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 배송 언제 받을 수 있느냐" 전화 한 통, 생지옥에 빠졌다

강광순 2025. 9. 29.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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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도용 의심된다며 원격조정 권하고 금감원-검찰 돌아가며 사칭...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강광순 기자]

▲ 자료사진 
ⓒ anemos on Unsplash
지난 9월 15일 오전 9시 31분, "카드를 배송해야 하는데 언제 받을 수 있느냐"라고 물어 온 전화 한 통. 무심코 받은, 010으로 시작되는 전화가 내 하루를 송두리째 삼켜버렸다. 카드를 발급한 적 없다고 하자, 그는 카드사 번호라며 1551-0795를 알려주었다. 카드사에 확인만 하고 싶었다.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난 건지에 대해서.

"OO카드 담당 김*수입니다."

그는 "명의도용이 의심된다"라고 차분하고 친절하게 대응하며, 내 휴대폰을 원격 조정해서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통화 내용은 모두 녹취 중'이라는 말에 안도하며 그가 지시하는 대로 자판을 눌렀다. 무려 63분 동안 그는 능수능란하게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영어로 된 악성 앱을 지워주고, 끊임없이 대화를 유도해 냈다. "카드로 피해 볼 일 없게 조처를 해 놓았으니, 명의도용 여부는 금감원에서 확인하라"라는 메시지를 덧붙이면서 깔끔하게 마무리를 해 줬다.

곧바로 금감원 직원과 통화를 했다. 따뜻한 공감과 경청, 심리 상담사 같은 그의 태도에 바짝 얼었던 마음이 어느 순간 풀리고 말았다. 과거 전화 피싱의 경우 말투와 억양 등이 부자연스럽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는데, 그날 내가 통화한 사람들의 말투에선 어색한 부분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더더욱 방심할 수밖에 없었다. 금감원 박□□ 과장이라는 자는 누군가 내 이름으로 △△은행 계좌를 개설하여 거래 중이라며 증빙자료와 사건 번호까지 제시해 라인으로 보내왔다. 그러면서 아주 진지하게 "솔직하게 자백하면 도움을 주겠다"라고 회유했다. 절대로 △△은행 계좌를 튼 적도 없고 그런 거래를 한 적도 없다고 내가 단단히 못 박자, 그는 나를 신뢰하겠다면서 사건 내용은 서울지검에 송부되어 있으니, 그곳에서 확인해 보라 일러 주었다.

검사라는 사람은 다짜고짜 고함을 질렀다

금감원에 전화를 걸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서울지검도 네이버 검색창에서 대표번호를 찾아 통화를 했다. 하지만 나중에야 알았다. 맨 처음에 통화한 카드사 직원이라는 자가 내 휴대폰을 원격 조정해 악성 앱을 심어 두었고, 그 앱이 네이버 검색 결과까지 조작해 놓았다는 사실을. 겉으로는 정상적인 대표번호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피싱범들에게 연결되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 연유로 아무런 의심 없이 나는 그들이 파 놓은 함정에 깊숙이 빠져들고 말았다.

검사라는 자는 다짜고짜 고함을 질러댔다. "해외 송금 기록이 이렇게 많은데 발뺌하겠습니까? 당신은 이미 혐의자입니다." 이어 도주의 우려가 있으니 당장 지검으로 출두하라고 겁박을 해 왔다. 복용하고 있는 약이 있거든 약도 챙겨 오라면서 법원 차량을 보내 준다고 목을 꽉 조여왔다.

나에게 온정을 베풀어 주었던 금감원 직원에게 벌벌 떨며 구원을 청했다. 그는 "검사에게 약식기소를 요청하여 시간을 벌어라. 그 안에 해결책을 찾아보자"라고 속삭였다. 검사에게 약식기소 요청을 하자, 그의 목소리는 포효하듯 거칠었다. "무슨 X소리야! 공범이 8명이고 당신이 갚아야 할 돈이 1억 7천만 원이야. 당신은 혐의자라 도주의 우려에다 공범들하고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는데 당신을 어떻게 믿어?" 순간, 세상이 무너져 내린 듯 앞이 캄캄했다. 그들이 채찍과 당근으로 쥐고 흔드는 통에 나는 속절없이 점점 더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검사로부터 어렵사리 약식기소를 허락받은 나는 금감원 박□□의 다음 지시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신협에 든 적금은 위험하니 해약해서 농협(입출금 계좌)이 안전하다고 그곳으로 돈을 옮기라"라고 했다. 잠시 멈칫하던 참에 긴급번호(112)로 전화가 왔다. 금감원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라는 요청이 들어왔다면서 위치추적에 동의할 것인지를 물었다. 그러면서 교묘하게 무슨 일인지 말해 줄 수 있는지를 물었지만, 나는 얼버무리고 말았다. 이 건에 대해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것임을 강요당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금감원에서 나를 보호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안도감을 느끼면서, 은행으로 향했다.

