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은 왜 한국SGI를 핍박했나…조성윤 제주대 명예교수 [월간중앙]

2025. 9. 28.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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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 인터뷰]

“‘굴종적 한일회담’으로 위기 몰린 朴 정권 시선 돌리려 ‘왜색 종교’ 덧씌워 마녀 사냥”
치안국이 프레임 씌우고, 문교부가 전대미문 포교 금지령
회원 잡아 들이고 사찰…“종교 자유 무색한 엄혹의 시대”

2019년 발간된 〈1964년 어느 종교 이야기〉(당산서원)는 창가학회(創價學會)가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받았던 박해의 역사를 전면에 다뤘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사회학자인 조성윤 제주대 명예교수가 당시 자료와 생존자들에게서 수집한 구술기록을 토대로 한 책의 내용은 역사서에 버금갈 만큼 세밀하다. 내용도 충격적이다.

당시 치안국 정보과는 창가학회에 왜색(倭色)·유사(類似) 종교 프레임을 씌웠고, 문교부는 이를 근거로 포교 금지령을 내렸다. 정권이 공권력을 동원해 특정 종교를 핍박한, 헌정사 유일무이한 사건이다.

왜 창가학회는 정권의 표적이 되어야만 했을까. 왜 당시 프레임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을까. 조성윤 제주대학교 명예교수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조성윤 제주대학교 명예교수는 지난 9일 인터뷰에서 “마침 비난의 화살을 돌릴 타깃이 필요했던 박정희 정권은 창가학회에 친일 프레임을 씌웠다”라고 말했다. 김정훈 기자


자매결연 계기로 창가학회 연구 시작

Q : 일본에서 시작된 불교단체 ‘창가학회’를 2000년 이래 연구해왔다. 왜 창가학회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나.

A : “사회학 중 역사·종교 분야를 주로 연구했는데, 1990년대까지만 해도 창가학회는 조사하기가 싫어서 일부러 연구 대상에서 제외했었다. 당시만 해도 창가학회란 이름 대신 ‘남묘호렌게쿄’라고 불려 거부감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1998년 제주대학교가 일본 동경에 있는 소카대학교와 자매결연을 진행하던 중 보류된 사건을 계기로 관심을 갖게 됐다.”
(창가학회를 ‘남묘호렌게쿄’라고 지칭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창가학회 신자가 수행을 위해 되뇌는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의 일본식 발음인 ‘남묘호렌게쿄’를 종교명으로 오해하면서 인식이 굳어졌다. 창가(創價, Soka)란 가치를 창조한다는 의미로, 창가학회는 ‘가치를 창조하고, 배우기 위한 모임’이라는 뜻이다.)

Q : 제주대 내에서 자매결연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나 보다.

A : “창가학회에 대한 오해가 깊은 일부 교수들이 자매결연 추진을 강하게 반대했다. 반대하는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 게 아니라 세간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제주대는 일단 자매결연을 보류하고서 내게 창가학회에 대한 조사를 맡겼다. 2주 뒤 열리는 회의 전까지 자매결연을 맺어도 좋을지 알려달라고 했다.”

Q : 조사를 통해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됐나.

A :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로 국내 창가학회 회원을 조사했던 친구에게 부랴부랴 전화해 물었더니, ‘소문과 달리 아무런 문제가 없는 종교이니 자매결연을 맺어도 괜찮다’고 하더라. 내가 직접 조사하기에도 문제가 없어 보여서 제주대에 그대로 의견을 전달했다. 자매결연 후인 1999년 제주대를 방문한 이케다 다이사쿠 국제창가학회(SGI) 회장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고, 해마다 두 대학 학생들이 교류하게 됐다.”

Q : 학자로서 2주간의 조사는 매우 짧다고 느꼈을 것 같은데.

A :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아직 창가학회에 대해 온전히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학자로서 섣부른 짓을 한 것은 아닌지 걱정됐다. 그래서 2000년 일본으로 건너가 문헌을 찾아보고, 집회에 참석하는 등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2006년 일본 창가학회 신자들을 1년 동안 40명 넘게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2013, 한울아카데미)을 발간하기도 했다.”
조성윤 교수는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사회학과를 나와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줄곧 서울에서 살다가 1982년 제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하면서 제주에 정착했다. 사회학 중 종교·역사 분야를 주로 연구하며, 저서로는 〈제주지역 민간신앙의 구조와 변용〉, 〈일제 말기 제주도 일본군 연구〉, 〈빼앗긴 시대 빼앗긴 시절:제주도 민중들의 이야기〉, 〈창가학회 재일한국인〉, 〈1964년 어느 종교 이야기〉 등이 있다.

