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길들이기냐 내치기냐...DB그룹 ‘아버지의 변심’ [스페셜리포트]
재계 40위 DB그룹이 부자 갈등으로 내홍을 겪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경영권 분쟁 가능성이 고개를 든다. 수면 아래 있던 부자 갈등은 지난 6월 김남호 회장이 돌연 명예회장으로 물러난 데 이어 법적 대응을 검토 중이란 소문이 퍼지며 삽시간에 확산했다. 2020년 취임 당시에도 김남호 회장을 두고 의사결정 권한이 없는 형식적 수장 아니냐는 의심 섞인 시선이 끊이지 않았던 터다. 재계와 시장 일각에선 부자 갈등이 경영권 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인사 등 실권 아버지 뜻대로
DB그룹과 재계에 따르면, DB그룹은 김준기 창업회장과 측근 지배력이 여전한 것으로 파악된다. 김남호 명예회장은 불과 석 달 전까지 그룹 회장이었으나, 지난 6월 말 돌연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를 대신해 회장 자리에 앉은 인물은 이수광 전 DB손해보험 사장이다. 1944년생인 그는 80대 고령으로 김 창업회장 최측근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이 회장은 전주고와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경제기획원 사무관을 거쳐 1979년 DB그룹에 합류했다. 동부고속과 동부화재(현 DB손해보험) 등 주요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를 거쳤다.
2020년 7월에 시작된 2세 경영이 불과 5년여 만에 막을 내리고 전문경영인 체제로 돌아선 것은 여러 면에서 석연찮은 대목이 많다. “대주주와 전문경영인이 돌아가며 경영을 맡는 일본 토요타 사례처럼 자율·책임 경영 체제가 확고히 뿌리내릴 것”이란 그룹 설명도 실상과 거리가 멀다는 시각이 많다. “경영 능력이 검증된 전문경영인을 중심으로 사업 경쟁력과 생존력을 높이기 위한 조치”라는 게 그룹 설명이지만, 사실상 아버지가 아들을 끌어내린 인사라는 게 지배적인 시각이다.
김남호 명예회장이 돌연 후선으로 물러난 것을 두고 재계와 시장에서는 여러 해석이 나온다. 앞서 김 창업회장은 2017년 9월 여성 비서 성추행 ·가사도우미 성폭행 혐의로 피소돼 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불미스러운 일로 사내이사직과 회장직을 내려놓았지만 재계에서는 아버지가 여전히 실권을 쥐고 있다고 봤다.
무엇보다 아들이 회장이 된 뒤에도 아버지 김 창업회장이 여전히 전권을 쥐고 있다는 정황이 곳곳에서 엿보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인사권이다. 김 명예회장이 그룹 회장에 취임했을 때 재계에서는 아버지 세대 물갈이 인사를 점쳤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아들 의중이 담긴 인사는 거의 없었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이는 DB그룹 실적과 자산 대부분을 차지하는 금융 계열사와 제조 계열 지주사 역할을 하는 DB Inc.(이하 DB) 이사회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김남호 회장 취임 뒤에도 김정남 DB손해보험 사장(1952년생), 이태운 DB생명 사장(1958년생), 고원종 DB금융투자(현 DB증권) 사장(1958년생) 등은 금융권 대표 장수 CEO로 자리를 지켰다. 이 가운데 이태운 DB생명 사장은 2020년 9월 김영만 현 DB생명 사장으로 교체됐다. 하지만, 김영만 사장도 아버지 사람으로 분류된다. 그는 김정남 DB손보 부회장과 경영기획·경영지원실장으로 손발을 맞춰온 인물이다. 김 창업회장 의중이 실린 인사로 볼 수밖에 없다.
제조 계열 지주사 역할을 하는 DB 역시 마찬가지다. 현재 DB 이사회는 사내이사 5인(김남호 명예회장, 문덕식·강운식 각자 대표이사, 이재형·정인환 사내이사)과 사외이사 3인(오규원·전군표·이병태 사외이사) 등 8인 체제다. 이 가운데 문덕식·강운식 각자 대표는 각각 2019년과 2017년 사내이사로 선임됐다. 김 명예회장이 그룹 회장에 이어 사내이사로 선임된 2021년 3월 이후에도 자리를 지키는 중이다. 2~3세 취임 후 아버지 세대 경영인과 ‘질서 있는 퇴진’을 단행한 대부분 재계 주요 그룹과 대조를 이룬다.