아들의 단호한 한 마디에 털썩
 전기통신금융사기 통합신고대응센터가 24시간·365일 운영을 시작한 9월 17일 서울 종로구 통합신고대응센터에서 직원이 전화 상담을 하고 있다. 정부는 8월 28일 '보이스피싱 근절 종합대책'을 발표한 바 있다. 대책에 따라 경찰청을 중심으로 관계기관이 참여하는 전기통신금융사기 통합대응단이 출범할 예정이다.
ⓒ 연합뉴스
은행을 불과 1km 앞두고 신호등에 딱 걸렸다. 순간, 뇌리에 전광석화처럼 스쳐 지나가는 생각 하나. "혹시 지금 나, 보이스피싱을 당하고 있는 게 아닐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핸들을 급히 꺾었다. 내 휴대전화는 원격조정을 당하고 있으니 남편 전화로 아들과 통화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집을 향해 숨 가쁘게 차를 몰았다.

"엄마, 그거 전화금융사기야." 두어 마디도 채 듣지 않고 아들의 단호한 한마디에 나는 그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신고하기 위해 곧장 경찰서로 향했다. 수사관은 "피해를 보지 않아 큰 다행"이라며, 실제 피해가 발생해도 범인 검거는 쉽지 않다고 했다. 피싱범들이 대포폰을 이용하기 때문이라는 부연 설명을 곁들여 줬다. 수사관은 내 휴대전화에서 악성 앱들을 삭제해 주며 "청첩장이나 부고장도 열기 전에 반드시 당사자에게 확인하라"라는 당부를 덧붙였다.

다섯 시간 동안 나는 생지옥에 갇혀 있었다. 인간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존재인지, 뼈저리게 확인한 시간이었다. 사건을 되돌려서 생각해 보니 멈출 수 있는 순간은 많았다. 카드사 번호를 네이버에 직접 검색해야 했고, 원격조정을 거부해야 했으며, 또한 발설 금지 압박에 대해서 특히 의심했어야 했다. 하지만 금감원 담당자라는 자의 과도한 공감, 검사의 고압적 겁박, 공공기관의 이름이 주는 무게감에 짓눌려 생각하는 것을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금융사기가 아니다. 인간의 심리를 교묘히 파고드는 범죄다. 어리석거나 무능해서 당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걸려들 수 있는 늪이다. 인간은 권위 앞에서, 두려움 앞에서, 따뜻한 공감 앞에서 방심한다.

의심은 불신이 아니다. 최소한의 방어다. 의심 없는 믿음은 맹목이고, 맹목은 언제든 인간을 파멸로 몰아넣는다. 인간은 믿음 없이 살 수는 없지만, 또한 의심 없이 살아남을 수는 없다. 이것이 이번 사건이 내게 남긴 가장 뼈아픈 교훈이다.

이미 많은 이들이 알고 있겠지만, 간단한 예방 수칙을 공유한다. 우선 ▲기관 연락처는 공식 홈페이지나 신문·공식 문서로 직접 확인해라 ▲기관(은행이나 금융사)은 전화로 원격 조정을 요구하지 않으니 허용하면 안 된다 ▲아무한테도 얘기하면 안 된다는 말은 무조건 의심해야 한다 ▲검찰이 일반인에게 직접 전화해 겁박하지 않는다 ▲만약 통화가 되었을 때 의심이 생기면 다른 사람 폰으로 즉시 경찰(112)나 금융 당국에 신고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마무리하고 나서 휴대폰 통화 내역을 확인해 보니 그들이 내 폰으로 신협 콜 센터에 전화를 했다.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내 폰에 발신 전화가 찍혀 있었다. 내가 급작스레 연락을 끊어 버려서 그들은 얼마나 황당하였을까. 목전까지 온 돈을 놓쳤으니. 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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