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공순의 두근두근 제주 엿보기] (20) 제주 섭지코지 바람과 더불어 사는 협자연대

배공순 2025. 9. 25.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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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지코지 언덕. (사진=제주관광공사)

섭지코지…. 우리말이 아닌 듯 이름부터 신비롭다. 그곳에는 남다르게 거친 바람이 산다. 푸른 바다가 뒤채며 살고 붉은 송이도 흰 파도에 사그락거리며 산다. 언덕배기에는 아련하게 수평선을 바라보는 등대도 살고, 동화 같은 집과 우거진 오솔길도 산다. 그리고 오래된 봉수대도 살고 있다. 산에 있으면 봉수대 바다에 있으면 연대라 부르니, 이곳의 협자연대(俠子煙臺)는 바닷가 봉수대인 셈이다.

봉수대는 세종조에 시작되어 고종 때까지 이어진 조선의 군사 통신망이다. 연기를 피우거나 횃불을 올려 적의 침입을 신속하게 조정에 알리는 보고 수단이었다. 모든 봉수대는 한양의 남산 봉수대를 향해 불을 피워올렸다. 해상과 육상을 구분해 개수를 정해 두었다. 해상의 경우, 평시에는 1개의 홰를 올리다가 왜적이 해안에 나타나면 2개, 가까이 오면 3개, 우리 병선과 접전하게 되면 4개, 상륙하면 5개의 홰를 다급하게 올렸다. 육지에서는 적이 국경 밖에 나타나면 2개, 변경에 가까이 오면 3개, 국경을 침범하면 4개, 우리 군사와 접전하면 5개의 홰를 올리도록 했다.

서대문에 자리한 안산鞍山 봉우리에도 봉수대가 있다. 가끔 봉수대에 오를 때면, 북쪽을 바라보며 혹시나 몇 개의 횃불이 오르는지 살피던 옛 병사들이 떠오르곤 한다. 산꼭대기에서 옹색하게 밥을 지어 먹고, 쪽잠을 자며 눈을 부릅뜨고 보초를 섰으리라. 북쪽의 오랑캐와 바다로 숨어드는 왜구로부터 조선을 지키던 봉수대는 옛 모습을 잃었거나 복원되었고, 일부는 흔적으로 남아있다.

섭지코지 언덕에 오르던 어느 날, 바람은 요동치며 사무치게 불었다. 겉옷의 지퍼를 한껏 올리고 모자를 눌러쓰고는 춤추는 바람에 맞섰다. 이름을 생각해 본다. 섭지란, 재사才士가 많이 배출되는 지세를 이른다. 코지는 육지에서 바다로 톡 튀어나온 '곶'을 뜻하는 제주 방언이고 보면, 바람 불지 않는 섭지코지란 오히려 밍밍하고 허전할 것도 같다. 미친 듯 불어 제끼며 등을 떠미는 바람결에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이상하게도 생각은 명료해지던 기억이 있다. 들러붙어 있던 헛것들을 섭지코지의 날 바람이 날려버린 것인지….
안도 다다오의 글래스하우스. (사진=제주관광공사)

성산일출봉을 배경으로 한 섭지코지는 해안 풍경이 그만이다. 그 자체로 힐링을 주는 명화의 파노라마다. 들머리의 신양해변 백사장, 끝머리 언덕 위 평원에 드리워진 봄날 유채밭의 노란 실루엣, 여유롭게 풀을 뜯는 제주조랑말과 기기묘묘한 바위가 둘러싼 해안 절벽의 신비로움, 우뚝 치솟은 전설 어린 선바위가 제주이기에 뽐낼 수 있는 아름다움을 무심한 듯 펼쳐놓고 있다.

