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살펴본 경기도지역 동학의 전파와 전개 과정

용인시민신문 정정숙 2025. 9. 25.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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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 발굴] 동학농민 혁명과 용인

[용인시민신문 정정숙]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에 대하여 경기도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구자료는 그간의 전라, 충청, 경상 등에 비하여 소수의 연구자에 의하여 적으나마 진행되어 왔다. △최홍규 '경기지역의 동학과 동학농민군 활동'(동학학보3) 2002 △성주현 '경기지역 동학혁명과 동학군의 참여과정' (수원문화사연구)7권 2005 △표영삼 '경기지역 동학혁명운동'(교리교사연구)10호, 천도교중앙총부 2006 △신영우 '1894 경기도지역의 상황과 동학농민군 진압'(동학학보45) 2017 △이병규 '경기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과 성격'(동학학보60) 2021 등의 연구자료를 통하여 경기지역에서 전개된 동학의 포교 및 동학농민혁명군의 활동에 관한 내용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 용인시민신문
경기도 지역 동학 유입과 전개

1860년 경주 용담에서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는 1861년부터 적극적으로 동학 포교를 시작하였다. 동학은 경주를 중심으로 1년도 되지 않아 경상도 일대에 널리 확장되었고 새로운 삶을 갈구하던 민중들에게 급속도록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넓은지역으로 교세가 확장되자 이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수련시키기 위하여 교단을 조직화 하기 위하여 1862년 12월에 경상도 흥해지역에서 접주제를 시작하였다. 이때 임명한 접주 명단을 보면, 경주에 이내겸(李乃謙) 백사길(白士吉) 강원보(姜元甫), 영덕에 오명철(吳明哲), 영해에 박하선(朴夏善), 대구 청도 겸 경기 일도에 김주서(金周瑞), 청하에 이민순(李敏淳), 연일에 김이서(金伊瑞), 안동에 이무중(李武中), 단양에 민사엽(閔士燁), 영양에 황재민(黃在民), 신녕에 하치욱(河致旭), 고성에 성한서(成漢瑞), 울산에 서군효(徐君孝), 장기에 최중희(崔仲羲) 등이다.

위 내용을 보면 대구 청도 겸 경기 일도에 김주서를 접주로 임명한 것을 알 수 있다. 김주서는 영일군 출신으로 1861년 봄, 최세조, 이내겸, 백사길, 강원보, 박여대, 오명철, 최경상, 박하선, 이무중, 김이서, 민사엽, 하치욱 등과 함께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 선생에 의해 최초로 동학에 입도하게 된다. 그리고 1863년 12월 10일 수운과 함께 체포된다.<도원기서> 그렇다면 경기도에 동학이 포교된 시기는 1862년 12월 이전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타 지역 접주는 1명 내지 3명까지 임명된 것에 비하여 경기도는 대구 청도의 접주를 겸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렇게 많은 교도가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지만 전라도 등 타 지역에 비하여 접주가 이미 임명되었다는 것은 경기지역이 일찍부터 동학이 포교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학 경전 간행과 동학의 전파

이후 동학은 2세 교주 해월 최시형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크게 확장하게 된다. 해월 선생은 1880년 인제군 갑둔리에 있는 김현수(金顯洙) 집에서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을 간행하게 된다. 이어 1881년에는 단양군 남면에 있는 여규덕(呂圭德) 집에서 순 한글인 동학경전 '용담유사(龍潭遺詞)'를 간행하게 된다. 동학의 핵심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가 간행된 후 동학의 전파는 더욱 확장되었고 지식인을 포함하여 일반 민중들에게도 쉽게 동학 교리를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무렵 경기지역의 첫 동학교도로 일컬어지는 이민도(李敏道)가 입도한 사실이 확인된다. 이민도는 1850년 진위군(현 평택시) 현덕면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한 유학자였다. 1880년 29세에 동학에 입도하였다. 그는 진위와 수원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1890년 해접주(該接主)로 활동하였다. 안승관, 김내현, 서병학 등과 더불어 수원지역 포교에 힘썼으며 많은 교도를 이루는데 크게 기여하고 수원교구 설립에 공헌하게 된다. 1893년 2월에는 신용구와 함께 수천명의 교도들을 이끌고 보은 집회에 참여하였다. 이민도는 1906년 천도교 중앙총부 설립 후에는 봉훈, 교훈, 전교사, 수원교구장(1912. 7~1913. 8) 등을 역임하고 봉황각 제6회 연성인(1913. 12. 18~1914. 2. 4)으로 참가하게 된다.<동학천도교 인명사전, 2023.>

