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만큼의 전락도 수용 못하는 중산층의 속물적 욕망 다뤘죠"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24일 개봉)는 갑작스런 실직 후 재취업을 위해 잠재적 경쟁자들을 하나둘 씩 제거해가는 가장 만수(이병헌)의 행적을 따라가는 블랙코미디다.
너무나 사랑하는 가족과 집, 25년 간 보람을 느꼈던 제지 공장 일을 위해 살인까지 계획하고 감행해가는 그의 ‘위험한’ 여정은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잔혹하고 슬프다.
23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난 박 감독은 “만수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관객이 질문을 계속 하게 만드는 게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희생자를 동정하면서도 자신 만의 절박한 이유로 어리숙하게 살인을 실행해가는 만수의 모습을 짠하게 보다가도, 그렇다고 연쇄 살인이라는 중범죄까지 저질러야 하느냐는 생각을 관객이 갖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박 감독은 “만수에게 마음을 줬다가 거둬들였다가 하는 과정을 반복하게 만들었다”며 “관객이 스스로 윤리적 질문을 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연출 철학의 연장선 상에 있는 작품”이라고 했다.
영화 감독에게 전작과의 비교는 피할 수 없는 숙명 같은 것. 그도 이 영화를 만들면서 전작 ‘헤어질 결심’을 좋아한 관객이 이 영화도 좋아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졌다고 했다.
"'헤어질 결심'이 시적인 느낌이 강하고 여백이 많았다면, 이 영화는 산문에 가깝고 꽉찬 영화라고 생각한다"며 "전작이 여성적인 면이 강했다면, 이 영화는 남성적인 면을 탐구하는 작품"이라고 두 작품을 비교했다.
그러면서 “‘헤어질 결심’으로 제 작품 세계에 입문한 관객이라면 이 영화를 보고 충격 받으실 거고, 전부터 알아왔던 관객이라면 당황하지 않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는 '거장'이란 수식어보다는 ‘이 사람 영화는 늘 이렇지’라는 고정관념이 가장 부담스럽고 떨쳐버리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핏빛' '잔혹' '뒤틀린' '성적 묘사' '변태' 등의 표현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데, 나이 들수록 '늙은 변태' 같아 보여 그건 최악인 것 같습니다(웃음). 전작과의 비교를 스스로 하고, 관객 반응을 두려워하면서 바로 직전의 영화와 어떻게 다르게 만들까 방향성을 고민하는 감독일 뿐입니다."


원작(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도끼(The Axe)』)과 가장 큰 차별점은 아내 미리(손예진) 등 만수 가족의 역할과 비중이 커졌다는 것이다. 만수의 행동을 설명하는 동기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가족이다.
그리고 아내와 아들이 만수의 범행을 눈치 채는 건 서사에서 결정적인 터닝 포인트로 작용한다. 가족을 위해 하는 일 때문에 가족으로부터 배제될 지도 모른다는 ‘역설’은 후반부 캐릭터들의 성격과 이야기 구도를 바꿔 놓는다.
박 감독은 “가족을 범행 동기로만 보는 건 일종의 대상화라고 생각했다”며 “그래서 가족 한명 한명의 이야기를 들여다보고, 후반부에 그들의 시선에서 포착된 만수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균형을 맞추려 했다”고 설명했다.
만수의 타깃이 되는 범모(이성민), 시조(차승원), 선출(박희순)은 같은 직업이란 공통점 외에 다들 하나씩 만수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박 감독은 "이들은 자연환경에 둘러싸인 주택에 살고 있다는 점 외에 술에 대한 의존, 딸을 가진 아버지 등 유사성이 있다"면서 "결국 만수의 범행은 자신의 분신을 하나씩 파괴하고, 자신을 갉아먹는 행동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만수에게 제거되는 희생자들은 만수의 경쟁자인 동시에 만수의 또 다른 자아인 셈이다. 죽여야 할 대상에게서 '자신'을 보고 연민을 느끼게 되면서, 철저한 계획과 반복 하에 쉬워져야 할 일이 점점 어려워진다.
BBC 등 외신이 ‘어쩔수가없다’를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비교하는 것과 관련해 박 감독은 “계급 문제를 다룬 영화라 그렇게 볼 수도 있다”면서도 “정확히는 생활 수준의 전락을 기를 쓰고 피하려 하는 중산층 사람들의 속물적인 욕망을 들여다보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상대적 빈곤에서 오는) 중산층의 직업 불안은 인터넷으로 모든 것이 공개되고 비교되는 시대에 갈수록 심화하는 것 같아요. 요만큼의 전락도 수용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거죠. 거기에 한국적인 요소인 집에 대한 강한 애착,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가부장제 정서와 흔적을 집어넣었죠."
만수가 첫번째 피해자인 범모 부부와 격한 몸싸움을 하는 장면은 웃기면서도 슬픈 느낌을 준다. 배경에 깔리는 조용필의 노래 ‘고추잠자리’는 가슴 속의 처연한 감정을 더욱 휘몰아치게 만든다.
박 감독은 “찍을 때는 몰랐지만 편집할 때 본격적으로 음악을 입히면서 (박찬욱의 인장이 또렷하게 남을) 또 다른 명장면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을 했다”고 말했다.
모든 것을 제 자리로 돌려놓을 것 같았던 만수의 재취업은 결국 섬뜩한 미래의 시작이 된다. 가장의 범행을 알게 된 가족의 침묵이 언제까지 이어질 지, 손에 피를 묻혀가며 얻어낸 일자리를 AI(인공지능)가 언제 대체할 지 영화는 끝이 나고도 도돌이표 같은 질문을 관객 앞에 던져 놓는다.
"저나 배우들이나 지금 당장은 안정돼 있지만, 예전엔 언제 작품을 할 수 있을까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막막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나이 들면서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모르기에 우리 또한 잠재적 고용 불안 상태라고 할 수 있죠. 저만 해도 언젠가 작품에 투자가 안 붙는 상황이 올 것 같아 겁이 납니다. 그런 불안이 이 영화 만드는데 바탕이 된 거죠."
정현목 문화선임기자 gojh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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