 블록버스터라는 형식 안에서도 가능하다. 더 많은 사람에게 닿기 위해서 블록버스터라는 형식을 택한 것이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이 역사가에서 행동주의자로 전환한 순간을 기록한다. 그는 더 이상 미국이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만 묻지 않는다. 이제 그는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지 질문하고 그 답을 가장 대중적인 형태로 제시한다. 세대 간 단절을 음악으로 구현하고 그 긴장을 장르 혼합으로 확장시킨다. 그리고 결국 블록버스터라는 형식 안에서 정치적 메시지를 완성한다. 이 모든 요소가 유기적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그 끝에 있는 메시지는 단 한줄이다. 사랑과 연대, 그리고 끝없는 전투. 영화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가장 큰 엔터테인먼트이자 가장 분노에 찬 영화이다. 그리고 동시에 희망을 내세우는 영화다. 혁명은 실패해도 저항은 계속될 것이라면서 말이다. 한 번에, 한 전투씩.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SNS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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