해월 최시형은 1880년 인제 갑둔리에서의 동경대전 간행 이후 1883년 2월에 충청도 목천군 구내리 김은경 집에 인간소를 설치하고 동경대전(東經大全) 목천계미중춘판(木川癸未重春版) 1천여 부를 찍어 각 포에 배포하였다. 이때 동경대전 간행 배포 소식을 접하고 동학에 입도한 사람들이 많이 생겼는데 바로 수원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안교선(安敎善)도 이때 입도하게 된다.

안교선은 충청남도 아산군 출신으로 1883년 동경대전 계미중하경주개간(癸未仲夏慶州開刊)에 유사로 참여하고 1885년 2월에 수원지방의 안승관, 김정현에게 동학을 전도한 인물이다. 동학의 도접주(都接主)로 1894년 동학혁명에 참가, 피체되어 수원남벌원에서 처형되어 3일간 효수되었다. 이것을 보더라도 수원을 비롯한 경기지역에 동학이 전파된 것은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의 간행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1883년 3월 김연국, 손병희, 손천민, 박인호, 황하일, 서인주, 옹택규 등은 가르침을 받기 위해 강원도 인제에 머물고 있는 해월 선생을 만나러 갔다. 이들과 함께 간 서인주(徐仁周)는 수원 출신으로 훗날 서병학, 윤성화와 함께 동학의 여러 의식과 제도를 제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서인주는 안교선과 함께 수원을 비롯한 경기지역에 동학을 포교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1884년에는 경기지역에서의 동학 포교활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난다. 안교선의 전도로 입도한 안승관(安承寬)과 김내현 (金鼐鉉)이 앞장서서 동학을 포교함으로써 동학의 교세확장이 점차 이루어진 것이다. 이들의 포교활동 성과를 '수원종리원연혁'을 통해서 알아보면, 포덕31년(1890년) 경인(庚寅)에 서병학, 장만수, 이규식, 김영근, 나천강, 신규식, 제씨가 육임이 되고, 안승관씨는 기호대접주, 김내현씨는 기호대접사 되야, 해접주 임병승, 백난수, 나천강, 신용구, 나정완, 이민도외 제씨의 간선으로 각지에 신도가 수만에 달한다.

1884년 안교선으로부터 비롯한 수원지역 포교활동의 성과는 1890년대에 와서 동학도의 수가 수만에 이를 정도로 확장되었다. 교도의 수가 증가하여 효율적인 관리를 위하여 육임, 기호대접주, 기호대접사, 해접주 등의 직책에 임명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호지역은 경기와 충청을 일컫는 말인데 안승관과 김내현은 수원을 포함한 경기와 충청일대에서 활동하였으며 이 지역 동학도들을 통괄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경기지역은 한양도성과 가까운 거리라 조정의 감시가 심했으며 타 지역에 비하여 비교적 동학의 전파가 늦게 이루어졌다. 따라서 비교적 일찍 동학이 전파된 충청과 강원지역의 영향을 자연스럽게 받았으며 수원 등 경기남부지역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충청지역 동학도들과 긴밀한 상호 연계 속에서 활동하였다.

콜레라 창궐과 동학의 전파

콜레라의 창궐도 동학도의 교세확장에 영향을 끼쳤다. 1886년에 경상도지역에서 처음 발생한 콜레라가 조선전역에 번지자 한 도의 호구 수가 줄어들 정도로 피해가 컸다. 이에 해월은 동학도들에게 위생에 철저히 주의하도록 지도하였고 이로 인해 동학도들은 콜레라 전염병을 피해 갈 수 있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동학에 입도한 사람들이 많아졌으며 경기지역도 폭발적으로 동학에 입도한 사람들이 증가하였다.

