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중앙] ‘하고픈 일은 당장’ 소방·웹툰·창업 넘나든 ‘다능인’의 길
“저는 관찰하기를 좋아합니다. 소방관으로 일할 때도, *웹툰을 그릴 때도, 또 인공지능(AI)으로 음악을 만들거나 앱을 개발할 때도 관찰하는 습관이 도움됐던 것 같아요. 또 ‘홍익인간' 정신을 가치관으로 갖고 있다고 할까요, 널리 다른 사람들에게 이롭게 하는 일을 저는 매우 즐겁게 해요. 제가 지금 하는 여섯 가지 일들 모두 그런 기질 때문에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광주광역시에서 나고 자란 이수열(40·1986년생)씨는 중학교 시절 교실 구석 책상에 엎드려 낙서를 끄적거리는 아이였어요. 취미 삼아 만화를 그리다 고2가 된 2002년 용돈벌이 삼아 청소년 만화공모전에 출전했고 덜컥 3등을 했죠.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고3이던 2003년 4월부터 입시미술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그는 8개월 짧은 입시 준비 끝에 2004년 조선대 만화애니메이션과에 합격했습니다. 24개월 군 복무와 1년 반의 공장·골프연습장·택배 등을 가리지 않는 아르바이트를 거쳐 2008년 2학기에 복학하니 만화 소비 플랫폼이 온라인으로 옮겨가 웹툰이 대세가 돼 있었죠. 그 전해인 2007년은 ‘미생’으로 유명한 윤태호 작가가 웹툰계에서 처음 이름을 떨친 해이기도 해요.

웹툰작가를 꿈꾸며 공부했지만 수열씨는 온전히 작품활동만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2011년 졸업 후 쇼핑몰·물류회사 등 만화와는 무관한 직장생활을 시작했죠. 그러나 일과 후에는 틈틈이 만화를 그렸어요. 고정된 자세로 만화를 그리다 어깨가 아파서 웨이트트레이닝을 해봤다가 소질이 있었는지 헬스장에서 트레이너로 일하기도 했죠. 그렇게 닥치는 대로 주어진 일을 하며 평범하게 살던 수열씨 삶에 첫 번째 변곡점이 찾아왔습니다.
“2012년 11월 호주에서 일하던 고교 시절 친구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이렇게 의미 없이 흘러가는 대로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부터라도 내가 원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도전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이전부터 주변 어른들로부터 공무원을 해보라는 조언을 여러 번 들었지만 엄두를 못 냈죠. 학창시절 공부를 잘하지 못했던 데다 몸 쓰는 일을 좋아하는 수열씨에게 경쟁률도 합격선도 높은 공무원시험은 ‘넘사벽’(넘을 수 없는 벽)이었어요. 그러나 공무원 중에는 체력이 바탕이 돼야 하는 경찰이나 소방관도 있다는 걸 알고 난 후 생각이 달라졌죠. 그중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소방공무원에 도전해보기로 결심한 그는 1년간 준비 끝에 2014년 6월 소방관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6개월간 소방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2015년 초부터 경기도 안성시에서 소방관으로 일하기 시작했죠.
밖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소방관이 하는 일은 매우 다양했어요. 화재를 진압하고 사람을 구조하는 일뿐만 아니라 벌집을 제거하거나 잠긴 문을 여는 일을 비롯해 행정업무까지 25시간 일하고 23시간 쉬는 체제 속 초보 소방관 수열씨는 27시간 일하고 21시간 쉬는 강행군을 이어갔죠. 서른 살 젊은 나이에도 힘든 일을 묵묵히 수행하던 40~50대 선배들이 건강 문제를 겪는 것을 보면서 ‘이 일을 나이 들어서도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생겼어요. 결국 *사이드잡으로 2명의 친구와 함께 고향 광주에 PT숍을 열기로 하고, 상근할 수 없던 수열씨는 수중에 가진 돈을 모아 투자했습니다.