Q : 창가학회는 어떤 경로로 국내에 들어오게 됐나?

A : “이승만 정권 때까지만 해도 우리 경제는 원조에 의존하는 상태였다. 반면 일본은 한국전쟁에 의한 반사이익을 기반으로 산업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있었다. 1960년대는 상대적으로 부유한 재일교포들이 우리나라 고향을 자주 방문한 시기였다. 그렇게 재일교포의 친척과 지인들을 중심으로 창가학회 회원이 우리나라에서 늘어났다.”

Q : 당시 재일교포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A : “양가적 감정이 있었을 거다. 부자 나라에서 잘 차려입고 선물을 들고 고향마을을 찾아오는 친척이나 이웃 지인의 모습이 부러우면서도,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일본에 의해 식민 지배를 받았던 아픔 때문에 그들의 방문을 불안해하는 면도 있었다.”


전국에서 시위…비난 화살 돌릴 대상 물색해

Q : 당시 일본 창가학회의 조직적 포교 활동은 없었나?

A : “국제적으로 뻗어 나간다는 개념과 조직이 없었던 상황에서 재일교포들이 자발적으로 포교하면서 지금의 규모로 성장하게 된다. 이에 창가학회 본부도 국제부와 같은 조직을 만들어서 세계로 뻗어 나가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1963년 말 한국 조직 구성을 도와주기 위해 대표단을 선발해 우리 외무부에 비자를 신청하는데, 이를 알게 된 외무부에서 난리가 났다.”

Q : 반일 감정 때문인가?

A : “1961년 쿠데타(5·16 군사정변)에 성공한 박정희 정권은 과거 이력(일본군 육군 장교 등) 때문에 친일 이슈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일본에서 시작된 불교단체인 창가학회에서 비자를 신청했으니 그야말로 뒤집어진 것이다. 특히 1963년에는 박정희 정권이 굴종적인 자세로 한일회담에 임했다며 전국에서 시위가 일어나던 때라서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에 치안국 정보과에서 외무부에 비자를 내주지 말라고 압박하기에 이른다. 군 출신이 주축이 된 치안국 정보과는 해방 직후부터 정보를 총괄하면서 우리나라를 좌지우지했다. 독재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여론 조작도 서슴지 않던 곳이다. 마침 비난의 화살을 돌릴 타깃이 필요했던 박정희 정권은 창가학회에 친일 프레임을 씌우게 된다. 1964년 1월 문교부는 왜색 종교라는 이유로 창가학회에 포교 금지령을 내린다.”

1963년 6월 3일 서울 시내에 모인 1만5000여 명의 대학생이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중지하라”며 박정희 대통령 하야 등을 요구하는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벌였다. [중앙포토]

당시 치안국 정보과는 창가학회가 위험한 종교단체이자 정치 단체라는 보고서를 만들어 각 언론사에 뿌렸다고 한다. 1964년 1월 주요 신문에서 ‘왜색종교 창가학회의 국내 침투’라는 기사를 집중적으로 내보내기 시작했고, 급기야 내무부장관 명의로 ‘이 종교의 집회와 포교를 금한다’는 행정처분이 내려졌다. 당시 일부 회원들이 ‘외환관리법 위반’이라는 근거 없는 죄목으로 체포돼 심문을 받기도 했다.

Q : 일본의 신흥종교인 천리교도 한국에 들어와 있었지만, 창가학회처럼 박해받지는 않았다. 왜 창가학회가 타깃이 됐다고 생각하나?

A :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고 얼마 뒤 전국의 종교단체와 시민사회단체에 대한 등록령을 내렸는데, 천리교는 발 빠르게 대응해 법인 등록을 마친 상태였다. 또 천리교는 교세가 강해 잘못 건드렸다가는 정권이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었다. 1960년대 초 신자가 50여 만 명에 달했기 때문에 정권 입장에서는 건드리기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반면 창가학회는 신자가 3000명도 안 됐고, ‘남묘호렌게쿄’라고 일본어로 주문을 외운다고 하니 ‘마침 잘됐다’ 싶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5년 12월 17일 한일협정 비준서에 서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포교 금지령에 대한 행정소송에서 승리

Q : 치안국에 잡혀갔던 창가학회 회원들은 어떻게 됐나?