1888년 3월 해월 최시형은 "머지 않아 경사京司에서 반드시 죄를 꾸며 무고한 사람을 법으로 얽어 매는 화가 있을 것이니, 서로 왕래하지 말고 각자 조심하라"는 명을 내렸다. 1889년 조정에서는 그간 역병으로 느슨해진 감찰을 보다 철저하게 강화시켰다. 해월 선생이 사전 조처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10월에 신정엽, 서인주, 강한형, 정현섭 등이 붙잡혀 갔다. 관의 엄한 추포 속에서 동학의 포교활동은 더욱 어려워졌고 한양과 가까운 경기도 지역은 말할 것도 없었다.

교조신원 운동과 동학의 전파

1892년에 들어오면서 억울하게 죽은 수운 최제우의 원을 풀어주기 위한 교조신원운동이 전개되었다. 교조신원운동은 동학의 자유를 얻는 것 뿐만 아니라 각 읍의 수령, 서리, 토호 등의 동학교도들에 대한 박해, 침학을 금해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1892년 7월에 풀려난 서인주는 손천민, 서병학, 장세원 등과 은밀히 의논한 후 해월 선생에게 교조신원운동을 간청했다. 해월 선생은 일이 반드시 순조롭지만은 못할 것이니 은인자중하라고 했다.

그러나 10월 사방에서 많은 교인들이 관의 지목에 쫓겨 몰려와 교조신원을 청하니 해월 선생도 이를 허락하고 입의문(立義文)을 내어 교조신원운동을 지시하였다. 서인주와 서병학은 '각도동학유생의송단자'를 충청감사 조병식에게 전달하고 동학교도 1천여 명과 함께 감영 아래에 모여서 교조의 신원을 계달해 주고 갇혀 있는 동학교도들을 폴어달라고 호소하였다. 이것이 공주에서의 교조신원운동이었다. 이때 활약한 서인주는 앞에서 말했듯이 수원지역 출신이며 서병학은 오랫동안 수원지역에서 활동했던 인물이다.

공주교조신원운동에서 충청감사 조병식으로부터 '동학의 금지여부는 오직 조정에서만 처분을 내릴 수 있다'는 제사(題辭)를 받는 한편 '동학금단 과정에서 빚어지고 있는 각종 폐단을 금지하도록 하겠다'는 답을 받았다. 이에 해월 선생은 크게 고무되어 전라감영에도 의송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10월 27일 손천민에게 명하여 통문을 지어 각 곳의 동학교도들에게 반포하여 전라도 삼례에 모이도록 하였다.

11월 2일 전라도 삼례에 모인 수천명의 동학도들은 전라감사 이경직에게 의송단자를 보냈다. 두 차례 의송단자가 보내진 후 이경직은 각 읍에 감결을 내려 동학도들에 대한 관속배의 토색질을 일체 금단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동학도 지도부는 통문을 내려 해산을 지시하고 해월 최시형에게 법헌(法軒)이라는 호를 바침과 아울러 앞으로의 행동은 오로지 법헌의 지휘를 받도록 하였다.

공주와 삼례지역에서의 교조신원 운동을 통하여 동학도들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행동을 함으로써 교세를 크게 확장시켜 나갔다. 두 집회에서 발한 통문은 전국 각지에 있는 동학도들에게 전파되었고 두 집회에서 의송단자에는 이미 '척왜양', '보국안민'이라는 내용이 등장하고 있다. 한양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경기도 동학도들은 개항 이후 들어온 일본인들의 고압적이고 약탈적인 동향을 가까이에서 보았을 것이고 이에 따라 '척왜양', '보국안민'을 부르짖는 동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경기지역 동학교세가 크게 확대되기 시작했다.
ⓒ 용인시민신문
1893년 1월에 서병학, 손천민, 이용구 등이 다시 제세주의 억울함을 신원하기 위해 광화문 복합상소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동학교도들이 호응하여 이에 해월 선생도 허락하였다. 손천민의 집에 봉소도소를 설치하고 상소를 준비하였다. 2월 11일 소장을 받들고 광화문 밖에 나아가 복합상소를 하였다. 전국에서 수만에 이르는 동학도들이 복합상소에 참여하였다고 하는데 경기지역의 교도들이 가장 많았을 것이다. 수원지역에서 오랬동안 활동하고 있었던 서병학이 복합상소의 주도적인 대표 인물이었다. 이천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용구가 교인의 대표로 참여했음을 보면 수원, 이천지역 수많은 동학도들이 참여했을 것이다. 경기지역은 한양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 관의 기찰을 피해 많은 교인들이 비교적 쉽게 참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너희들이 귀가하여 생업에 종사한다면 바라는 대로 시행할 것이다." 국왕의 전언을 듣고 교도들이 사흘만에 해산을 하였다. 이 소식은 많은 민중들에게 전해졌고 민중들은 동학에 대하여 새롭게 인식을 하게 되었다. 경기지역 동학도들도 이 시기를 전후해서 입도한 사람들이 많다.

