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근의 시시각각] 귤이 탱자가 된 배임죄 폐지 논란

정철근 2025. 9. 29. 00:2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정철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한국에서는 투자 결정을 잘못하면 배임죄로 감옥에 갈 수 있다. 판단과 결정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기업의 속성인데 이러면 위험해서 어떻게 사업을 하느냐.”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5일 제1차 핵심규제 합리화 전략회의에서 배임죄 폐지 의사를 밝혔다.

“이재명 대통령이 대장동, 백현동, 성남FC, 경기도 법카에서 걸려 있는 게 배임죄다. 그걸 무죄 받을 자신이 없으니까 죄가 안 되는 것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는 24일 한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여당의 배임죄 폐지 움직임을 비난했다.

「 여 “불합리한 기업 규제 폐지해야”
야 “이 대통령 배임죄 면소 의도”
정치적 법 개정, 국민에 피해 줄 것

기업인에게 배임죄를 무리하게 적용한 최악의 사례는 이재용 삼성그룹 회장의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사건이다. 검찰은 사주 일가 지분이 많은 제일모직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자회사인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몸값을 ‘뻥튀기’하는 대신 삼성물산 가치는 낮춰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피해를 입힌 혐의로 기소했다. 배임죄의 핵심은 실질적 손해를 끼쳤는지 여부다. 하지만 2015년 제일모직과 합병 당시 기준가 6만6602원이었던 삼성물산 주가는 현재 19만원 안팎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13만6000원으로 시작해 현재 100만원을 넘는 코스피 시총 4위의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검찰은 수사 과정에서 전매특허인 ‘무더기 소환’과 ‘싹쓸이 압수수색’을 남발했다. 검찰은 삼성바이오로직스 공장을 압수수색하면서 백업 서버 파일 778만 개를 모두 가져갔다. 증거자료를 선별하는 과정에서 회사 관계자나 변호인 참여도 배제됐다. 법원은 대법원 판례에 따라 무리한 압수수색을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다. 1·2심과 대법원까지 이 회장에 대한 19개 혐의에 전부 무죄를 선고했다.

이재용 회장의 배임죄 수사는 당시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 지휘했다. 수사팀장은 한동훈 서울중앙지검 3차장검사, 경제범죄형사부장은 이복현 전 금융감독원장이었다. 이복현 전 원장은 지난 2월 항소심 무죄판결이 나오자 “국민과 후배 법조인들께 사과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피해자인 삼성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검찰은 ‘묻지 마 상고’로 사건을 대법원까지 끌고 갔다. 4년10개월간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삼성은 설비투자 등 주요 의사결정을 중단하거나 미룰 수밖에 없었다.

9월 2일 열린 '경제형벌 민사책임 합리화 TF 출범식'에서 김병기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정부·여당은 지배주주의 사익 추구를 막기 위해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 명문화 ▶3%룰 강화 ▶집중투표제 의무화 등 상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대주주에 대한 견제 장치가 충분히 확보된 만큼 1953년 제정 이후 한 번도 내용을 고친 적이 없는 형법상 배임죄는 폐지 또는 완화할 필요가 있다. 식민지배와 전쟁을 겪은 후진국 때와 현재의 환경을 같은 법으로 의율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그러나 법 개정은 그 목적을 달성하고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법조계·학계·이해관계집단의 의견을 수렴하는 사전 공론화 작업을 거쳐야 한다. 특히 기업인에 대한 배임죄를 폐지하더라도 지방자치단체장 등 공무원의 배임죄도 함께 없애야 하는지에 대해선 충분한 논의를 해야 한다. 이 대통령은 대장동과 백현동 사건으로 배임 혐의를 받는 이해 당사자다. 기업인 규제를 풀어준다는 명분으로 공무원의 중대 과실까지 은근슬쩍 면죄부를 줘선 안 된다. 한동훈 전 대표도 검사 시절 배임죄를 남용한 책임이 있다. 정치적 공격의 수단으로 삼기 전에 자기반성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달콤한 귤도 환경에 따라 시고 떫은 탱자처럼 성질이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지금 배임죄를 둘러싼 정치권의 공방을 보면 본질이 완전히 변질한 느낌이다. 법 개정은 정치권의 이해보다는 국민에 미치는 영향을 우선 고려해 추진돼야 한다. 정치적 의도에 따라 법을 마음대로 바꾼다면 그 피해는 결국 국민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다.

정철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