소방관 2년 차인 2016년 3월부터는 소방업무를 하면서 겪는 일상을 소재로 웹툰을 그려 포털에 연재도 했죠. 네이버웹툰 베스트도전 코너에 소방툰 ‘불만 있어?’를 2020년 3월까지 주 1회 총 2년(1년 연재하고 2년 휴재 후 다시 1년 연재) 동안 게재했어요. 소방 업무가 끝나면 웹툰을 그리거나 광주에 있는 PT숍으로 가서 일하는 강행군을 하던 수열씨에게 결국 건강 문제가 생겼습니다. 2016년 9월 휴직하고 광주로 내려가 쉬면서 웹툰 제작과 PT숍 일을 병행했죠. 2년간 PT숍을 운영하면서 그는 실패를 통해 큰 교훈을 얻었어요. 동업했던 친구의 배신으로 투자금을 잃고 소송까지 하면서 몸도 마음도 상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PT숍 운영을 정상화해 빚을 갚은 후 2017년 4월에 정리했죠.
1년의 휴직이 끝날 무렵, 소방서 선배들과 가족은 복직을 다그쳤지만, 오랜 고민 끝에 수열씨는 결국 2017년 8월 소방서에 사직서를 냈습니다. 2012년 친구의 죽음을 통해 깨달았던 것, 바로 지금 다른 사람들의 말에 등 떠밀려 복직하면 이후에는 자기 뜻대로 살지 못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죠. 웹툰 제작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던 그는 PT숍을 정리하고 남은 보증금에 대출까지 받아 헬스장을 인수했어요. 헬스장을 운영하며 대한피트니스경영자협회에 가입해 각종 피트니스 대회에서 약물 금지 취지의 ‘내추럴보디빌딩대회’ 캠페인에 참여하는 등 관련 활동도 적극적으로 했죠.

코로나19 펜데믹으로 헬스장이 직격탄을 맞으며 돈을 벌기는커녕 매월 빚만 생기는 나날. 언제 끝날지 모르는 힘든 시간을 수열씨는 만화를 그리며 근근이 버텼죠. 네이버웹툰 ‘불만 있어’ 연재를 하면서, 2019년 4명의 만화작가와 함께 나주 혁신도시에 만화제작사를 설립하고 다양한 공동작업을 진행했어요. 카카오웹툰에 ‘죽음을 먹는 꽃’, 무협·액션특화 웹툰 ‘무툰’에 ‘3분헬스’ 등을 비롯해 콘텐츠코리아랩 지원사업과 외주사업까지 4년간 이어갔죠. 이와 더불어 개인적으로 2022년부터 건강의학분야 지식을 다루는 ‘헬스툰’에 영화 ‘고스트 라이더’를 패러디한 ‘고스트로이더’를 연재했어요.
2019년에는 ‘소방관 *PTSD’ 문제를 널리 알린 소방관심리상담사 박승균 소방관의 소개를 받아 소방방재신문에 만평을 연재하게 됐어요. 이를 계기로 순직소방관추모기념회를 홍보하는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죠. “봉사활동을 위해 두세 번 국립대전현충원을 방문했었어요. 묘역을 돌아보던 중 제가 아는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발견하고 무척 놀랐죠. 안성시에서 소방관으로 일할 때 함께 일했던 팀장님의 이름이었어요. 암 투병을 하다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때 또 한 번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지금 당장 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습니다.”

코로나19가 잦아든 2023년 초부터는 본격적으로 헬스장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일을 벌여나갔죠. 지인의 제안으로 헬스장 인테리어 작업 중 3D 설계도면 작업을 맡았으며, 헬스장 운영 중 나오는 각종 문제를 들여다보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웨이트트레이닝하며 먹는 헬스 보조제 프로틴의 경우 시중에 나온 제품이 대부분 맛이 없다는 점에 문제의식을 갖고 직접 맛있는 프로틴을 만들어보자며 직접 제조·판매도 시작했고요. 또 헬스장에서 사용하는 음원 사용료 문제로 경영자들이 음악저작권협회와 분쟁이 있다는 점에 착안, 프로그래머 등 동업자 2명과 함께 AI로 음악을 만들어 무료로 배포했죠. 2023년 8월부터 직접 만든 음악을 ‘바나나뮤직’이라는 사이트에 올리기 시작해 2025년 9월 현재 2000곡이 넘는 음원이 쌓였습니다.