공정거래위원회가 공시하는 공시대상기업집단 지정 결과를 봐도 김 창업회장은 DB와 DB손해보험 모두 최대주주가 아님에도 기업 총수를 의미하는 동일인 자격을 유지하고 있다. 올 6월 말 기준 DB 최대주주는 16.83%를 보유한 김 명예회장이다. 김 창업회장은 15.9%를, 딸인 김주원 부회장은 9.87%를 갖고 있다.
사정이 이렇자 재계와 시장 일각에서는 김 명예회장이 지분 증여를 받았음에도 상당 기간 의결권 제한이 걸려 사내이사 교체 등 주요 의사결정 과정에서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시각이 있다. 법조계 관계자는 “후계자가 경영 경험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면 의결권 제한은 일종의 ‘학습 기간’을 제공하는 장치로 해석할 수 있다. 미국 등에서는 주주 간 계약에서 의결권 제한을 직접 조건으로 거는 대신, 신탁회사에 의결권을 맡기고 일정 기간 후 반환하는 형태의 증여는 종종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현재로선 부자 사이 주주 간 계약에 어떤 내용이 포함됐는지 명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특히, 주주 간 의결권 제한에 관한 계약을 체결했더라도 이는 당사자 사이에서만 효력이 유효할 뿐 회사에 대한 구속력은 없다는 게 우리 대법원 판례다. 즉, 당사자가 약속을 어기면 계약 위반이 되고 손해배상·계약상 권리 행사 등을 청구할 수 있다. 그러나 회사 주주총회 결의 자체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설령 주주 간 계약을 어기고 의결권을 행사해 결의가 통과되더라도 그 결의는 유효하다. 이 경우 약속을 어긴 계약 상대방을 상대로 “계약 위반이니 책임을 져라”라는 민사상 권리 구제는 가능하다. 예를 들어, 아들 김 명예회장이 주총에서 아버지 사람으로 분류되는 사내이사 해임을 시도하고 의결권을 행사했다면, 아버지 회장은 주주 간 계약을 근거로 아들을 상대로 계약 위반에 따른 소송을 낼 수 있다.
최근 수년간 주총 결과와 인사권 행사 정황 등에 비춰, 아들 김 명예회장이 의결권 제약이 걸린 상태로 아버지 뜻을 거스르고 의결권 ‘반란’을 시도한 경우는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DB가 공시한 ‘주주총회 의결권 행사 현황’ 등을 봐도 김 명예회장이 주주 간 계약에 따른 제약으로 의결권 행사를 못했다는 정황은 딱히 엿보이지 않는다. DB에서 의결권 있는 최대주주·특수관계인 지분은 약 880만여주다. 주총에서 행사된 최대주주·특수관계인 의결권 행사 지분도 880만여주로 딱 들어맞는다.
여러 공시와 정황에 비춰 가능성은 두 가지다. 의결권 제한에 관한 주주 간 계약이 없었거나, 있었더라도 아버지 뜻을 따라 의결권 행사가 이뤄졌을 경우다.
다만, 부자간 의결권 제한에 관한 주주 간 계약이 있었는데도 이를 공시하지 않았다면 공시 의무 위반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자본시장법 제147조에 따르면, 상장사 주식 5% 이상 보유자는 보유 상황, 목적, 주요 계약을 금융위에 보고해야 한다. 또, 기업공시서식 작성기준에 따르면, 의결권이 제한된 주식, 의결권 행사·부활 조건 등이 있는 경우 주석에 기재 의무가 명시돼 있다. 주주 간 계약에 따라 의결권이 제한된다면, 이는 ‘주요 계약’에 해당하므로 대량보유보고서(5% 보고)에 공시해야 한다는 게 금융당국 지침이다.
[배준희 기자 bae.junhee@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327호 (2025.09.17~09.2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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