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집 옮겨 해남으로, 왕의 사랑이 서린 명당

문운주 2025. 9. 22.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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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막히게 뜨겁던 여름은 물러가고, 가을이 살며시 다가왔다.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가 계절의 문을 연다.

대문을 지나면 사랑 마당, 이어서 사랑채와 작은 연못이 눈에 들어온다.

짝을 부르는 절박한 소리이자, 계절이 저문다는 신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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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비엔날레와 함께한 고산 윤선도 고택 여행

[문운주 기자]

▲ 녹우당 백련지 마음 심(心)자 모양으로 다듬어진 연못
ⓒ 문운주
숨 막히게 뜨겁던 여름은 물러가고, 가을이 살며시 다가왔다.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가 계절의 문을 연다. 들녘에는 벌써 가을빛이 번져가고 있다. 지난 18일, 발걸음은 해남으로 향한다. 목적지는 고산 윤선도의 옛 집 녹우당과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두 곳은 여행자에게 사색과 감흥이 깃든 특별한 만남을 마련해 준다.

녹우당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소나무 숲과 백련지 마음무덤이 여행자를 맞이한다. 소나무 숲은 단순한 경관이 아니라 바람을 막고, 사악한 기운을 차단하는 보호림처럼 느껴진다. 그 옆의 백련지는 마음 심(心)자 모양으로 다듬어진 연못, 이름 그대로 마음 무덤이라 불린다. 번잡한 생각들을 잠시 내려놓고 이곳에 묻어두라는 의미일까.

계절 저무는 신호 가득, 푸른 후원을 걷다
▲ 녹우당 윤선도의 4대 조부 효정이 15세기 중엽에 터를 잡아 지은 고택이다. 안채는 ‘ㄷ’자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사당은 안채 뒤와 담장 밖에 나란히 자리한다. 집 전체는 ‘ㅁ’자형 구조와 행랑채를 갖춘 전형적인 조선 상류 주택의 모습을 보여준다. 입구의 은행나무는 지금도 녹우당의 상징처럼 우뚝 서 있다.
ⓒ 문운주
녹우당은 윤선도의 4대 조부 효정이 15세기 중엽에 터를 잡아 지은 고택이다. 뒤로는 덕음산이 든든히 받쳐주고, 앞으로는 벼루봉과 필봉이 자리한 명당에 위치한다. 대문을 지나면 사랑 마당, 이어서 사랑채와 작은 연못이 눈에 들어온다. 사랑채는 효종이 윤선도에게 하사한 수원의 집을 1668년에 옮겨온 것이다.

안채는 'ㄷ'자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사당은 안채 뒤와 담장 밖에 나란히 자리한다. 집 전체는 'ㅁ' 자형 구조와 행랑채를 갖춘 전형적인 조선 상류 주택의 모습을 보여준다. 입구의 은행나무는 지금도 녹우당의 상징처럼 우뚝 서 있다.

뒷마당의 후원은 한국 전통 정원의 풍경을 그대로 간직한다. 회화나무는 선비의 기상을, 밤나무와 감나무는 계절의 풍요를, 동백나무와 곰솔은 사시사철 변치 않는 생명력을 보여준다. 우물과 장독, 맷돌 등 생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선조들의 삶과 정신을 고요히 전한다.
▲ 녹우당 비자림 숲길, 해남 덕음산 자락에 자생한 300여 년 된 비자나무 군락, 천연기념물 제241호
ⓒ 문운주
발걸음을 비자림 숲길로 옮기면 하늘을 가릴 만큼 울창한 비자나무들이 초록빛 터널을 이루고, 사스레피와 개비자, 동백과 송악이 더해져 숲은 더욱 풍성하다. 그늘이 깊고 공기는 서늘하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과 마음이 절로 가벼워진다. 머리 위에서는 매미가 마지막 힘을 다해 운다. 짝을 부르는 절박한 소리이자, 계절이 저문다는 신호다.
오우가
고산 윤선도

내 벗이 몇이나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

숲길 끝에는 오우가 길과 정원이 펼쳐진다. 고산 윤선도가 지은 시조 '오우가'에서 이름을 딴 길로, 물·돌·소나무·대나무·달 다섯 벗의 세계가 정원에 구현되어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숲과 고요히 선 소나무, 연못에 비친 하늘빛은 여행자에게 고산의 정신과 마주하는 사색의 시간을 선물한다.
먹빛으로 만나는 사색,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 자화상 1710년 무렵, 윤두서가 자신의 모습을 담담히 기록한 사실적 자화상으로, 오늘날까지 한국 초상화의 대표작이자 국보로 전해지고 있다
ⓒ 문운주
▲ 노승도 〈노승도〉는 윤두서가 수묵으로 그린 늙은 승려의 초상으로, 절제된 선과 여백 속에 고요와 성찰의 기운을 담은 작품이
ⓒ 문운주
발걸음은 곧 '전남국제 수묵비엔날레'로 향한다. 고산이 자연 속에서 찾았던 벗들을 오늘날의 화가들은 수묵의 먹빛으로 풀어내고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은은한 먹의 향기와 여백의 울림이 공간을 채운다. 검은 선과 번짐 속에서 산과 바람, 바다와 하늘이 다시 태어나고, 전통의 정신은 현대적 감각으로 확장된다.

이번 제4회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해남 전시는 '뿌리의 재발견'을 주제로 열리고 있다. 고산윤선도박물관(6관)에서는 윤두서의 자화상과 정선의 산수도가, 땅끝순례문학관(5관)에서는 구성연의 난초 8폭이 전시되어 수묵의 깊은 울림을 전한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윤두서의 자화상이다. 옷자락, 수염, 눈빛까지 매우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어 조선 초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이 작품은 300년의 세월을 넘어 지금도 담담한 눈빛으로 관람자와 마주한다. 이어 만난 노승도는 실제 노인의 주름, 표정, 체형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겸재 정선의 산수도는 또 다른 감동을 주었다. 굵고 힘찬 필선으로 펼쳐낸 웅대한 자연은 마치 화면 밖으로 흘러나올 듯 생동했고, 산수화가 단순한 경관 기록이 아니라 화가의 정신과 기개를 담은 또 하나의 세계임을 보여주었다.
▲ 녹우딛ㅇ 전라남도 해남에 위치한 고산 윤선도의 고택, 녹우당. 조선 상류주택의 전형을 보여주는 ‘ㅁ’자형 구조가 단아하게 자리잡고 있다.
ⓒ 문운주
▲ 녹우당 사랑채. 효종이 윤선도에게 하사한 수원의 집을 1668년에 옮겨온 것이다. 안채는 ‘ㄷ’자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사당은 안채 뒤와 담장 밖에 나란히 자리한다. 집 전체는 ‘ㅁ’자형 구조와 행랑채를 갖춘 전형적인 조선 상류 주택의 모습을 보여준다. 입구의 은행나무는 지금도 녹우당의 상징처럼 우뚝 서 있다.
ⓒ 문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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