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아지는 시간, 길어지는 정치 해안선

김정훈 2025. 9. 21.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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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4.5일제 논쟁의 정치 지형도

[김정훈 기자]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7월 3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대통령의 30일, 언론이 묻고 국민에게 답하다' 기자회견에서 출입기자단의 질문을 받고 있다. 이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주 4.5일제를 '법을 통해 강제로 시행할 게 아니라 사회적 대화를 통해 가능한 부분부터 조금씩 점진적으로 해나가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2025.7.3
ⓒ 연합뉴스
"영국의 해안선 길이는 얼마나 될까?"*

단순한 질문 같지만, 프랙탈(fractal) 이론의 창시자 브누아 멘델브로(B. Mendelbrot, 1967)가 제시한 '해안선의 역설' 개념으로 보면 그 대답은 상식을 뒤집는다. 측정 단위가 세밀해질수록 해안선은 복잡하게 드러나며, 이론적으로 그 길이가 무한대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겉으로 단순해 보이는 경계(boundary)가 사실상 무한한 복잡성을 품고 있음을 해안선의 비유를 통해 설명했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좌와 우의 대립은 바다와 육지처럼 명료해 보이지만, 실제 갈등이 집중되는 지점은 중도의 경계선이다. 그리고 그 경계는 해안선처럼 굴곡지고 상황에 따라 매우 가변적이다.

최근 불거진 주 4.5일제 논쟁 역시 그 대표적 사례다. 표면적으로는 진보와 보수가 바다와 육지처럼 뚜렷해 보인다. 진보 진영은 노동자의 삶의 질과 창의성 향상을 강조하고, 보수 진영은 기업 부담과 경쟁력 약화를 우려하는 것 같다. 겉으로는 명확해 보이는 이 구도. 하지만 진짜 논쟁은 그 중간, 두 진영의 울퉁불퉁한 해안선에서 끝없이 펼쳐진다.

주 4.5일제, 경계의 복잡한 해안선

주 4.5일제는 '찬성 대 반대'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이 논쟁은 다양한 이해가 교차하는 '굴곡진 해안선' 문제다. 어느 대기업에선 그래도 '인력 여유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중소기업은 인건비와 납기 압박에 부담을 호소한다. 청년층은 여가 확대를 환영하지만, 생계가 달린 자영업자는 업종과 사업 특성에 따라 매출에 미칠 영향을 걱정한다. IT·금융 중심의 대도시에선 제도 적응이 상대적으로 빠를 수 있지만, 제조업과 서비스업에 의존하는 곳에선 충격이 클 수 있다. 주 4.5일제는 이처럼 세대·산업·지역 등에 따라 서로 다른 파급 효과를 낳는 복잡한 해안선을 그린다.

구호 너머, 진짜 정치가 시작될 때

정치의 본질은 여기서 드러난다. 정치의 일은 "단축하자" 혹은 "반대한다"라며 구호를 외치는 데 있지 않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바다와 육지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해안선처럼 울퉁불퉁한 경계의 굴곡을 정밀하게 그려내고, 상충하는 이해를 조율하는 능력이다. 선거의 승부가 중도층에서 갈리듯, 정책의 성패 역시 이 해안선에서 갈린다.

현행 근로기준법(제50조, 제53조)에 따르면 주당 법정 근로시간은 40시간(연장근로 포함 최대 52시간)이다. 주 4.5일제를 제도화하려면 임금 산정, 연장근로 처리, 노사 간 협의, 산업현장의 수용성 같은 세부 요소들을 세심하게 조율해야 한다. 몇몇 지자체에서 시범 운영한 사례가 있지만, 이 역시 제도를 강제로 정착시켰다기보다 유연근무·단축근무 형태 등을 활용해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는 접근 방식이었다. 만약 국회 차원의 법 개정으로 논의가 진전된다면, 논쟁의 해안선은 오히려 더 길고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멘델브로의 질문 그리고 한국 정치의 숙제
▲ 한복 vs 상복 한복과 상복을 입은 여야 의원들이 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기국회 개회식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대다수 의원들이 한복 차림인데 반해, 국민의힘 의원들은 근조 리본을 달고 상복 차림으로 참석해 대비를 이룬다.
ⓒ 남소연
멘델브로가 해안선의 복잡성을 수학으로 풀어냈듯, 지금 우리의 정치는 정책의 복잡한 경계를 정밀하게 그려낼 능력이 필요하다. 주 4.5일제 논쟁은 그 능력을 시험하는 무대다. 이를 위해 두 가지가 특히 중요해 보인다.

첫째, 데이터 기반의 정책 설계가 필수적이다. 중소기업, 자영업, 특정 산업별로 주 4.5일제 도입 시 예상되는 경제적 충격을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 단순히 여론조사 결과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현장의 말을 데이터로 전환해 정책에 반영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 이해관계가 첨예한 이슈일수록, 전문가뿐만 아니라 당사자들이 직접 참여하는 논의의 장을 튼실히 마련해야 한다. 일방적 발표가 아닌, 숙의(deliberation) 과정을 통해서 서로의 해안선을 인정하고 타협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런 노력이 모여야 비로소 '선 긋기'가 아닌 '조율'의 정치가 가능해진다.

멘델브로의 질문은 우리에게 단순함 뒤에 숨어 있는 복잡성에 주목하라고 말한다. 영국의 해안선 길이가 끝없이 늘어나듯, 정치의 경계선 또한 끝없이 펼쳐져 있다. 단번에 직선으로 그을 순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굴곡진 해안선을 단숨에 가르려는 무모한 칼이 아니라, 그 복잡한 지형을 한 땀 한 땀 정밀하게 그려낼 섬세한 정치다. 주 4.5일제 논쟁은 그 능력을 발휘하는 현장이자, 한국 정치가 진정으로 성숙할 수 있는 시험대로 작용한다.

* 멘델브로(B. Mendelbrot). (1967). How long is the coast of Britain? Statistical Self-Similarity and Fractional Dimension. Science, New Se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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