A : “조사하면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치안국이 창가학회 회원을 이런저런 이유로 막 잡아들였지만, 재판에 넘겨졌다는 기사는 단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이를 조사하기 위해 과거 치안국에서 일했던 경찰 책임자들에게 물어보니 ‘잡아들여서 며칠씩 겁주고 창가학회 활동을 그만두게 만든 뒤 풀어줬다’고 하더라.”

Q : 처벌할 근거가 없어서 그랬던 것일까?

A : “그렇다. 상부에서 창가학회를 탄압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지만, 이 사람들을 집어넣을 근거가 없었다. 신문은 마치 창가학회가 재일교포를 통해 포교라는 형태로 간첩 비슷한 활동을 한다고 보도했는데, 정작 확인해보니 아니었던 것이다. 회원들은 ‘창가학회는 불법을 저지른 적이 없는데 왜 우리를 탄압하느냐’며 정부에 탄원서를 계속 보냈다. 포교 금지령에 대한 행정처분 취소 소송에서도 창가학회가 승리하게 된다.”
창가학회 회원들은 내무부장관을 상대로 ‘행정처분 취소 청구 소송’을 제기해 1965년 서울고등법원으로부터 ‘창가학회의 포교를 위한 집회 및 통신연락과 간행물의 반입, 배포, 취득, 열람을 금지한다는 처분을 취소한다’는 승소판결을 받았다. 1966년 대법원 판결을 통해 종교의 자유는 헌법상 보장돼야 할 권리라는 점을 재확인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왜색종교라는 편견과 오해는 오랫동안 지속됐다.

조성윤 제주대학교 명예교수의 서재에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종교·역사에 관한 책과 연구 자료들이 빼곡히 꽂혀 있다. 지난 9일 인터뷰에서 그는 “선한 종교들이 연대해 사회의 방향을 잡아가는 것이 요즘 시대에 매우 중요하다”라고 했다. 김정훈 기자

Q : 창가학회가 결과적으로 정권의 모진 탄압을 이겨냈지만, 상처가 크게 남았다. 아직도 왜색 종교, 유사 종교라며 거부감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다.

A : “해방 후 80년이 지났지만, 두 개(왜색·유사 종교)의 프레임이 지금도 남아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국제사회로 뻗어 나가는 데 장애 요인이고, 국내에서 종교가 사회적 역할을 제대로 하는 데에도 큰 마이너스다. 나는 이 두 프레임을 이제는 극복해야 하며, 그 시작이 창가학회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라고 생각한다. 창가학회 역시 좋은 활동을 계속 이어나가 본인들에게 씌워진 프레임을 극복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Q : 종교의 순기능이 커지기 위해 교단은 어떻게 해야 할까?

A : “우리 사회에 어떻게 공헌할지 분명한 방침을 세워 교육하고, 좋은 일을 위해 다른 교단 등과도 연대하는 활동이 많아져야 한다. 그런 것을 우리는 공공 종교라고 한다. 개인의 신앙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전체의 공동선과 연대를 추구하는 것이다. 세계 평화와 환경 운동을 가장 열심히 하는 종교 단체가 이에 해당한다. 그런 선한 종교들이 연대해 사회의 방향을 잡아가는 것이 요즘 시대에 매우 중요하다.”

Q : 창가학회는 예전부터 세계 평화와 핵 폐기, 인권 증진 등을 주창해왔다.

A : “내가 보기에 창가학회는 공공 종교라고 불릴 만하다. 옛날 방식으로는 사람들의 희망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해 의례 등을 바꿔 근대적인 조직으로 등장했다. 창가학회 제2대 회장인 도다 조세이 선생이 세계 평화, 전쟁 반대, 핵 폐기 등을 주장하셨는데, 이것이 유훈이 되어 제3대인 이케다 다이사쿠 회장이 계승·발전시켰다. 그러니 일본에서 시작된 종교라고 해서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최현목 월간중앙 기자 choi.hyunm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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