광화문복합상소 이후 10여 일이 지나서 국왕의 말이 기만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동학교도의 금단과 주모자들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내려져 동학도들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가중되었다. 이에 해월 선생은 1893년 3월 10일 유시문을 각 포에 통지하고 전국에 있는 동학도들을 보은 장내리에 모이도록 하였다. 3월 11일 보은장내리에는 전국에서 모인 수십만의 동학교도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경기지역에서도 보은집회에 수많은 교도들이 참여하고 있음을 4월 초에 올린 어윤중의 장계 내용에 들어 있다.

북면 구치의 장리들이 기록한 보고에는 이달 초 2일 신시(오후3시~5시)부터 초3일 사시(오전9시~11시)까지 동학의 무리로서 들어간 사람은 경기 수원접 840여 명, 용인접 200여 명, 양주와 여주 등 지역사람이 270여 명, 안산접 150여 명, 송파접 100여 명, 이천접 400여 명, 안성접 300여 명, 죽산접 400여 명, 중간 사잇길로 원평으로부터 충주로 향한 사람이 1,000여 명인데 이들이 사는 지방은 탐문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4월 2일 오후부터 3일 오전 사이에 보은집회에 참가한 경기지역 동학도들은 수원, 용인, 양주, 여주, 안산, 송파, 이천, 안성, 죽산 등지의 교도들이며 숫자는 2660여명 이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다른 길로 가거나 하루 늦게 참가한 지역도 있었을 것이므로 경기지역 참가 숫자는 더 많았을 것이다. 3월 20일에 탐지된 내용을 보면 중앙에 세운 깃발에 광의, 진의라고 쓰인 깃발이 있는데 광주, 진위에서 동학교도들이 참여했음을 알려준다. 3월 29일 탐지된 보고에는 "오시쯤에 광주 사람 수백명이 돈을 네바리 실어 왔다"라는 내용에서 광주지역에서도 동학교도 수백명이 참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보은집회에 수많은 동학도들이 참여할 정도로 경기도지역에서의 동학교세는 이미 매우 컸던 것으로 알 수 있다. 보은집회를 계기로 경기도지역에서의 포교는 더욱더 활발하게 진행된 것을 볼 수 있다. 1893년 4월 1일 양근 남종면에서 도자기 공인으로 일하는 지규식은 "동학의 시끄럽게 떠도는 소문은 아침저녁으로 바뀌어져서 믿을 수 없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처럼 동학도들의 활동상황이 수시로 입소문을 타고 공공연하게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다가 보은집회이후 경기도로 돌아온 동학도들은 관으로부터 그다지 심한 해를 입지 않아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포교활동이 이루어져서 동학에 입도하는 사람이 크게 늘어났다.

1894년 경기지역 동학은 교세가 더욱 확장되었다. 전라도지역에서의 동학농민혁명군의 기포소식은 경기지역 동학도들에게도 전해졌을 뿐만 아니라 7월에 일본군의 경복궁점령 소식은 경기지역 동학교도들에게 일본군에 대한 적개심을 더욱 가지게 하였다.

1893년 보은집회후 동학에 입도한 임동호가 술회한 "포덕35년(1894)에 교장직으로 업무를 보았다. 같은 해 8월 하룻밤에 700인까지 전교하였다"라는 기록을 보더라도 당시 민중들이 얼마나 많이 동학에 입도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무렵 경기지역 동학의 여러 지도자들이 부각되는데 양근 신재준, 지평 전태열 이재연, 광주 이종훈 염세환, 양지 조재당, 여주 홍병기 신수집, 이천은 금규석 전창진 이근풍(경기도 지역 동학도 이름)등 이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용인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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