이곳 해안가는 제주 여느 곳과는 달리 송이라는 붉은 화산재로 되어있다. 밀물과 썰물에 따라 물속에 잠겼다가 일어서는 기암괴석들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자연 속 수석 전시회를 스스로 연출한다. 섭지코지의 밤바다를 보지 못했으나 아마도 낮과는 또 다른 낭만적인 풍경이 색다른 묘미를 줄 터이다. 어둠이 내린 새까만 밤바다에 집어등을 밝게 켠 어선들이 수도 없이, 둥둥 떠다니는 환상적인 그림과 일렁일렁 꿈틀거리는 붉은 물결을 보고 싶어진다.

화산섬 제주이니 이곳도 예외는 아니다. 그 옛날 땅 밑의 거대한 불기둥이 요동치며 치솟을 때, 마그마가 분출되던 분화구를 볼 수 있다. 섭지코지는 이 화도에서 분출된 스코리아(분석)가 쌓인 것이고 선돌 바위는 마그마가 굳어져 형성된 암경(volcanic neck)이란다. 이런 연유로 섭지코지는 육지의 형성 과정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자연학습장이기도 하다.
선돌 바위. (사진=제주관광공사)

그런가 하면, 선돌 바위에는 슬픈 전설도 전해 내려온다. 동해 용왕신의 막내아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에게 반하고 말았다. 용왕신은 백일기도를 명했으나 정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선녀와 혼인할 수 없게 되었다. 슬픔에 빠진 그는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주기만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그 자리에 선 채로 돌이 되어 버렸다는 것. 사랑을 이루지 못한 용왕신 아들의 애틋한 마음 때문인지 선돌 앞에서 사랑을 맹세하고 결혼하면 훌륭한 자녀를 얻을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진단다. 제주는 신당과 전설이 깃든 땅이니 어디라고 전설이 없을까만, 조상들의 재기 넘치는 이야기 솜씨가 지금의 K-Pop이나 K-Cuiture의 옹달샘이 아닐까 싶다.

거의 원형에 가까운 모습, 협자연대를 이루는 까만 돌을 바라본다. 시간이 묻어있다. 인근 북쪽으로 오소포연대, 서쪽으로는 말등포연대와 교신하였고, 정의현 소속 별장 6명, 봉수군 12명이 배치되었다는 설명을 보니 꽤 많은 병사가 근무했던가 보다. 나라든 개인이든 촘촘하고 듬직한 연대連帶가 필요한 것을, 우리는 모래알처럼 서걱대며 흩어져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새삼스레 둘러본다.

요즘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녹록지 않다. 세계 어디고 간에 태평성대를 누리는 나라는 많지 않은 듯하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힘의 논리로 악다구니하는 국제정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지금, 몇 개의 횃불을 밝혀 들어야 하는 걸까. 횃불은 묘하게도 사람을 의기투합하게 하고 용기를 내게 하고 마음을 모으게 하는 힘이 있지 않던가. 언제쯤 그 횃불 아래 모여 우리 모두 오롯이 하나 되는 순간이 있을까.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글라스하우스로 발길을 옮긴다. 승무를 추는 무희의 하얀 소맷자락처럼 나부끼는 바닷바람은 여전히 내 등을 떠민다.
남산 봉수대. (사진=다음백과)
배공순의 두근두근 제주 엿보기는...
수필가 배공순

나만의 소박한 정원을 가꾸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깊은 사유로 주변을 바라보고,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보태려 했던 것은, 문화재와 어우러지는 봉사활동이었다. 창경궁을 둥지 삼아 '우리 궁궐 지킴이'로 간간이 활동 중이다.

이곳저곳을 둘레둘레, 자박자박 쏘다닌다. 제주도 예외는 아니어서 올레를 걷고 오름에 오르기를 좋아한다. 사색의 오솔길을 오가며 사람 내 나는 이야기, 문화재나 자연 풍광, 처처 다른 그 매력을 소소하게 나누고 싶어 글을 쓴다.

<약력>

2016년《수필과비평》등단, 한국수필문학진흥회원, 제주《수필오디세이》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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