이현세 작가를 좋아했던 만화가 지망생 수열씨는 현재 6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다능인 창업가가 됐습니다. 헬스장이나 커피숍·병원 등을 운영하는 소상공인들을 위한 무료 음악서비스 ‘바나나뮤직’ 사이트 오픈을 준비 중이고, 헬스 트레이너들이 고객 일정관리를 쉽게 할 수 있는 앱 개발, 헬스장 3D 도면 설계, 프로틴 사업, 헬스장 2곳 경영, 그리고 웹툰 제작까지 동시에 하고 있죠. 그러다 보니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조만간 몇 가지 일은 정리할 계획이에요. 당장은 바나나뮤직 사이트와 일정관리 앱 개발에 집중해 서비스를 론칭하고 수익까지 낼 수 있는 비즈니스모델로 만드는 데 모든 자원을 집중하고 있죠.
“삶은 곧 문제 해결의 연속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많이 고민하고 제 나름대로 데이터도 뽑아보고 깊이 관찰해서 해결책을 찾기 위해 애썼을 뿐인데 돌아보니 많은 일을 벌이고 있더라고요. 친구와 선배, 2번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목격했던 게 제 인생의 변곡점이 됐습니다. 하고 싶은 일은 지금 당장 해보자는 생각으로 열심히 살았고 후회는 없습니다.”

수열 씨는 좋아하는 일을 찾고자 하는 청소년들에게도 조언했어요. “부모님이나 다른 사람이 시키는 대로 살지 마세요. 10대인 지금부터 스스로 결정하고 해결하는 능력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부모님은 자녀에게 안전한 길만을 제시하는데, 그 안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을 수 없습니다. 뭐든 도전해봐야 알 수 있으니까요. 덧붙여 이왕이면 ‘널리 다른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일’을 할 수 있다면 최고의 삶 아닐까요.”
■
「 *웹툰(webtoon): 웹(web)과 카툰(cartoon·만화)의 합성어로, 온라인 만화 및 그 플랫폼을 통칭하는 한국식 영어다. 1990년대 말 개인 홈페이지에서의 연재를 시작으로, 2000년대 초 다음·네이버 등 포털 사이트에서 스크롤 방식의 온라인 전용 만화 플랫폼이 정착했고, 2000년대 중반부터 웹툰 서비스를 본격화하면서 한국은 웹툰의 종주국이 됐다. 현재는 다양한 K-콘텐트의 원천이 되는 거대한 시장으로 성장했다.
*사이드잡(Side Job): 본업 외에 추가로 하는 일을 의미하며, 주로 본업이 없는 저녁·주말 등의 시간을 활용해 수익을 창출하는 게 목적이다. 부업·투잡(Two Jobs)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며, 생계 수단뿐 아니라 자아실현이나 경험 축적을 위한 동기에서도 시작한다.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신체적인 손상 또는 생명에 대한 불안 등 정신적 충격을 수반하는 사고를 겪은 후 발생할 수 있는 심신장애. 외상뿐 아니라 생물학·심리·사회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생한다.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 충격 후 스트레스장애, 외상성 스트레스장애, 외상 후 증후군, 외상 후 스트레스(증후군), 트라우마라고도 한다.
*다능인: 영화·법학·음악·디자인 등 서로 다른 분야의 길을 걸어온 다능인이자 테드(TED)의 인기 강연 ‘어떤 사람들에겐 하나의 천직이 없는 이유’로 유명한 에밀라 와프너의 책 『모든 것이 되는 법』에 소개된 개념. 한 분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배우고, 빠른 습득력·적응력으로 새로운 것을 익히는 상황 자체를 즐기며, 유난히 관심사가 많고 다재다능하며 나름의 열정도 있으나 크게 이뤄놓은 것은 없고, 천직을 찾아 헤매지만 한 가지만 파기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사람을 ‘다능인(Multipotentialite·멀티포텐셜라이트)’이라 명명한 것. 사이드 프로젝트, 부캐, n잡러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
글=김은혜 객원기자 sojoong@joongang.co.kr, 사진=이수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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